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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ID : panic_14951
    작성자 : 받침돌
    추천 : 3
    조회수 : 2493
    IP : 211.243.***.120
    댓글 : 3개
    등록시간 : 2011/05/03 13:18:00
    http://todayhumor.com/?panic_14951 모바일
    [단편]교체
    승환은 막차가 첫 역을 떠날 때 부터 자리에 앉아있었다.
    검정색 구두에 회색 정장, 어딜 보나 회사원으로 보이는 인상이었다.
    지하철 막차가 종점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현재 사람은 승환 자신을 빼고 9명.
    이정도면 적당한 숫자다.
    '그놈들'이 떼를 쓰지는 못할 정도로 많고, 그렇다고 너무 붐비지는 않는다.

    '교체구간'의 바로 전 역에서 문이 닫히려는 순간 이어폰을 낀 남자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약간의 소란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그를 흘낏 쳐다봤다.

    '운이 좋구만.'
    승환은 생각했다.
    반어법이라고 해야하나...

    이제 슬슬 준비해야 한다.
    승환은 노트 필기사항을 최종적으로 정리했다.
    승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어가면서 사람들을 체크했다.
    승환이 앉아있던 옆자리엔 꽤나 많이 취한 아저씨 두 명이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끔 목청이 커지기도 했지만 이내 주위 사람들을 의식해서인지 목소리를 줄였다.
    그 옆엔 딱 봐도 휴가나온 군인인 듯 한 사복입은 남자가 마찬가지로 취해서 시뻘개진 얼굴로 앉아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그가 앉은 자리에서 조금 떨어진 옆자리엔 여자 한명이 다소곳하게 앉아있었다.
    문 건너 옆 노약자석에는 방금 남자가 뛰어들어와서 놀라서 깬 듯한 할아버지 한 분이 다시 졸기 시작했고, 그 맞은 편엔 할머니 한 분과 그 옆에 기대서 자고있는 손녀가 있었다.
    좀 멀찍이 떨어진 곳엔 책을 읽고 있는 남학생이 앉아있었고, 그 건너편엔 외투를 입은 건장한 남자 한명과 방금 탄 이어폰을 꽂은 남자가 서 있었다.
    이어폰 소리가 커서 그런지 외투 입은 남자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승환을 제외하고 총 10명.
    승환은 노트에 그들의 대략적인 특징을 적었다.
    승환은 남학생의 옆에 앉았다.
    외투 입은 청년은 시비를 걸기는 싫었는지 말없이 반대편으로 와 문에 기댔다.
    그러고는 남학생이 읽고 있는 책이 무엇인지 쳐다보기 시작했다.
    이 학생도 운이 좋구만...
    슬슬 시작할 시간이다...

    '덜커덩, 덜컹!'

    지하철이 갑자기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약간 흔들렸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그리고 그 순간 어두운 구석구석에서 그림자의 손들이 튀어나왔다.
    순간 승환은 노트를 떨궜다.
    문틈에서도, 의자 아래에서도, 천장에서도 수많은 손들이 튀어나와 사람들을 붙잡았다.
    붙잡힌 사람들은 마지 일시정지라도 한 듯 딱 굳어버렸다.

    잠시 뒤 그림자 손들이 정장을 입은 남자만을 스르륵 놓아주었고, 남자는 정신을 차리고 노트를 집었다.
    승환은 '교체 관리자'를 2년간이나 한 베테랑인 모양이다.

    "자, 여러분, 저는 오늘의 교체 관리자입니다."

    그림자들은 미동도 없다.

    "그럼...여러분은 말 길게 하면 싫어하시는 거 아니까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할머니랑 손녀 잡으신 분들은 놓으세요.
     처음 탔을 때 손녀가 칭얼댔기 때문에 꽤 많은 사람들이 봤습니다."
    그러자 그림자의 손들이 단념하듯 스르륵 물러났다.
    오직 두개의 손만이 그들이 깨어나지 않도록 잡고 있었다.

    "다음 이어폰 낀 남자도요.
     마지막으로 탔기 때문에 거의 다 봤습니다."
    그러자 그림자들이 역시 한개의 손을 빼고는 이어폰을 낀 남자를 놓아주었다.

    "여기 여자분은 외투 입은 남자분이 자기 이상형인가본지 계속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남자분도 놓아주세요."
    그림자들이 외투 입은 남자를 놓아주었다.

    "외투 입은 남자분은 여자분을 거의 신경 안쓰고 있지만,
     같은 자리에 앉아있는 남자분이 고개를 숙인 채 계속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여자분이 마음에 들었나봅니다.
     그러니 여자분도 놓아주세요."
    군인... 안쓰럽구만.
    정장 입은 남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일에 집중해야 한다.

