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br /></div> <div>서른이 다 돼서야 첫 선을 봤다. 애초에 여자를 사귈 재주도 구실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div> <div><br /></div> <div>다. 직업 때문인지 선자리는 끊임없이 들어왔고 아홉번째 만에 첫사랑을 만났다. 그녀는 내 직업을 듣고난</div> <div><br /></div> <div>뒤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div> <div><br /></div> <div>"참 보람된 일을 하시네요"</div> <div><br /></div> <div>무척 선이 고운 얼굴이었다. 눈썹은 날아갈 듯 사뿐했고, 웃을때 드러나는 보조개는 치명적이었다. 어느날</div> <div><br /></div> <div>그녀가 내 손을 이끌고 고속버스에 올랐다.</div> <div><br /></div> <div>"춘천은 왜?"</div> <div><br /></div> <div>"갈 데가 있어"</div> <div><br /></div> <div>그녀는 제일 뒷자석으로 간 뒤 창문을 활짝 열었다. 휘날리는 머리카락이 볼을 간지럽힌다. 하지만 이내 표</div> <div><br /></div> <div>정이 굳어졌다. 그것의 머리카락도 조금씩 나부꼈기 때문이다. 숯많은 머리카락이 굵기도 무척 굵다. 수만</div> <div><br /></div> <div>마리의 뱀들이 요동치는 것 같다. 우리는 춘천에 도착했고, 곧 택시를 탔다.</div> <div><br /></div> <div>"어디 가는데?"</div> <div><br /></div> <div>"점집"</div> <div><br /></div> <div>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난 불안했다. 나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해댈게 분명했다. 여태껏 찾아간</div> <div><br /></div> <div>점쟁이란 점쟁이는 모조리 한결같은 반응이었다. 최악의 사주팔자. 뭘해도 망하며 뭘해도 불행해진다는 것</div> <div><br /></div> <div>이었다. 택시가 한적한 시골길에 멈췄다. 그녀가 아담한 양옥집의 초인종을 누른다. 두세번 눌러도 대답이</div> <div><br /></div> <div>없다.</div> <div><br /></div> <div>"일반 가정집 아냐? 간판도 없는데"</div> <div><br /></div> <div>"은퇴하셨어, 왕년엔 전국 최고셨는데"</div> <div><br /></div> <div>그녀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다행이다. 전국최고라면 무조건 피해야 한다. 우리는 한적한 시골길을 걸</div> <div><br /></div> <div>었다. 시원한 가을 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길 따라 죄다 논이요 밭이었다. 황금색 벼들이 바람에 따라 일사</div> <div><br /></div> <div>분란하게 방향을 틀어댄다. 시골길엔 정말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우리 셋 뿐이다.</div> <div><br /></div> <div>"앗, 저깄다"</div> <div><br /></div> <div>그녀가 환호성을 지르며 가리켰다. 이백미터도 넘는 거리의 들판 한가운데 점 하나가 움직이고 있었다.</div> <div><br /></div> <div>"어서 갔다와"</div> <div><br /></div> <div>그녀가 생글생글 웃는다.</div> <div><br /></div> <div>"본 적도 없는데 어떻게 알아봐?"</div> <div><br /></div> <div>그녀가 눈을 희떴다. 미친사람 처럼 흰자만 보이게 눈을 치켜떴다.</div> <div><br /></div> <div>"앞이 안 보이셔"</div> <div><br /></div> <div>도리없이 들판을 가로 질렀다. 가까이 가보니 인상 좋은 할아버지가 도리깨를 휘두르고 계셨다.</div> <div><br /></div> <div>"할아버지"</div> <div><br /></div> <div>사람 소리에 할아버지가 이쪽을 바라본다. 혼탁한 동공. 눈 전체에 지독한 안개가 가득하다.</div> <div><br /></div> <div>"점 보러 왔어?"</div> <div><br /></div> <div>"네"</div> <div><br /></div> <div>할아버지는 잠자코 내 편을 바라본다. 보이긴 보이는 걸까. 의사인 내 소견으로 할아버지는 완벽한 장님이</div> <div><br /></div> <div>었다.</div> <div><br /></div> <div>"무조건 잡아, 놓치면 자넨 죽어"</div> <div><br /></div> <div>"네?"