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size="3"><br>내가 고3 때의 일이었다.<br>그 때 나는 야자를 안하고 대신 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학원이 끝나고 집에 가면 언제나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br>막차에서 내린 버스정류장 근처는 간혹 있는 술냄새를 풍기며 비틀거리는 아저씨들을 제외하면 거의 사람이 없었다.<br>차도에서 드문드문 자동차가 지나가는걸 제외하면 사람 한명 없는 길을, 나는 눈을 감고 걷곤 했다.<br><br><br>눈을 감고 걸어본 적 있는가?<br>별 것 아닌것 같지만 막상 해보면 상상 이상으로 어렵다.<br>내 앞으로 100m정도는 아무것도 없다는것을 알면서도, 눈을 감고 걷다보면 10초도 안되어 무언가에 부딪힐 것 같은 불안감이 느껴진다.<br>보통은 그 쯤에서 눈을 뜨겠지만, 그걸 참고 10초, 20초, 30초, 그리고 1분쯤 걷다보면 시각을 제외한 다른 감각들이 예민해 지다가 어느덧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진다.<br>마치 이 세상에서 내가 유리되는 듯한, 그런 느낌이.<br>나는 그 묘한 감각을 은근히 즐겼었다.<br><br><br>전방을 확인한다. 건널목 편의점까지 약 300m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br>발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눈을 감는다.<br><br>10초.<br>심박수가 오르며 불안감이 샘솟는다. 꾹 참고 계속해서 눈감고 걷는다.<br><br>30초.<br>적응이 됐는지 차츰 몸이 진정된다.<br><br>60초.<br>바람소리와 풀벌레소리, 그리고 어제 내린 비의 냄새가 코에서 느껴진다.<br><br>100초.<br>예민했던 감각들이 차츰 둔해지며 바닷속에 가라앉은 듯한 부유감이 느껴진다.<br>그리고, 갑작스러운 고독감과 해방감이 나를 엄습했다.<br><br>그리고 눈을 뜬다.<br>흐릿한 시야가 점점 맑아지면서 비현실적인 감각이 사라지고 현실로 돌아왔다. 눈 앞에 횡단보도가 보였다.<br><br>'조금만 더 늦게 떴으면 무단횡단 할 뻔 했네'<br><br>내심 피식 웃으며 오른쪽으로 돌았다. 그곳에는 편의점이 있다.<br>출출한 김에 야식이나 사먹을 생각으로 문을 열었다.<br>하지만, 문은 꽉 잠긴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br><br>"알바가 화장실 갔나?"<br><br>편의점의 불은 켜져있었고(애초에 24시간 영업하는 곳이라 불 꺼진걸 본 적이 없다), 영업하는듯 했지만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br>아쉬움에 혀를 차고 그냥 집으로 가기로 했다. 10분만 걸으면 집인데 그냥 가서 냉장고나 뒤지자<br><br><br><br>위화감을 느낀건 5분쯤 걸은 뒤였다.<br>버스정류장에서 편의점까지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편의점 인근 주택가에는 동네 장사를 하는 가게가 제법 있었다.<br>그곳에서 밤늦게 늦은 식사나 술한잔 하는 사람은 언제나 몇명씩 있었다.<br><br>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사람이 없다.<br>정확히는, 사람만 없다.<br><br>24시간 영업하는 국밥집을 바라보았다. 유리 너머에 보이는 풍경은 사람 없는 가게 안. 하지만 전등은 켜져있다. 심지어 테이블 위에는 김이 오르고 있는 국밥그릇과 소주잔이 올려져 있었다.<br><br>동네의 모든 가게가 그랬다. 영업중인양 불은 켜져있는데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br><br>무언가가 일어났다.<br>내가 버스에서 내려서 여기까지 온 그 짧은 사이에 전 인류가 멸망했나?<br>그런 어처구니 없는 상상까지 진지하게 할 정도로 혼란에 빠졌다.<br><br>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br>나는 어떻게 해야하나<br>공포와 혼란이 정신을 휘젓고,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br>마치 세계에 나 혼자만이 남은 그 고독감은, 묘하게도 눈을 감고 걸을 때의 느낌과도 닮아있었다.<br><br>그렇게 멍하니 국밥집 안을 들여다 보고 있을 때,<br>이변이 일어났다.<br><br><br>"와장창"<br><br>마치 유리병이 깨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br><br>"끄아아악!!"<br><br>가게 안에서 고통스러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br><br>정신을 차리고 가게 안을 제대로 바라보자, 그 광경은 아까와 달라져있었다.<br>방금 전까지만 해도 가지런했던 테이블이 어질러져있고, 바닥에는 소주병이 마치 파열한듯이 깨진채 널려있었다. 그리고, 그 근처에는.... 새빨간, 피가<br><br><br><br>그것을 인식한 순간, 나는 달리기 시작했다.<br>빠르게, 최대한 빠르게, 집에 가겠다는 일념만으로 전력질주를 했다.<br>달리는 도중에 새벽까지 영업하는 갈비집이 스쳐지나갔지만 역시나 사람은 없었다. 그 광경이 내 발을 더 빠르게 채찍질했다.<br><br>그리고 우리 아파트 동의 3층으로 널뛰듯이 껑충껑충 올라가 집 앞에 서서 잠시 쉼호흡을 하였다. 숨은 차지 않았지만,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br>떨리는 손으로 현관문의 도어락 버튼을 눌렀다.