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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panic_97480
    작성자 : 다른이의꿈
    추천 : 19
    조회수 : 2235
    IP : 108.162.***.161
    댓글 : 4개
    등록시간 : 2017/12/27 08:30:01
    http://todayhumor.com/?panic_97480 모바일
    [단편] 샤워 중 사라지는 시간 (2/3)
    옵션
    • 창작글
    많이 늦긴 했지만 예전에 올린 첫번째 이야기입니다.
    샤워 중 사라지는 시간 (1/3)
    그럼 두번째 이야기 시작합니다.


    ==
    그날 화장실에서 일이 있고 보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현정과 나 사이에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다행히 우리는 만남을 이어가고 있었다.

    현정은 그날 일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았지만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은 듯 했다.

    현정은 종종 나의 원룸에서 하룻밤 묵고 다음날 나와 함께 출근하곤 했는데,

    내가 샤워를 하러 화장실에 들어갈 때면 항상 머리는 적시지 말라는 부탁을 했다.


    ==
    하루는 현정과 사랑을 나누고 침대에 나란히 누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현정은 나를 보고 돌아 눕더니 팔을 뻗어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자기 내일 머리 안감고 출근하면 머리에서 냄새나지 않을까? 같이 일하는 직원들이 싫어할 텐데...”

    “머리가 짧아서 하루 안감았다고 냄새나지는 않을꺼야.”

    “그런데... 요즘에도 계속 그래? 머리 감을 때 기억이 사라지는 거?”

    “응... 계속 그렇네. 그런데 누나, 너무 신경쓰지마.”

    현정은 한참을 말없이 나의 머리를 쓰다듬다 말했다.

    “한번 메세지를 남겨보는게 어떨까?”

    “메세지? 누구한테?”

    “자기 머리 감겨주는 사람.”

    “아—그런데 무슨 메세지?”

    “글쎄… 자기는 걱정되지 않아? 왜 그런일이 생기는지?”

    나는 웃으며 말했다.

    “누나가 이렇게 걱정해 주니까 좋다. 하하.”

    현정은 눈을 흘기며 말했다.

    “말은 안 했어도 더 나빠지지 않을까 신경쓰여. 자기 병원 안가봤지?”


    ==
    다중인격 또는 해리성 정체감 장애.

    한 사람의 안에 둘 이상의 자아가 존재하는 일종의 정신질환이다.

    극도의 스트레스나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발생한다고 알려져 있고,

    어린 시절 받은 학대가 원인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다른 자아가 의식을 지배하는 동안 자신의 행동을 보고 기억하는 환자도 있다.

    하지만 다른 자아가 발현한 시간 동안 기억의 공백을 보이는 환자도 있다고 한다.

    나는 후자의 경우다.


    ==
    “누나. 걱정 하지마. 나도 신경써서 보고 있는데 늘 그대로야. 상태가 안좋아지면 병원도 가볼꺼고.”

    현정은 똑바로 눕더니 한참을 말없이 천장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자기 상처 받을까봐 조심스러운데... 뭐 하나 궁금하긴 해.”

    “뭔데? 난 괜찮아.”

    “그 암으로 죽었다던... 지연이라는 여자...”

    현정이 말끝을 흐렸다.

    현정의 표정이 심각해지는 것을 느낀 나는 상체를 일으켜 현정의 얼굴 위로 나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하하. 누나, 지금 질투하는거 맞지?”

    현정은 나의 얼굴을 밀어냈고, 시선은 여전히 천장을 향한 채 말했다.

    “질투하는게 아니라. 그 여자 죽고서... 자기 상처 받아서... 그런 건 아닐까 해서...”

    “누나.”

    “누나.”

    “이봐요, 김현정 대리님.”

    현정은 나의 시선을 피하다가 그제서야 살짝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누나. 나 좀 억울한데, 나 그 지연이라는 여자 몰라. 나 결혼한 적도 당연히 없고.”

    현정의 표정에 살짝 안도감이 느껴졌다.

    “그 사람이 암으로 죽었다는 건?”

    “나도 모르지.”

    “그럼... 지연이라는 이름은 전혀 몰라?”

    “전혀 모르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안다고 하기도 좀 그렇네.”

    “그게 무슨 말이야?”

    “흠—누나가 그날 많이 놀라서 이야기 안 했는데, 내가 그날 밤에 좀 이상한 꿈을 꿨어.”

    “자기 울던 꿈?”

