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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환, 심산(深山)
심신 산골에는
산울림 영감이
바위에 앉아
나같이 이나 잡고
홀로 살더라
최정례, 생각의 까마귀떼라
나의 밤이 너에겐 낮이고
너의 낮이 나에겐 밤이라
우리 사이엔 거대한 태평양이
누워서 파도친다
끝도 없이 캄캄한 해안가로
난폭하고 순결한 물결이
무슨 뜻을 품고 굽이쳐 오는 것만 같은데
사실 무슨 뜻이 있겠는가
내 이름조차 기억 못하는 너를 향해
전화기를 들었다 놓는 것과 같다
잠시 다른 밤 다른 낮을 살고 있는
남의 나라에서
내 나라를 향해 한껏 밀려갔다가
다시 돌아서 밀려오는데
셀 수도 없는 네가 거기 떠올랐다 가라앉는다
파도에 굴러다니는 태초부터의 자갈돌처럼
생각의 까마귀떼라
얼굴도 몸통도 어깻죽지도 두 팔도 무너지면서
정희성, 맨주먹
손을 들여다본다
보아도, 눈 씻고 보아도 낯선 손바닥
흠집에 기름투성이
이 손이 잡을 것은 무엇인가
일을 해도 일을 해도
내 손은 빈손
찬바람이 손가락을 빠져나갈 뿐
두 손으로 얼굴을 거머쥐어도
바람은 내 얼굴에 모래를 뿌린다
나는 안다
이 추운 겨울밤
뭇사람을 비탄에 떨게 한 바람이
어떻게 한 사람의 높은 담을 치솟게 하고
한 사람의 음험한 웃음소리가 어떻게
타인을 맨주먹 쥐게 하는가
김사인, 늦가을
그 여자 고달픈 사랑이 아파 나는 우네
불혹을 넘어
손마디는 굵어지고
근심에 지쳐 얼굴도 무너졌네
사랑은
늦가을 스산한 어스름으로
밤나무 밑에 숨어 기다리는 것
술 취한 무리에 섞여 언제나
사내는 비틀비틀 지나가는 것
젖어드는 오한 다잡아 안고
그 걸음 저만치 좇아 주춤주춤
흰고무신 옮겨보는 것
적막천지
한밤중에 깨어 앉아
그 여자 머리를 감네
올 사람도 갈 사람도 없는 흐린 불 아래
제 손만 가만가만 만져보네
이성복, 섬
섬과 섬이 만나 자식을 낳았다
끝없이 너른 바다를 자식섬은 떠돌아다녔다
어미섬과 아비섬을 원망하면서
떠돌다 만난 섬들은 제각기 쓸쓸했고
쓸쓸함의 정다움을 알게 됐을 때
서둘러, 서둘러
자식섬은 돌아왔다
어미섬과 아비섬이 가라앉은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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