</div> <div><br /></div> <div>의외의 대답에 가슴이 벌떡거린다.</div> <div><br /></div> <div>"저 여자가 있어야 자네 목숨을 부지 할 수 있어, 무슨 말인진 자네가 더 잘 알거 아닌가"</div> <div><br /></div> <div>"아.."</div> <div><br /></div> <div>누가 뒷통수를 힘차게 후려친 기분이었다. 듣고 보니 그랬다. 그녀를 만난 후 부터 모든 일이 잘 풀렸다.</div> <div><br /></div> <div>웃는 일도 많아지고 스스로가 행복하다고 느껴졌던 것이다. 늘 따라다니는 그것마저 신경 안쓰일 정도로...</div> <div><br /></div> <div>"감사합니다"</div> <div><br /></div> <div>꾸벅 인사를 하고 신나게 뛰어갔다. 시원한 바람이 폐 깊숙한 곳까지 식혀주었다. 단숨에 들판을 가로질러</div> <div><br /></div> <div>그녀에게 갔다. 내 표정에 그녀도 신이 난 듯 묻는다.</div> <div><br /></div> <div>"뭐라고 하셔?"</div> <div><br /></div> <div>"너 놓치면 나 죽는대"</div> <div><br /></div> <div>그녀가 함박 웃음을 짓는다. 하지만 그 웃음은 반나절도 가지 못했다. 이건 사기다. 이럴수는 없다.</div> <div><br /></div> <div>할아버지가 길가로 나온 뒤 정식으로 집안으로 들어갔다. 뭔가 이상하다. 할아버지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div> <div><br /></div> <div>덩달아 우리 표정도 싹 굳었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그녀가 핸드백을 챙긴다.</div> <div><br /></div> <div>"벌써 가려고?"</div> <div><br /></div> <div>"응"</div> <div><br /></div> <div>싸늘하다. 냉기가 풀풀 넘친다. 다급하게 그녀를 따라갔다. 그녀는 서울까지 오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div> <div><br /></div> <div>다.</div> <div><br /></div> <div>"왜 거짓말 했어?"</div> <div><br /></div> <div>차에서 내리자 그녀가 차갑게 묻는다. 어이가 없어 잠시 하늘을 올려보았다. 밤하늘 중앙에 할아버지의 간</div> <div><br /></div> <div>사한 얼굴이 둥실 떠올랐다. 사기꾼이 분명했다. 차라리 다른 이유라면 억울하지도 않았다.</div> <div><br /></div> <div>"빌어먹을 사기꾼 영감탱이가"</div> <div><br /></div> <div>"함부로 말하지마"</div> <div><br /></div> <div>"아 미치겠네 진짜"</div> <div><br /></div> <div>"끝내"</div> <div><br /></div> <div>그녀의 말한마디에 진짜로 끝났다. 이건 사정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만의 어떤 믿음이 작용하는</div> <div><br /></div> <div>듯 했다. 그녀와 헤어지고 다른 여자와 이듬해 결혼식을 올렸다. 그녀는 점 따위는 믿지 않았고 속설같은</div> <div><br /></div> <div>것도 전혀 신뢰하지 않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결혼은 했지만 부인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자식도 태어</div> <div><br /></div> <div>났지만 전혀 이뻐 보이지 않았다. 과거 아버지의 시선처럼 약간의 동정심, 단지 그것 뿐이었다.</div> <div><br /></div> <div>주기적으로 낙태시술을 했지만, 며칠뿐이었다. 며칠이 지나면 다시 그것이 무서워졌다. 나이가 들면서</div> <div><br /></div> <div>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다.</div> <div><br /></div> <div><br /></div> <div><br /></div> <div><br /></div> <div><br /></div> <div><br /></div> <div><br /></div> <div>요즘따라 스트레스가 심하다. 지독한 불면증에 자면 언제나 악몽이다. 물론 깨어난다 해도 똑같지만...</div> <div><br /></div> <div>그것이 부쩍 신경 쓰인다. 일이 없을땐 항상 최후를 생각한다. 그것이 얼굴을 보여주는 날 나는 죽을 것이</div> <div><br /></div> <div>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우리 핏줄의 운명이다. 