    "제 옆에 대학생분도 힘들겠고...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술 취한 두분도 힘들다는거 아시죠?
     세분 다 놓아주세요."
    그림자들은 그들도 놓아줬다.

    이제 남은 건 술 취한 군인, 그리고 노약자석의 할아버지다.
    그는 승환이 필기했던 사항을 한번 더 확인했다.

    "자... 이제 남은 두분중에 놓아드려야 할 분은..."

    정장 입은 남자는 침을 삼켰다.

    "할아버지입니다.
     손녀가 계속 쳐다봤거든요."
    할아버지를 잡은 그림자 손들은 잠시 움직이지 않더니,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물러났다.

    "자 이제 군인분이 '교체'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바로 시작하세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그림자의 손들은 앞다투어 군인의 몸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군인이 심하게 몸을 떨기 시작했다.
    안으로 수십명의 원혼이 쳐들어갔기 때문이다.
    곧이어 군인의 몸이 시커멓게 변했다.
    그러더니 지하철 문 틈의 어둠으로 빨려들어가고, 그 자리에서 그림자하나가 튀어나왔다.
    문 너머로 처절한 비명소리가 낮게 들리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이제 곧 익숙해져야 할 것이리라.
    그림자는 꾸물꾸물 서서히 사람의 형체를 이루더니,
    이윽고 좀 전과 비슷하지만 분명히 다른 청년으로 변했다.
    다만 이번엔 군복을 입고 있었고, 술에 취한 것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이거 잘하면 들킬지도 모르는데...'
    정장 입은 남자는 이렇게 생각했지만 어짜피 끝난 일이다.
    돌이킬 방법은 없다.

    이윽고 찢겨진 그림자 조각 같이 생긴 패배자들이 어둠 속으로 물러났고, 군인 남자는 고개를 들었다.

    "축하드립니다."
    원래는 이 뒤에 여러가지 해야 되는 말이 있지만 그런 건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여기 교체에 성공하신 분께 드리는 안내 메뉴얼입니다."
    정장 입은 남자는 얇고 검은 표지의 책자를 건넸다.
    군인은 미동도 없이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이내 책자를 받았다.

    "자 이제 제가 자리에 앉으면 끝입니다."
    정장 입은 남자는 다시 천천히 걸어가 원래 자리에 앉았다.

    다시한번 열차내는 덜커덩거렸고, 이내 그림자의 손들은 전부 사라졌다.

    책을 읽던 학생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잠시 졸았던 건가.
    뭐 어짜피 자신이 내리는 곳은 종점이니 상관없다.

    할머니도 갑자기 약간 소름이 끼쳐서 잠에서 깼다.
    벌써 내릴 역에 가까워졌다.
    할머니는 손녀를 잘 어르면서 흔들어 깨웠다.

    외투 입은 남자는 기지개를 폈다.
    잠시 빈혈이라도 온 듯 잠깐 머리가 띵했다.
    아무래도 요새 너무 야근을 많이해서 피로가 쌓인 것 같았다.
    그는 양 팔을 들면서 주위를 슥 둘러봤다.
    군인? 군인이 탔던가.
    보아하니 이병이구만.
    휴가 나왔으면 군복 좀 벗어도 되는데.

    지하철은 종점에 도착했다.
    졸고 있는 사람을 빼고는 모든 사람들이 내렸다.
    정장 입은 남자도 밖으로 나왔다.
    시원한 밤바람이 불자 그는 기지개를 폈다.

    "대담하네."
    갑자기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돌아보자 좀 전에 '교체'되었던 군인이 서 있었다.

    "이런... 들켰나?"
    정장 입은 남자는 씩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교체 관리자를 잡다니 들켰으면 우리 전부 끝장이라고. 역 폐쇄되면 어떡해."
    "뭐 어때. 사실 나도 3년 전에 교체당한 교체 관리자야. 이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구."
    "하긴... 그 승환이란 놈은 2년이나 그 일을 했다는 놈이 들어올 때 자기 어필이 부족하더구만."
    "어디 근처서 술 한잔 할까? 내 속세에 나온 기념으로 한 턱 쏘지 크크."
    "난 됐어. 오랜만에 나왔으니 살아갈 준비를 해야지."
    "그럼 행운을 빈다구."

    군인은 메뉴얼을 읽으면서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정장 입은 남자는 갈색 구두를 고쳐신고 유유히 걸어갔다.
    이제 다시는 막차를 타지 않으리라.
    by 받침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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