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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ID : phil_150
    작성자 : D.D
    추천 : 3
    조회수 : 703
    IP : 210.2.***.54
    댓글 : 10개
    등록시간 : 2011/01/17 18:05:25
    http://todayhumor.com/?phil_150 모바일
    '기대'님의 게시물에서 '울보유비'님의 질문에 대한 덧글입니다.
    요셉보이스(Joseph Beuys)의 작품으로 이야기를 꺼내고 싶어서 부득이하게 게시물로 덧글을 답니다. 덧글로 사진을 어떻게 올려야하는지 잘 몰라서요. 그리고 제가 이 글의 바탕으로 두고있는 게시물의 원본 주소는
    http://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phil&no=120&page=1&keyfield=&keyword=&sb=
    입니다.

    요셉보이스의 <죽은 토끼에게 그림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1965년> 퍼포먼스입니다. 작품의 형식을 설명하자면, 3시간동안 죽은 토끼에게 그림에 대해 중얼거립니다. 그리고 관객은 공연장의 밖에서 유리창을 통해 이를 관람하게 되어있습니다. 요셉보이스에 대해 아시는 분이나 작품의 네러티브(형식 외적인 이야기)를 아시는 분들이라면 이 퍼포먼스가 미술사적으로, 혹은 철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고 계실 겁니다. 하지만 저는 이 글에서 이 작품의 의미를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해 보고자합니다.

    그리고 제가 이 퍼포먼스를 글 머리에 둔 이유는 '기대'님의 게시물에 '울보유비'님의 덧글, "남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어떤 노력이나 훈련으로 가능 할 것인가."의 물음에 대해 저 나름의 답변을 드려야 하는데, 좀 더 쉽게 이야기를 끌어가 보고싶어서 입니다.(1)
    그리고 제가 덧글에 언급했던 남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에 대해 좀 더 심화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느껴진게 "유레"님이 말씀하신 "남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는 사실 "다원주의"적 태도거든요, 근데 제 논의는 다원주의적 층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심화적인 내용이 있어요. 그 부분을 이 덧글에서 짚어보고자 합니다.(2)

    (1)'울보유비'님의 물음에 대한 제 나름의 답변
    요셉보이스의 퍼포먼스는 표면적으로 죽은 토끼에게 "언어"를 통해 그림에 대해 설명을 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저는 작가가 퍼포먼스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관계"를 유추해 보고자 합니다. 소위 우리가 사회에서 "인간관계"를 맺는 방식을 크게 "사물과 관계맺기" 혹은 "타자와 관계 맺기"라는 맥락으로 이해해 봅시다. 그리고 이 퍼포먼스를 "죽은 토끼"와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것으로 이해해봅시다. 이 두 가지가 전제입니다.
    그렇다면 요셉보이스는 "죽은 토끼"를 "타자"로 보고 관계 맺기를 시도한다고 파악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요셉보이스는 과연 이 관계 맺기를 성공할 수 있을까요?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실패 하겠지요. 이렇듯 요셉보이스는 "타자"에 대한 비유로 "죽은 토끼"를 설정해 타자와의 관계 맺기는 어떤 방식으로든, 충분히 많은 시간을 들여도 "실패"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이런 은유를 통해 '울보유비'님이 질문해 주신 '남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살펴볼까 합니다. 제가 '기대'님의 글에 쓴 덧글에서는 "관계"라는 것은 '남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가 그 "관계의 비극"을 끝낼 수 있는 시작점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요,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비극의 고통을 '완화'할 수 있을 뿐 비극을 "종료"시킬 순 없다는 생각이 제 의견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요셉보이스는 이 고통을 끝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완화'시키고자 예술적 행위를 실천한 것입니다. 왜냐면 이 "예술적 행위"조차 죽은 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하는 방식은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층위에서 "남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를 언급한 것입니다. 이것이 다원주의적 태도와 다른 이유는 "남"은 우리가 마주보는 인간이지만, 그와 동시에 완전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는 존재, 즉 타자의 존재이며 그것을 인정(정확히는 긍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너는 너 나는 나, 각자의 목적이 있다.'라는 식의 다원주의는 타자에 대한 몰이해를 "방치"하는 태도입니다. "방치"와 "긍정"은 엄밀한 의미에서 차이가 있지요. "긍정"은 소위 타자 안에 있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 즉, 좀 어려운 말로 "타자의 타자성"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을 뜻합니다.