불현듯 덮치는 극심한 공포에 식은땀이 흐른다.</div> <div><br /></div> <div>'도대체 어떻게 생겼을까. 얼마나 무섭게 생겨야 바로 죽을 수가 있는걸까'</div> <div><br /></div> <div>주말엔 온통 그것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대항했던 것처럼 나역시 가만히 앉아 있을 순 없었다.</div> <div><br /></div> <div>아버지는 무당에 의존했지만, 난 그것을 과감히 배척했다. 오히려 죽는 시기를 앞당긴다고 여겼다. 실제로</div> <div><br /></div> <div>굿 때문에 아버지가 죽었다고 믿었다. 미신을 배척하고 나자 할 수 있는 것이 대부분 사라졌다. 하긴 귀신</div> <div><br /></div> <div>을 그럼 도대체 무엇으로 대항한단 말인가.</div> <div><br /></div> <div>우선 최후의 순간에 대비했다. 그것의 얼굴에도 심장마비를 안 일으키도록 단련했다. 처음엔 시체 사진을</div> <div><br /></div> <div>모았다. 평범한 시체부터 시작해서 점점 범위를 넓혀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추락사한 시체, 불에 탄 시</div> <div><br /></div> <div>체, 부패하다 만 시체 등등 각종 시체들을 섭렵했다. 무서웠지만 기절할 정도는 아니었다.</div> <div><br /></div> <div>시체 중에선 범죄로 인한 시체가 가장 끔찍했다. 그 중 남녀간의 애증으로 인한 살인이 제일 처참했다.</div> <div><br /></div> <div>지인의 소개로 강력계 형사 한명을 만났다. 형사는 두꺼운 사진첩을 보여주었는데, 각종 범죄의 희생자</div> <div><br /></div> <div>들 모음집이었다. 형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펼치고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얼핏 봐도 꽤나 높은 수위</div> <div><br /></div> <div>의 사진들이 제법 있었다. 면역이 되서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형사가 사진을 향해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는</div> <div><br /></div> <div>다. 하긴 나도 나만의 분야가 있지 않은가. 눈앞의 형사가 조각난 태아사체를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div> <div><br /></div> <div>금해졌다. 어쨌든 노력 덕분인지 종국에 가서는 무엇을 보더라도 놀라지 않았다. 내가 조금이라도 반응을</div> <div><br /></div> <div>보일만한 것이라면 그야말로 끔찍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div> <div><br /></div> <div>외유내강이라..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기로 마음먹었다. 약 200여가지를 검사하는 종합검사를 우선 받았다.</div> <div><br /></div> <div>비용만도 천만원가까이 소요되는 그야말로 몸 전체를 샅샅이 훑는 작업이었다. 두달 동안의 검사가 종료되</div> <div><br /></div> <div>고 담당의사에게 결과를 통보 받는 날이었다.</div> <div><br /></div> <div>이 계통에 있는 사람들은 대충 서로를 안다. 우리도 역시 술자리서 두어번 마주친 전력이 있다.</div> <div><br /></div> <div>"저기..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div> <div><br /></div> <div>그가 말끝을 흐린다. 젠장, 이거 내가 많이 하던 대사다</div> <div><br /></div> <div>"짧고 간결하게, 그리고 하나도 남김없이 말하세요"</div> <div><br /></div> <div>그가 더욱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div> <div><br /></div> <div>"선생님께서는 생식능력을 상실하셨습니다"</div> <div><br /></div> <div>이건 또 무슨 소린가. 의외의 대답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내 표정에 그가 더욱 황망한 표정을 짓는다.</div> <div><br /></div> <div>"선생님은 더이상 아기를 가질 수 없..."</div> <div><br /></div> <div>"괜찮아요, 다른 이상은 없나요?"</div> <div><br /></div> <div>정말 괜찮았다. 혼전이라면 문제가 됐겠지만, 지금은 결혼도 하고 아들도 하나 있지 않은가.