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쉬슈팔(Shishupal)왕이 크리슈나에게 999회의 욕설을 퍼부었지만 그는 참았습니다. 그러나 왕이 그 다음의 욕설을 퍼부었을 때, 그는 바퀴 같은 무기인 그의 차크라로 왕을 죽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크리슈나는 관용의 존재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깊은 곳에는 그렇지 않다는 의미입니까?" <div><br></div> <div><br></div> <div> 우리 모두는 오직 피부 깊이의 관용만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그렇게 보일 수 있다. 만약 내가 나에 대한 네 번째 욕설에 화를 낸다면, 그것은 내가 바로 첫 번째 것에서 화를 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그것들의 세 번을 참았으며, 네 번째가 오자마자 나의 진실한 색깔이 나타났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것이 일어날 수 있다. 크리슈나가 그 반대이다. 그는 우리와는 다르다. 그는 이러한 일반성에 예외였다는 모든 가능성이 있다.</div> <div> 크리슈나의 관용은 999회의 욕설만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999회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이러한 거대한 수의 욕설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이 한 번을 더 못 참겠는가? 그것은 믿기가 정말로 어렵다. 크리슈나 앞에 놓인 진정한 문제는 자신의 관용이 바닥났다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있는 그 사람이 그의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크리슈나가 자신의 한계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그는 한계를 정말로 초월했다. 더 참는 것은 크리슈나의 인내를 소모시키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 <u>악에게 이익을 주게 될 것이다</u>. 더 참는다는 것은 불의를 더 강화시킬 것이다. 999회의 욕설로 충분하다는 것은 명백하다.</div> <div> 어떤 제자가 예수에게 물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를 한 번 때린다면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div> <div> 예수가 그에게 말한다. "참아라." </div> <div> 그러자 제자는 묻는다. "만약 그가 나를 일곱 번 때린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div> <div> 이것에 대해 예수는 말한다. "너는 일곱 번을 참아야 할 뿐만 아니라 일흔 일곱 번도 참아야 한다."</div> <div> 그 제자는 만약 그가 일흔 여덟 번을 맞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다시는 묻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가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 제자가 이 질문을 했다면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일흔 일곱 번을 맞은 후에는 그것을 고요히 받아들이지 말라. 그것으로 충분하다. 왜냐하면 너는 너의 참음도 돌보아야 하지만 <u>너는 또한 불의가 약해지지 않고 있음도 알아야만 한다</u>."</div> <div><br></div> <div><br></div> <div><br></div> <div>----------------</div> <div><br></div> <div>오쇼 라즈니쉬 명상록입니다. 시사게에 '그래도 폭력은 정당화될수 없다'라는 댓글에 이 글이 생각나서 올려봅니다.</div> <div>밑줄 친 부분 때문에 시사게에 올리고 싶었지만 이 글의 핵심은 아니기 때문에 철학게에 올립니다.</div> <div><br></div> <div><br></div>
출처 |
도서 : 지금 여기의 신 크리슈나
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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