    때문에 어떠한 노력을 통해, 혹은 훈련을 통해 가능한 것이 아닌 듯 보입니다. 이성을 통해 "이해"의 차원을 획득할 수 없는 존재와 마주해야 한다는 것은 "인식"의 차원을 넘어서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글에서 제가 언어를 매개로 "타자의 타자성"을 설명하는 것 조차 모순인 까닭입니다.
    하지만 저는 "어떤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실패"를 확신할 지라도요, 요셉보이스 처럼 말입니다. 참 제가 생각해도 이기적인 말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요셉보이스의 퍼포먼스에서 얻게 되는 "감수성-감정"의 차원을 고려해본다면 이러한 "타자의 타자성을 마주하는"시도가 어떤 효용성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선 뒤에 좀 더 설명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2)'유레'님에 대한 코멘트
    전 (1)단락에서도 언급했듯이 "남과 내가 다름을 인정하는 태도"는 단순히 다원주의적 존중의 태도와 다른 맥락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겁니다. 때문에 "나는 나 너는 너"라는 식의 태도는 단순한 "몰이해의 방치"이지 타자성과 대면하는 "긍정"의 태도가 아님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이 단락에서는 이 "타자의 타자성을 긍정"하는 태도가 어떤 어려움과 괴로움이 있는지를 이야기 하고자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람들과, 사물들과 관계를 맺습니다. 하지만 이 관계 맺기는 항상 고통을 유발합니다. 저는 이것을 이전 덧글에도 언급했듯이 '관계의 비극'이라고 부릅니다. 비극은 왜 일어날까요? 실상 우리는 관계를 맺는 대상을 "전유"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저는 우리가 관계에 있어서 대상을 전유하고자 하는 방식을 "욕망"의 차원이나 "본능"의 차원에서 이야기 하지 않고자 합니다. 제가 봤을 때 오늘날 우리들이 맺고 있는 "관계"를 단순히 욕망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제 "관계"는 고도로 발전된 기술문명이 인간의 위협하는 이 시점에서 인간의 생존을 위해 기피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전유"는 대상을 완전한 이해의 차원으로 묶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같은 방식으로 1)동일화 2)이성적-표면적 이해 3)확고함, 명료함 의 개념 등이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관계를 맺고자 할 때 대상을 표면적인 지각을 통해 우리의 이성 안에서 명료한 방식으로 포섭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전유"를 <욕망-본능> 이전에 <감수성의 문제, 감정의 방향성의 문제>의 관점으로 바라봅니다. 보충하자면, 우리가 대상과 관계를 맺을 때 대상을 전유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이에게 적용되는 문제가 아니라 개인이 그러한 감수성을 갖고 있고 감정의 방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 "전유"의 문제는 외부의 차원에서 "습득"된 방향성이 됩니다. 그리고 이 "외부의 차원" 바로 "타자의 타자성"입니다. 우리의 감수성에, 그리고 감정의 방향성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내부의 욕망이 아니라 우리 안의 무의식을 결정하는 "타자성"이라는 것입니다.

    "타자성"의 차원을 보충하자면, "전유"의 방식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전유"의 차원과 달리 "타자성"은 1)비 동일성 2)비이성적-내부적 이해 3)확고하지 않는, 알 수 없는 등의 논리를 따릅니다. 그리고 "타자성"의 논리를 따르는 이 "타자성-감수성"은 <욕망-본능>의 차원과 어떻게 다른지를 짚어볼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감수성-감정의 방향>의 차원은 타자성의 논리를 따르고 이 논리는 외부의 차원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욕망-본능>의 차원은 "인간 내부"의 문제에 모든 걸 국한합니다. 인간이 생득적으로 갖고 있는 본능은 "감수성"의 일부를 형성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모든 "감수성"이 본능이나 욕망을 따르지 않습니다. 때문에 <감수성-감정의 방향>의 차원은 <본능-욕망>과 다른 층위에서 논의되어야 합니다.