</div> <div><br /></div> <div>"저, 그게.."</div> <div><br /></div> <div>아뿔싸, 드디어 감이 왔다.</div> <div><br /></div> <div>"고환암 말기입니다"</div> <div><br /></div> <div>"씨발"</div> <div><br /></div> <div>"네?"</div> <div><br /></div> <div>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물어 볼 것도 없다. 고환암은 초기 아니면 다 죽는병이다. 어쩐지 얼마전부터 고환</div> <div><br /></div> <div>이 간질간질 하더라니만. 하지만 백프로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2퍼센트의 확률로 오진이란 것이 발생한다.</div> <div><br /></div> <div>"고환암입니다"</div> <div><br /></div> <div>"안타까우시겠지만 우선 항암치료부터 시작합시다, 두달 정도는 충분히 늘릴 수 있어요"</div> <div><br /></div> <div>며칠 지나서 다른 병원의 결과까지 받았다.</div> <div><br /></div> <div>두달이 언제부터 충분한 시간이었던가. 단호하게 말하던 그놈의 머릿가죽을 벗겨버리고 싶었다.</div> <div><br /></div> <div>난 이제 죽는다. 죽는다. 세달도 못가 죽을 것이다. 기어코 확실하게 죽을 것이다. 문득 암으로 죽을 지</div> <div><br /></div> <div>심장마비로 죽을지 헷갈렸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무엇으로 뒈지든 그것 알아 무엇하리.</div> <div><br /></div> <div>차라리 암보다는 화끈하게 심장마비가 나을 듯 싶었다. 하지만 그건 대단한 착각이란걸 그날 밤에 깨달았</div> <div><br /></div> <div>다. 멍하게 거리를 걸었다. 길이 보이는 곳은 어디로든 걸었다. 뒤에선 분명이 그것이 따라오고 있을테지만</div> <div><br /></div> <div>신경쓰기 싫었다. 그냥 다 귀찮았다.</div> <div><br /></div> <div>"빵.빵"</div> <div><br /></div> <div>벼락같은 경적소리에 정신이 번쩍든다.</div> <div><br /></div> <div>"개새끼가 죽을라고 환장했나?"</div> <div><br /></div> <div>덤프트럭 한대가 멈춰 있었고 자신은 차도 한복판에 서있었다. 다시 인도로 돌아가 걷기 시작한다.</div> <div><br /></div> <div>초등학교가 보인다. 아무 생각없이 들어간다. 초등학교 운동장 치고는 꽤 넓다. 밤중이지만 곳곳에 설치된</div> <div><br /></div> <div>가로등으로 제법 밝다. 누가 있는 듯 하여 무심코 뒤를 보았다. 잘못 들었나 보다. 아무도 없다.</div> <div><br /></div> <div>'아무도 없다'</div> <div><br /></div> <div>다시 이리저리 찾아보아도 역시 아무도 없다. 사라졌다. 그것이 사라진 것이다.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다 중</div> <div><br /></div> <div>간에서 멈춘다.</div> <div><br /></div> <div>'그럼 뭐해, 곧 뒈질거'</div> <div><br /></div> <div>저만치서 점 하나가 움직인다. 운동장 끝과 끝 사이. 점이 점점 커진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니 어렴풋이</div> <div><br /></div> <div>사람의 형체다. 점이 점점 커진다. 사람인 동시에 여자다. 점이 더욱더 커진다. 사람인 동시에 여자인</div> <div><br /></div> <div>동시에..</div> <div><br /></div> <div>"씨발년이다"</div> <div><br /></div> <div>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어찌된 일인지 뒤뚱거리지도 않았다. 벌써 반이나 거리를 좁혔다. 엄청난</div> <div><br /></div> <div>속도때문인지 그것의 머리카락이 사방팔방으로 나부낀다. 머리카락 사이로 희끄무레한 것이 보인다.</div> <div><br /></div> <div>"쿵.쾅.쿵.쾅"</div> <div><br /></div> <div>심장이 중간단계없이 최대한의 출력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잠시 잊고 살았던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div> <div><br /></div> <div>어마어마한 원한. 내몸은 어느새 그날의 아버지를 다시 보고 있다. 그것이 아버지위에 올라 타있다.