    “누나 기억하는구나.”


    ==
    나는 그날 밤 꿈 이야기를 현정에게 해줬다.

    내가 지연이라는 여자였고,

    암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고,

    한 남자가 나의 임종을 지켜보고 있었던 꿈 이야기를 해주었다.


    ==
    현정은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는 나에게 물었다.

    “그럼… 그 꿈 속의 남자가 자기 머리 감겨주는 거라고 생각해?”

    “난 솔직히 꿈은 꿈이라고 생각해. 머리 감겨주는 사람도 나라고 생각하고. 단지 기억을 못할 뿐이지.”

    “그런데 우연이라고 하기엔 좀 그렇잖아. 지연이라는 이름...”

    “나도 처음엔 누나가 그 이름을 말해서 많이 놀랐어. 그런데 그날 꿈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서 내가 그런 이야기를 한게 아닐까?”

    “자기는 꿈에서 죽는 여자였다며, 임종을 지키던 남자가 아니라.”

    “아마도 그 꿈에서 나는 죽는 여자였고, 내 안에 다른 자아는 그 남자가 아니었을까? 마치 1인 2역 같은거? 하하.”

    “장난치지마. 난 심각한데... 이렇게 우리끼리 따져보는 것보다 병원에서 상담 한번 받는게 어떨까?”

    “솔직히... 누나가 처음 다중인격 말해줬을때, 나도 많이 알아봤어. 병원이랑, 의사랑, 어떻게 치료하는 지도...”

    “어떻게 치료하는데?”

    “다중인격이 생기는 게 마음의 상처가 원인인 경우가 많데. 그래서 그 상처를 치유하는 방식으로 상담 치료를 하나봐.”

    현정은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나는 치료나 상담을 받을 만한 정신적 상처가 없는거야. 집에서 사랑받고 자랐고. 학창시절도 무난했고. 군생활도 몸이 힘들었지 마음은 편한 편이었고. 그래서 의사 만나봐야 특별히 할 이야기가 없겠구나 싶더라구.”

    “그럼 상처는 아니라도 나쁜 기억이나 뭐 집히는 이유도 없어? 뭐, 사소한 거라도.”

    “글쎄… 잘 모르겠네.”

    걱정어린 현정의 얼굴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현정의 몸 위로 덮쳐 안으며 그녀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누나와 한번 더 천국을 경험하면 생각날 것 같기도 한데...”

    현정도 싫지 않은 듯 나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
    병원에 가더라도 의사에게 해 줄 이야기가 있어야 상담 치료를 받을 것이 아닌가...

    정보 수집을 위해 나는 머리 감겨주는 자아와 대화를 시도하기로 했다.

    작은 화이트 보드와 펜을 준비했다.

    ‘묻고 싶은게 많아요. 당신은 누구죠? 왜 내 머리를 감겨주는 거죠?’

    화이트보드를 샤워기 아래에 걸어놓고 머리를 감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군데군데 물이 번진 메세지가 적혀있었다.

    ‘우리는 여러 관계로 얽혀있지만 저는 이전 생 당신의 남편으로서 당신에게 왔습니다. 당신에겐 별 의미가 없겠지만 저는 전생의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당신을 찾아오고 있어요. 하지만 오래가지 않을 듯 하네요. 저 때문에 많이 힘드나요? 미안합니다.’

    첫째로 무섭다거나 공격적인 내용이 아니어서 안도했다.

    둘째로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말이 무척 반가웠다.

    그리고 작은 글씨로 쓰여진 메세지의 필체는 나의 것이 아니었다.


    ==
    다음날 나는 다시 메세지를 남겼다.

    ‘힘들지는 않아요. 몇가지만 더 물어볼께요. 여러 관계로 얽혀있다는 말—우리 서로 알고 있나요? 그리고 오래가지 않는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요?’

    답변이 돌아왔다.

    ‘저는 지금 제 육신을 떠난 상태여서 온전히 기억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현생의 당신과 가까운 사이라고 느껴지네요. 내일을 마지막으로 저는 이제 제 육신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
    다음날 샤워를 하면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욕조 안이 아닌 세면대 거울 앞에 서 있었다.

    거울 속 나의 얼굴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고, 물기가 닦인 머리는 반듯이 빗질이 되어있었다.

    그 이후로는 샤워를 하며 기억을 잃는 일은 더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
    완결인 세번째 이야기는 늦지 않게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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