    종합하자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대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은 대상을 "전유"하고자 하는 방식이며, 이런 방식은 우리가 감수성, 감정의 방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감수성은 욕망, 본능의 차원이 아닌 외부의 차원, 즉 타자성의 논리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입니다.

    여기까지의 논의가 인간이 다른 대상과 관계를 맺는데 있어 "전유"하고자 하는 방식을 제가 어떤 층위에서 논하고 싶어하는지를 풀어낸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타자성"에 대해 언급할 때 간접적으로 언급했지만, 저는 어리석게도 이 "타자성-알 수 없는 것"을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 "이해"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점이 "타자성을 마주하는 일"이 어려운 이유입니다. 이 모순을 극복할 길은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옵니다. 아마 여기까지의 논의도 전혀 이해가 가지 않으시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관계"라는 것을 익숙한 "욕망-본능"의 개념 안에서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소위 "알 수 없는 것"의 차원에서 이야기해야 한다는 것이, 그것도 "언어"를 매개로 설명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지금 제가 글로 간증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타자성"을 긍정하는 태도는 마치 동전의 앞뒤를 동시에 보는 것과 같이 "말도 안 돼는 일"이나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집니다. 때문에 실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요셉보이스의 예를 다시 들어봅시다. 우리는 "죽은 토끼"를 일반적인 토끼의 상태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토끼"라는 관념에 적용되는 토끼의 상태는 "살아있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소위 "토끼"의 상투형은 "살아있는 토끼"입니다. 이는 고정관념이죠. 요셉보이스는 이 "토끼"의 상투형을 비틉니다. "죽은 토끼"는 우리에게 "토끼"의 예외적인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죽은 토끼와 관계 맺기를 시도하는 요셉보이스는 관계 맺기의 이면, 그러니까 관계를 맺는 대상의 타자성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은유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요셉보이스의 탁월한 점은 바로 이 부분이죠. 그의 퍼포먼스가 보여주는 은유는 언어매체가 전달하지 못하는 "감수성"의 차원을 열어줍니다. 우리에게 죽은 토끼와 작가가 3시간 동안 관계 맺기를 실패하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타자성을 마주하고 긍정하기 위해선 요셉보이스처럼 해야 할까요? 사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건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본다면 우리가 가장 가깝게 생각하는 친구나 배우자를 떠올려봅시다. 우리가 관계의 비극이 초래하는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선 타자성을 마주하고 긍정하야 한다고 말하지만 실상 내가 사랑하는 친구, 배우자에게 내가 알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직면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내가 가장 잘 아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내가 가장 모르는 부분이 있는 친구, 혹은 배우자를 떠올리는 일은 배신과도 같은 감정을 유발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이가 "내가 모르는 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매우 슬픈 현실일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타자성을 마주하는 일은 동전의 앞뒤를 동시에 보는 일과 같아 우리가 친구를 만날 때 "살아있는 친구"를 만나지만, 동시에 "죽을 수도 있는 친구"를 만나는 사실을 지각하는 일이 "타자성을 긍정하는 태도"입니다.

    관계의 비극에 원인이 되는 "관계의 상투형"은 언제나 대상의 일반적인 상태를 전제로 합니다. "토끼"처럼 말이죠. 때문에 대상과 관계를 맺는 순간마다 그 대상의 상투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우린 이성을 통해 대상을 "전유"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대상이 일반적인 상태에 머문다는 환상은, 대상을 "전유"하고자 하는 "감수성"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관계를 맺는 대상이 소멸할때, 그러니까 "죽은 토끼"의 상태처럼 예외적인 상태가 되어 버렸을 때 우리는 그제서야 대상의 "타자성"에 직면하게 됩니다. 돌아가시기 직전 부모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관계를 맺고있던 "부모님"의 가장 예외적 상황을 직면하게 되고 고통스러워 합니다. 대상의 타자성에 직면하는 순간은 이 처럼 슬프고, 고통스러운 순간입니다. (요셉보이스가 죽은 토끼를 마주하는 일 처럼 말이죠.)