</div> <div><br /></div> <div>슬며시 머리카락을 젖힌다. 숨도 못쉬고 그걸 지켜만 본다. 내몸은 다자란 성인이지만 꼼짝도 할 수 없다.</div> <div><br /></div> <div>마치 어린시절의 나처럼. 별안간 머리카락이 확하고 젖혀진다.</div> <div><br /></div> <div>"으아아악"</div> <div><br /></div> <div>순수한 공포심에서 우러나오는 비명이었다. 그것이 달리는 속도를 높였다. 이제 거의 얼굴 윤곽이 보일 듯</div> <div><br /></div> <div>하다. 보면 죽는다. 저 얼굴이 망막에 아로새기는 순간 무조건 죽는다.</div> <div><br /></div> <div>"우아악"</div> <div><br /></div> <div>미친듯이 팔목을 물어 뜯었다. 어찌나 세게 물었던지 살점과 혈관이 같이 터져 나왔다.</div> <div><br /></div> <div>"싸아"</div> <div><br /></div> <div>팔목에서 피가 물총처럼 쏘아진다. 그것의 달려오는 속도가 약간 느려졌다고 느꼈다.</div> <div><br /></div> <div>"크아악"</div> <div><br /></div> <div>뜯어진 부위사이로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연한 살덩어리 사이에서 길다란 힘줄이 느껴진다. 힘줄을 잡고</div> <div><br /></div> <div>서 있는 힘껏 당긴다.</div> <div><br /></div> <div>"찌익"</div> <div><br /></div> <div>힘줄이 대번에 팔길이 만큼 뽑혀나왔다. 그것의 속도는 이제 눈에 띌만큼 느려졌다.</div> <div><br /></div> <div>"아흑"</div> <div><br /></div> <div>뽑고 뽑아도 힘줄은 끝이 없었다. 키만큼의 길이에 해당하는 힘줄을 뽑아내자 드디어 그것이 달리는 걸 멈</div> <div><br /></div> <div>추었다. 머리카락은 다시 얼굴을 덮었고, 그것은 조용히 내 옆으로 다가와 섰다.</div> <div><br /></div> <div>"개씨발년아"</div> <div><br /></div> <div>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벌떡 일어났다. 거친 호흡에 상체전체가 위아래로 흔들거린다. 팔목을 보니 정상</div> <div><br /></div> <div>이다. 꿈을 꾼것이다. 너무 억울했다. 분해서 꺼이꺼이 울었다. 울다보니 내자신이 불쌍해서 더욱 서럽게</div> <div><br /></div> <div>울었다. 그러고보면 이때까지 정말 편하게 지내 본 적이 없었다. 스스로에 대한 연민 때문에 울지 않고서는</div> <div><br /></div> <div>배길수가 없었다. 침대맡에 조용히 서있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주섬주섬 옷을 챙겨입고 거실로 나왔다. 마</div> <div><br /></div> <div>누라는 집에 거의 붙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한번도 거기에 대해서 언급한 적은 없다. 어차피 관심도 없었</div> <div><br /></div> <div>다. 역시 오늘도 나가고 없다. 아들이 자는 방의 문을 열었다. 자기보다 커다란 베개를 다리 사이에 끼운채</div> <div><br /></div> <div>정신없이 자고 있다. 이 끔찍한 인생을 물려주기 싫다. 버러지만도 못한 인생. 차라리 죽느니만 못하다.</div> <div><br /></div> <div>아들을 흔들어 깨운다.</div> <div><br /></div> <div>"으응.."</div> <div><br /></div> <div>아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뜬다.</div> <div><br /></div> <div>"저기 문앞에 누가 서있는 줄 알아?"</div> <div><br /></div> <div>녀석은 질문을 이해하느라 나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아마 잠결이라서 더 헷갈렸을 것이다.</div> <div><br /></div> <div>"그냥 아줌마"</div> <div><br /></div> <div>망설임없이 일어났다. 부엌으로 가서 식칼을 손에 쥐었다. 다시 아들방으로 갔다. 그런데 아들이 없다.</div> <div><br /></div> <div>화장실에서 소리가 들린다. 쫄쫄쫄 오줌누는 소리. 오줌을 다 누기를 기다렸다. 아들이 나오자 식칼로 심장</div> <div><br /></div> <div>을 힘껏 쑤셨다.</div> <div><br /></div> <div>"아.."</div> <div><br /></div> <div>아들은 비명도 못 지르고 쓰러졌다. 눈을 감고 한번더 찔렀다. 최대한 빨리 죽이는게 예의리라.