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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이성선, 달을 먹은 소
저무는 들판에
소가
풀을 베어먹는다
풀잎 끝
초승달을 베어먹는다
물가에서 소는
놀란다
그가 먹은 달이
물 속 그의 뿔에 걸려 있다
어둠 속에
뿔로 달을 받치고
하늘을 헤엄치고 있는 제 모습 보고
더 놀란다
정규화, 산
산은 크거나 작거나
제자리를 안다
저보다 작은 산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작은 산도 큰 산과 결코 맞서지 않는다
크고 작은 산은
보기 좋게 조화를 이루면서
사람이 부러워할 정도로
오랜 평화 속에 묻혀 지낸다
꼭대기로 올라가서는
높게 멀리 바라보다가
기슭으로 내려와서는
밭뙈기가 되어 엎디기도 한다
오직 산인 것을 다짐하면서
모든 동식물에게
서식처를 주기도 하는
넉넉한 가슴을 지니고 산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사방으로 불고 가게 하면서
자신을 늘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경이롭다
저렇게 산이 있으니
바라보고 싶을 때 바라보고
오르고 싶을 때 오르면 된다
김명인, 기억들
누군가의 사설 감옥에
수십 년째 갇힌 나와 마주치는 때가 있다
오래된 책갈피에서 떨어진 사진 한 장
목판본 판각 위에 여러 잠을 얻고 깨어나는
저 어리둥절한 누에가 스무 살 나일까
강철을 떡 주무르던 주물조차 부식이 되면
무쇠 완력을 증명해내지 못하는데
믿을 수 없는 한때의 금강석은
불쑥불쑥 진흙 속에서도 솟아오른다
살에 새긴 기록 저렇게 생생하다니
퇴역 배우의
일곱 살 아역만을 떠올리는 늙은 팬처럼
현장에 내가 있었음을 주장하는
저 검사의 오늘 논고는 여느 때보다 훨씬 집요하다
평생을 한 배역으로 끝장 낸 배우의 비애
관객들은 눈치나 챌까 어떤 기미조차 이해 못해
썩지 않은 기억 속을 나도 씩씩거리며 해맨 적이 있다
마음 서랍 깊숙이 간직해온
케케묵은 기록들로 더께를 이룬 일기장
배반당한 사랑에는 복수의 자물쇠까지 채워놓아서
벗어날 길 없는 감옥에는
낯선 그녀가 아니라 까닭 모르는 내 그리움이
오랜 수형(受刑)을 살고 있다
오철환, 낙화
온 세상에 낙화가 하얗게 휘날린다
쌓여서 어쩌자는 건가
무정한 봄이 물오르기도 전에 떠나간다
사연은 하루 저녁이면 다다
엮는다고 다 역사이고 산다고 다 삶인가
잎 순보다 먼저 떠나는 꽃잎이 오늘 따라 고웁다
소문 없이 왔다가 가는 것이 봄이련가
더불어 왔다가 가는 게 인생인가
꽃들이 일제히 떠나는 게 추억 속의 영화 같다
여린 꽃잎이 떨어져 흐르는 게
어린 심청 마음만 같아
소식 없이 떠나는 봄이 아리다
천상병, 무명(無名)
뭐라고
나는 그때
말할 수 없이
저녁놀이 져가는 것이었다
그 시간과 밤을 보면서
내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봄도 가고
어제도 오늘 이 순간에도
빨가니 타서 아, 스러지는 놀빛
저기 저 하늘을 깎아서
하루 빨리 내가
나의 무명(無名)을 적어야 할 까닭을
나는 알려고 한다
나는 알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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