    (3)덧글을 마치며..
    저는 각(1)(2)단락을 통해 "나와 남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가 무엇인지, "타자성"을 마주하는 태도가 어떻게 어려운지, 어떻게 괴로운 일인지를 서술했습니다. 사실 여기까지의 논의를 전개하는 데에 근거도, 논리도 부족한 점에 한 두 군대가 아닐 것 같습니다. 그래도 실패를 확신하는 시도를 하는 요셉보이스마냥 정신없이 글을 적어 내렸습니다.'울보유비'님이 물어보셨던 "남과 내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어떤 노력이나 훈련으로 가능 할 것인가."에 대해 저 나름의 답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 글은 고통을 완화하는 목표를 두고 시도될 수밖에 없는 행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러한 시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술가나 과학자들, 문학가들이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계속해서 시도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그들은 “모르는 것,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열정을 다해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가 가장 필요한 지점은 “사람”과의 관계가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저도 역시 사람과의 관계를 맺으면서 항상 그 관계의 상투형에 집착해 “친구니까 ~해야 한다.” “애인이니까 ~해야 한다.” “엄마니까 ~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대부분 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관계를 맺는 대상이 갖고 있는 “타자성”과 마주한다면, 우리가 그들과 만나는 순간은 매우 예외적인 순간이 됩니다. 가령 우리가 친구와 만난다고 본다면 내가 잘 알고 있는 이 친구를 가장 잘 이해면서 동시에 가장 낯선 사람으로서 대하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친구와 만나는 시간과 공간은 어떨까요? 가장 예외적인 순간이 되지 않을까요? 우리의 모든 감수성이 대상을 향해 집중되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사실 여기에서 니체의 영겁회귀(영원회귀)를 언급해야 하는데 아.. 그렇게 되면 진짜 복잡해 질 것 같아서 출저를 달고 니체의 영원회귀를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출저: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영원회귀(永遠回歸)는 니체 철학에서 볼 수 있는 근본사상의 하나로 "똑같은 것이 그대로의 형태로 영원에 돌아가는 것(回歸)이 삶의 실상(實相)이다"라는 생각이다. 모든 생성(生成)을 한 원환(円環) 안에서의 되풀이로 보는 이 사상에서는 모든 점이 바로 중심점(中心點)이 되기 때문에 현재의 이 순간이 영원한 과거와 미래를 응축(凝縮)시킨 영원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 되며, 이리하여 현재의 모든 순간, 현실의 이 대지(大地) 위의 삶 자체가 그대로 영원한 가치로 이어져 힘차게 긍정되어 간다는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는 간단히 말해 생은 원안에서 반복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순간에 영원적 의미를 부여하고 긍정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타자성을 마주하는, 긍정하는 일”은 이처럼 영겁회귀의 태도를 갖고 대상과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때.문.에 어려운 것이기도 하구요. 순간을 긍정하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상투형 개념을 파괴하고 매 순간을 항상 새롭게 하는 태도거든요. 이점이 아주 골치 아프지요. 하지만 대상과 관계를 맺는 순간만큼은 일생의 가장 특별한 순간처럼 머릿속에 모든 상투형을 몰아내 보는 건 어떨까요. 실패하겠죠?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시도하는 거죠. 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

    긴....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한글프로그램으로 5페이지 정도의 분량이군요. 이 글 쓰느라 하루를 다 허비했지만, 문제를 얻어 생각을 하고 글을 쓰는 일이 재미있어서 이렇게 게시물을 남깁니다. 부족한 논리나 궁금하신점, 욕, 뭐 상관없이 덧글 다셔도 무방합니다.

    이 게시물을 추천한 분들의 목록입니다.
    [1] 2011/01/17 20:11:23  112.186.***.125  
    [2] 2011/01/17 23:19:44  59.31.***.184  
    [3] 2011/01/19 12:04:50  175.124.***.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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