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지나니 공게도 조금씩 쌀랑해 지네요.
항상 공게보며 회사의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사람입니다.
이 얘긴 전역후 한번씩 하다가 요즘은 --;; 까먹고 있던 얘기죠.
전 의경을 나왔습니다. 의경이 뭔지도 모르고 친구따라 강남간;; 1학년때 노래패로 데모도 많이 하고 그랬었는데;; 의경을;;
1997년 5월 19일 전주 35사 사단훈련소 입대했습니다. 7월 18일 퇴소하고 충주 경찰학교에 갔었습니다.
지금은 기억이 가물거려 그 건물 이름은 생각이 안나는데 앨범을 보면 나오지 싶네요.
암튼 그건물에 저는 동기들중 시설(열외중 하나)이라는 직분을 부여받아 있었습니다.
시설이 하는 일은 3층과 4층의 화장실에 휴지가 없으면 넣어두고 전구가 안들어오면 갈아주고 하는... 빗자루나 쓰레받이가 없으면 가져다 주는 그냥 물건 관리하는 직분이죠.
시설은 의경이든 경찰관이든 모두 있어서 모르는건 경찰관 시설에게 가서 물어봤던 기억이 납니다.
1, 2층은 실제 경찰관(6개월 교육)이 사용을 하고 3, 4층은 의경 훈련병이 사용을 했습니다.
의경을 시험을 치지요. 그 시험 점수로 자신의 고향에 갈지... 서울의 경찰서로 갈지... 서울의 기동대로 갈지... 결정이 나기 때문에 가끔 소등후 샤워장이나 복도 비상구 등 앞에서 공부하는 녀석들이 있습니다.
시험을 1주일 정도 남겨놓은 새벽 3시쯤인가?
쉬가 마려워 복도를 지나 화장실로 가려고 했습니다.
비상구 등에서 책을 펴고 공부하는 녀석이 있더군요.
'그렇게 집에 가고 싶나?'
뒤통수를 보니 어디서 본놈인데 친하진 않은것 같아 그냥 화장실엘 갔습니다.
건물 자체가 산속에 있어 불만 켜놓은 화장실에 창문까지 열어두어 밝은 화장실과 대비해 밖엔 불빛점하나 없어 더욱;; 무섭더군요.
쉬아를 바지에 반 지리다싶이 해서 볼일을 보는데 뒤통수가 찌릿거리더군요.
--;; 그때기분이 아직 느껴지며 소름이 돋네요.
볼일을 보고 최대한 빨리 내무실로 돌아 오려는데... 아까 그시키가 보이지 않습니다.
'벌써 들어갔나?'라는 생각에 내무실로 들어가려는데... 아래층에서 불침번 2명이 올라옵니다.
A : "그냥 여긴 돌지말고 가자... --;; 무섭다."
B : "둘인데 뭐가 무섭냐?"
A : "어제 불침번도 봤다더라."
나 : 너거 수고가 많네? 근데 글마 몇소대지? 방금 가는놈 못봤나?
A : 누구? 아무도 못봤는데.
평소에 안면이 있던 A녀석이 불침번입니다.
나 : 여기 비상구 등에서 저거집 갈라고 새벽 3시에 공부하던 망할노무시키 말이다.
A : 뭐? 이자리 비상구 등? 니도 그거 봤나? 거봐라 맞다아이가? 걍 내리가자!
B : 진짜네;; 그래 내리가자.
하고 내려 가려고 하더군요.
나 : 뭔데?
A : 니가 본거 귀신이다. 글마 우리 여기 오기 2주 전인가 목메달아 죽은놈이다. 니 얘기 안들었나?
이랍니다.
나 : 지랄한다 미친X끼야. 멀쩡하이 공부하던 놈이 무슨 귀신? 불침번 서다가 헛것을 봤나?
A : 헛것 본건 니고! 암튼 우린 간다!
하고 내려가더군요.
전 절 놀려 주려는 녀석들의 장난이라 생각하고 자리에 돌아와 콧방귀 한방끼고 잤습니다.
다음날 하도 이상해 4개월 전부터 있던 경찰관 시설에게 물어보러 갔습니다.
나 : 행님.. 어제...(어쩌고 저짜고) 라는데 미친X끼들을 다봤지요?
경찰관시설 : (시선을 피하고 아무렇지도 않은듯...) 그거 진짜다.
나 : 행님 그짓말 한다? 치~
경찰관시설 : 글마 나도 아는 놈인데 그렇게 공부하는거도 봤고... 여기 경찰관들은 모르는척 한다. 봐도 못본척 있어도 모르는척... 경찰관 훈련받는데 귀신소리 나오면 기강 헤이해졌다느니 위에서 소리 나오니까 그냥 조용히 있다. 그녀석 그렇게 집에 가려고 공부했는데 시험치고 자신이 없었던지 결과 발표도 안났는데 지금 4층에 잠궈진 창고 알지? 거기서 워커줄에 목메달고 죽었다. 그러니 니도 모르는척 그냥 조용히 있어라.
한다.
그 뒤로 화장실 갈때 그쪽을 봐도... 다시는 보이지 않더군요.
사실 그때는 무섭게 느껴지지도 아는 녀석의 뒤통수마냥 편한 그런 모습인데...
그게 정말 귀신이었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네요.
제 동기가 이 글을 볼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저희 내무반 친한 녀석들과만 얘기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불침번 섰던 녀석들은 다 알고 있었고 결국 나와 몇몇 열외의 직분을 가진 녀석들만 모르는 얘기더군요.