</div> <div><br /></div> <div>아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식칼을 들고 그년을 보았다. 그년이 온몸을 비틀거린다.</div> <div><br /></div> <div>"어때? 이제 대가 끊겼으니 어쩌나? 이제 네년의 복수상대도 사라졌으니 이제 어쩔거냐고"</div> <div><br /></div> <div>그년이 크게 휘청거린다. 저런 모습은 처음이다. 통쾌했다.</div> <div><br /></div> <div>"자 이제 얼굴을 보여줘"</div> <div><br /></div> <div>그년이 여전히 경련을 일으키고 있다.</div> <div><br /></div> <div>"씨발년아, 면상 한 번 보자고"</div> <div><br /></div> <div>성큼성큼 걸어가 그년의 어깨를 확 잡아챈다. 아마 집안을 통틀어 이런 행동을 보인건 내가 처음일 것이다.</div> <div><br /></div> <div>아들도 죽였는데 그년이라고 대술까. 그년이 아무렇게나 팔을 휘두르자 순식간에 벽에 처박혔다.</div> <div><br /></div> <div>"씨..씨발년이 힘은 장사네"</div> <div><br /></div> <div>그년이 점점 나에게 다가온다. 내 표정이 환하게 밝아진다.</div> <div><br /></div> <div>"컴온, 씨발년 베이비"</div> <div><br /></div> <div>그녀가 다가옴에 따라 미칠듯한 원한이 쏟아진다.</div> <div><br /></div> <div>"그래 이거야, 이 느낌이라구"</div> <div><br /></div> <div>공포와 흥분으로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흔들렸다. 해묵은 집안의 한. 켜켜이 쌓인 그것이 남김없이 쏟아지는</div> <div><br /></div> <div>듯 하다. 그년이 내 발을 지나서 머리맡으로 왔다.</div> <div><br /></div> <div>"어서 까봐"</div> <div><br /></div> <div>그년이 물끄러미 내려다 본다. 심호흡을 했다.</div> <div><br /></div> <div>"스윽"</div> <div><br /></div> <div>나도 모르게 눈을 감아 버렸다. 속으로 욕을 하면서 다시 눈을 떴다.</div> <div><br /></div> <div>"어라"</div> <div><br /></div> <div>그년이 없었다. 저만치서 그년이 걸어가고 있다.</div> <div><br /></div> <div>"이봐 어디가?"</div> <div><br /></div> <div>그년이 현관쪽으로 다가간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었단 생각이 든다. 얼른 뛰쳐가서 그년의 어깨를 돌렸다.</div> <div><br /></div> <div>"휙"</div> <div><br /></div> <div>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머리카락을 치워버렸다.</div> <div><br /></div> <div>"....."</div> <div><br /></div> <div>뭔가 잘못됐다. 이럴수는 없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안쪽으로 부적 몇 개가 붙어 있을 뿐이었다.</div> <div><br /></div> <div>그년이 다시 현관으로 향한다.</div> <div><br /></div> <div>"안돼"</div> <div><br /></div> <div>사라졌다. 그년이 사라졌다. 뒤를 돌아보면 짠 하고 나타날 줄 알았다.</div> <div><br /></div> <div>"홱"</div> <div><br /></div> <div>"홱"</div> <div><br /></div> <div>몇번이나 돌아봐도 마찬가지다. 그년이 완벽하게 사라져버렸다. 뚜벅뚜벅 걸어가서 아들의 시체를 안았다.</div> <div><br /></div> <div>죽은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찬기운이 느껴진다. 아들만 차운게 아니었다. 거실바닥도 차웠고 공기도 얼어</div> <div><br /></div> <div>붙는듯 매웠다.</div> <div><br /></div> <div>"하"</div> <div><br /></div> <div>숨을 내쉬자 뽀얀 입김이 퍼진다. 그러고보니 주위가 어둡다. 창문쪽을 바라보니 아무 것도 안보인다.</div> <div><br /></div> <div>그냥 까맣다.</div> <div><br /></div> <div>"헉"</div> <div><br /></div> <div>일순 급격한 추위가 몰아 닥쳤다. 전신의 소름이 연신 돋아났고, 팔다리에 마비 증상이 오기 시작했다.</div> <div><br /></div> <div>냉정하게 이 상황을 직시했다. 지금은 한여름이다. 이런 추위는 있을 수 없다.</div> <div><br /></div> <div>다시 바깥쪽을 보았다. 