<br><br>"아..."<br><br>눌러도 반응하지 않는다. 마치 건전지가 끊어진 전자기기처럼 아무리 눌러도 반응하지 않았다.<br><br>"엄마!! 엄마!!!!!!"<br><br>현관문을 쾅쾅거리며 외쳤다.<br>그래, 재수없게 건전지가 끊어졌을 뿐이다. 문을 두드리면 곧 엄마가 "한밤중에 왜 소리질러"라고 핀잔주며 나올것이다.<br><br>"엄마!! 아빠!!! 나 왔어!!!<br>아아아아아아악!!!!"<br><br>하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br>이렇게 소리지르면 성격나쁜 옆집 아줌마가 짜증내며 나올만 한데 옆집의 현관문도 미동이 없다.<br><br>"엄마.. 아빠.. 제발"<br><br>그리고 한참을 부르다 지쳐 내 목소리가 사그라 들려 할 때,<br>내 애원이 통한건지, 삑하는 전자음과 함께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br>그리고, 현관문이 열렸다. 저절로<br>문을 연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br>나는 잠시 고민하고, 열린 문을 통해 집에 들어갔다.<br><br>"쾅"<br><br>마치 내가 들어오길 기다렸다는듯이 문이 닫힌다. 그리고 들려오는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br>집 안을 바라본다.<br><br>거실의 불이 켜 있었다.<br>TV에서는 심야 예능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고, 소파 앞에 아빠의 술상으로 보이는 상이 차려져 있었다.<br>하지만 역시, 엄마도 아빠도 없었다.<br><br>"촤아아악"<br><br>갑자기 물소리가 들렸다.<br>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싱크대의 수도꼭지에서 물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br>분명 방금 전까지는 잠궈져 있었을텐데...<br><br>아아,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건가.<br>나는 그 자리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TV 화면만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었다.<br>몇 시간을 그러고 있었을까. 중간에 전화벨 소리가 들리고, TV가 갑자기 꺼졌지만 나는 그것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br><br><br>잠시 후, 거실의 불이 꺼지고,<br><br><br>나는 진실로 혼자 남았다는 고독감을 느끼며, 이윽고,<br><br><br>조용히, 잠에, 들었다.<br><br><br><br><br><br>"아이고, 이 양반아!! 내가 술좀 그만 쳐 마시랬지!!"<br><br>"아니, 내가 돈벌어오는데 술도 맘대로 못마시냐!!!"<br><br>"그럼 얌전히 먹던가! 왜 술먹고 싸우다가 술병으로 머리를 쳐맞고 자빠졌어!!!!"<br><br>"응급실 전세냈어요? 조용히 좀 합시다!"<br><br>시끄럽다.<br>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을 떴다.<br>그러자 침대 옆에서 눈이 동그래진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br><br>"....?"<br><br>"의사 선생님!! 저희 아들 일어났어요!!"<br><br>아무래도 내가 있는 곳은 병원인 모양이었다.<br><br><br>사정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나는 편의점 근처에서 쓰러져 있었다는 모양이다. 그걸 본 편의점 손님이 119에 신고해서 그대로 응급실로 실려왔다고.<br>아무 이상도 없어보이는데 의식이 돌아오지 않아, 정밀검사를 하기 직전에 내가 깨어났다고 한다.<br>이후에 혹시나해서 정밀검사를 받아봤지만, 역시 이상은 없었다.<br>검사를 끝낸 후, 엄마는 나에게 말했다.<br><br>"어제 밤에 설거지 하던 중에 갑자기 네 목소리가 들린것 같지 뭐니. 그래서 물 끄고 현관문 열어봤는데 아무도 없더라고.<br>잘못들었나 해서 다시 설거지하는데 30분 있다가 네가 실려갔다고 병원에서 전화가 오더라.<br>무슨 예지같은 거였을까?"<br><br><br><br><br>그 이후로 나는 눈을 감고 걷지 않는다. 그것 때문에 일어난 일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만에 하나라도 또다시 그 소름끼치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그리고 이번에는 돌아올 수 없다면, 그런 생각을 하자 무서워졌기 때문이다.<br><br>그리고, 그때부터 영기가 생겼는지, 가끔 영혼같은것이 보이기 시작했다.<br>몇번 무서움을 참고 말을 걸어봤었다. 하지만 영혼들은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듯이 전혀 반응하지 않았었다.<br>그걸 보니 사람이 영혼을 인식하지 못하는것과 마찬가지로, 영혼도 사람을 인식하지 못하는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br><br>어쩌면 그들은 여태껏, 그리고 앞으로 평생을 그 날 밤의 나처럼 고독 속에서 살고있을지도 모른다.<br>그런 생각이 들자 무서움은 사그라들고 애잔함만이 느껴졌다.</fo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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