아... 12년 전에 얘길 꺼낼려니 앞뒤가 뭐 그렇네요.
암튼 토요일 아침 출근해서 할일도 없고... 공게는 조용하고 해서 적어 봤습니다.
의경기수 503기고 1997년 5월 19일에 입대했습니다. 전주 35사로;;
만약 당신이 독립투사의 후손이라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그러니까 예를 한번 들어볼께...
흠... 당신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께서 원래는 무척이나 부자셨어... 그런데 자신의 나라가 일본에게 넘어가버린거야. 분노하시고 터질듯한 가슴을 추스리지 못해 직접 자신의 가계를 들고서 의병을 일으키시고 군자금을 대시고 직접 게릴라전을 하면서 의병장으로 활동하셨다.
물런 멋지겠지... 떳떳할꺼고... 그렇죠?
그 여파로 잘나가던 가세는 국가를 위해 다 써버렸고 자신의 부인과 함께 도망다니다 부인은 수차례 경찰서가서 폭행에 고문당하고 아이들은 돈이 없어 배우기는 커녕 밥조차 제때 연명하기 힘든 생활을 했다면...??
당신은 정말 떵떵거리며 그리고 지금 죽은 이후에도 정말 잘~ 살고 있는 친일파의 자손이 되렵니까? 아니면 배울때 못배우고 먹을때 못먹어 아주 낮은 삶을 사는 그런 독립군의 자손이 되렵니까?
갑자기 이런게 자신의 문제로 닥쳐 왔다면... 만약 독립군을 선택한 할아버지께 "정말 밑바닥 인생을 펼치고 있는 자손들의 모습을 보세요. 할아버지께서 괜한일 하셨어요. 이게 독립군 자손의 실상입니다!"라고 얘기 하겠습니까? 아니면... "그래도 할아버지가 자랑스럽습니다. 할아버지께서 계셨기에 지금의 우리나라가 독립된 우리나라가... 대한민국이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라고 얘기할래요?
사실... 잘모르겠네요.
저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께서 저런일을 하셨다네요.
독립군의 자손이란게 저였더군요. ^^
어짜피 되돌릴수 있는게 아니잖습니까? ^^ 뭐가요? 친일파로 떵떵거리며 살수 있는 기회를 돌리고 싶냐구요? 아뇨~~!
우리나라가 해방되지 못할께 아니잖냐는 말입니다. 물런 할아버지 같으신분이 계셨기에 말이죠.
사실 많이 부끄럽습니다.
역사학을 배우는 손자가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니 말이죠.
물런 친가나 외가나 다 반씩 피를 물려 받았으니 같게 생각해야 하는데 말이죠... ^^
할아버지... 전 할아버지가 자랑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께서 저희에게 아주 좋은 세상을 자신의 목숨과 바꾸어서 선물하셨으니까요... 
잘살께요. 
그리고 떳떳하게... 독립군의 자손의 이름에 걸맞는... 떳떳한 손자가 되겠습니다.
할아버지... 사랑합니다.
- 2004. 8월 29일 늦은 11시... 외고손 순찬올림 -
권석도(權錫燾) - 1880. 9. 9~1946. 4. 6 
경남 함양 - 의병 
서훈내역 - 독립장(86) 
공적내역 - 경남 함양(咸陽) 사람이다.
일제가 을사조약을 늑결하고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자 크게 분노하여 김동신(金東臣) 의병진에 참가하였다가 고광순(高光洵) 의병진과 합류하였다. 1907년 10월 11일 고광순이 전사하자 남은 의병을 이끌고 계속 활동하였다. 동년 12월 21일 경남 하동군 화개면에서 박인환(朴仁煥) 의병진과 합류하였으며, 박인환 등의 추대를 받아 의병장이 되었다.
이후 그는 지리산을 거점으로 하동·함양·구례 등지에서 항쟁하였다. 1908년에는 하동군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던 중 동년 6월 26일 하동 일본수비대에 피체되었다. 하동주재소에 구금 중 그는 1908년 7월 9일 탈주에 성공하여 도피하다가 일경의 추격을 받아 흉부에 총상을 입고 산속에 은신하였다가 친척집에서 치료를 받았다.
1909년 3월 그는 다시 이학로(李學魯) 의병장과 합세하여 진주 서면 동양곡(東陽谷)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며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09년 5월 하순 박매지(朴每之)·이학로 등 수명과 함께 진주시 산기동(山岐洞)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일본수비대와 마주쳐 피신하였다. 그후 행상으로 변장하고 은밀하게 활동을 계속하던 그는 1909년 10월 10일 진주에서 다시 일경에 피체되고 말았다. 
그는 결국 1909년 12월 15일 부산지방재판소 진주지부에서 종신징역형을 받고 대구공소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종신형이 확정되었다. 모진 옥고를 치르던 그는 소위 일황의 특사로 재감 6년 9개월 만인 1916년 6월 24일 가출옥하였다.
그는 1918년 2월 일경으로부터 다시 강도사건의 누명을 쓰고 함양경찰서에 피체되었으나, 10여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1918년 12월 12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출옥하였다. 이 당시 그는 허위자백을 강요하는 일경의 고문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회복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일경의 소위 요시찰인 감시가 극심하자 그는 가족과 함께 포항·울진 등 낯선 고장을 전전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註·판결문(1910. 2. 19 대구공소원)
·판결문(1918. 12. 12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진주경찰서장 정보보고(1908. 6. 30, 7. 9, 1909. 10. 11∼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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