여전히 까맣다. 자세히 보니 까만것이 움직이는 것 같다. 베란다를 열고 들여다 보</div> <div><br /></div> <div>았다.</div> <div><br /></div> <div>"꿈틀꿈틀"</div> <div><br /></div> <div>시커먼 덩어리들이 울룩불룩 돋아나왔다. 별안간 덩어리들 사이에서 뭔가가 솟구쳤다. 사람이다. 사람인데</div> <div><br /></div> <div>목이 없다. 여기저기서 마구 솟구친다. 모두 목이 없다. 동물적인 직감으로 옷을 살펴보니 결코 요즘 시대</div> <div><br /></div> <div>옷이 아니었다. 낣고 헤진 한지로 만든 옷들...슬금슬금 뒷걸음질 친다.</div> <div><br /></div> <div>"꿈틀꿈틀"</div> <div><br /></div> <div>또다시 사방팔방에서 무엇인가가 솟구친다. 이번엔 목이 있다. 그런데 다들 병신이다. 팔한쪽이 없거나 발</div> <div><br /></div> <div>이 없었다. 죄다 병신들이다. 옷을 살펴보니 한복이다. 슬금슬금 뒷걸음질 친다. 어느새 거실까지 물러났</div> <div><br /></div> <div>다.</div> <div><br /></div> <div>"꿈틀꿈틀"</div> <div><br /></div> <div>이번엔 가까이서 소리가 들린다. 맙소사, 천장이다. 천장에 시커먼 것들이 퍼져있다. 그것들은 벽으로 흘러</div> <div><br /></div> <div>내리고 점차 온 집안을 잠식해 들어온다. 이젠 추위를 넘어서 전신이 따끔 거린다.</div> <div><br /></div> <div>벽에서 또 수십명이 솟구친다. 목도 있고 병신도 아니다. 옷을 살펴보니 가슴에 번호가 새겨져 있다.</div> <div><br /></div> <div>"죄수복!"</div> <div><br /></div> <div>정수리부터 시작해서 꼬리뼈까지 수십만 볼트 짜리 전류가 흘렀다.</div> <div><br /></div> <div>"설마"</div> <div><br /></div> <div>뒷걸음질 치다가 뭔가에 걸려 넘어졌다. 아들의 시체다. 뭔가 알듯 말듯 애매하다.</div> <div><br /></div> <div>사라진 그년과 부적 그리고 나타난 원혼들. 깨알같은 힌트라도 절실했다. 불현듯 사기꾼 할아버지가 떠올랐</div> <div><br /></div> <div>다. 수만가지 생각이 서로 넝쿨처럼 꼬였다. 입구는 수십갠데 출구는 하나다. 이 매듭의 시작점만 쥘 수 있</div> <div><br /></div> <div>다면, 참말로 그럴수만 있다면.. 수십번 침을 삼키고 미친듯이 눈을 깜박거렸다. 최대한 뇌를 쥐어 짜냈다.</div> <div><br /></div> <div>가상의 선이 그어진다. 조심스레 그 선을 따라 걸었다. 눈앞에 굵은선 외에는 죄다 함정이다. 밟으면 아랫</div> <div><br /></div> <div>도리가 터져버리는 지뢰밭이다. 발을 딛으려는 찰나 오른쪽에 있던 선도 굵어진다. 곧 모든 선이 통나무 마</div> <div><br /></div> <div>냥 굵어져 버렸다. 서로 오라고 살랑 살랑 꼬리를 흔든다. 빌어먹을. 더이상 짜낼 뇌도 없다. 탈수기까지 </div> <div><br /></div> <div>동원해서 모조리 짜내버렸단 말이다. 알렉산더의 검이 눈앞에 아른거린다.</div> <div><br /></div> <div>어느새 온 집안에 검은 덩어리들이 가득 찼다.</div> <div><br /></div> <div>"꿈틀꿈틀"</div> <div><br /></div> <div>이번엔 바닥이다. 그것도 내가 누워있는 바로 밑바닥이다. 온몸이 미칠듯이 따끔거렸다. 전과는 비교도 안</div> <div><br /></div> <div>될만큼 아팠다. 목없는 시체, 병신들, 그리고 죄수들이 다가온다. 이제는 살이 뜯길 만큼 아프다.</div> <div><br /></div> <div>그들이 쳐다볼때 마다 한움큼씩 떨어져 나가는 것 같다.</div> <div><br /></div> <div>"꿈틀꿈틀"</div> <div><br /></div> <div>바닥이 들썩거리면서 가랑이 사이로 뭔가가 고개를 쳐든다. 물컹물컹한 그것이 가까이 다가온다. 다가오면</div> <div><br /></div> <div>서 점차 제자리를 찾아간다.</div> <div><br /></div> <div>아기다. 수많은 아기가 원망어린 시선으로 나에게 다가온다.</div> <div><br /></div> <div>모든 원혼들이 한데 뒤엉켜 나에게 쏟아진다.</div> <div><br /></div> <div>알았다. 이제 알았다. 그년이 왜 사라졌는지 이제 알았다.</div> <div><br /></div> <div>할아버지도 틀렸고, 아버지도 틀렸다. 죄다 틀렸다.</div> <div><br /></div> <div><br /></div> <div>굿판은 성공했다.</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