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2001년</div> <div>결혼한지 17년차..</div> <div>서너번의 선을 보고 마지막으로 딱 한번 만나보란 가족의 권유에 다섯번째의 만남에서 나타난 지금의 내 아내..</div> <div>생머리에옆가르마를 하고 깔끔하게 하나로 묶은채로 날 보며 웃어주었던 아내에게 첫눈에 반해 결혼까지 했다.</div> <div>그렇게서로 사랑하며 한두해가 지나고 세명의 아이들을 낳고 점점 싸우는 횟수도 많아지며 17년째가 되었다.</div> <div>퇴근하고돌아와보니 아내는 아이들이 먹다 남긴 분식 찌꺼기를 바닥에 앉아 손으로 집어먹으며 왔냐는 인사를 한다.</div> <div>한쪽다리를 구부려 가슴에 대고 순대를 집어먹는 아내의 저런 모습이 이제는 신물이 난다.</div> <div>난속으로 꼽추같이 추하다는 생각을 한채 대꾸도 안하고 방에 들어와 답답한 넥타이를 풀고 침대에 누웠다.</div> <div>살짝열려진 문 틈새로 아내가 꾸역꾸역 분식을 먹으며 내 모습을 힐끔힐끔 살펴보다가 떡볶이 묻은 손 그대로 방으로 들어오더니 회사에서 무슨일 있었냐고 묻는다.</div> <div>"집에서살림만하는 당신이 말해봤자 뭘 알아! 혼자 있고 싶으니까 좀 나가, 냄새나"</div> <div>내눈치를 보는 아내의 표정이 이제 꼴보기도 싫어 아내를 거의 밀치듯 밀어내고 일부러 문을 크게 열었다가 "꽝!"소리가 날정도로 닫았다.</div> <div>문소리가크게 들리자 방에서 아이들이 한둘씩 나와 아내에게 무슨일 있냐고 묻는다.</div> <div>아무일없으니 들어가서 책보라고 아내가 말하자 둘째딸이 아내에게 나무라듯 말한다.</div> <div>"엄마,그거 치우고 버리라니까 그걸 또 다먹고 앉아있어! 그러니까 뱃살이 그렇게 나오지. 내 친구 엄마들 봐봐, 엄마같이 하고 있는사람 있나, 다 젊은 아가씨처럼 세련되게 하고 다니는데 엄만 그게 뭐야!"</div> <div>아내가민망할때 내는 특유의 오버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아이들은 또 짜증난다는듯 알아듣지 못할 불평을 하며 방 안으로 들어가고 아내가 분식을 그제서야 치우는지 봉지소리가 난다.</div> <div>짜증난다이제.. 아내가 하는 모든 행동들, 아내가 내는 소리들, 아내가 하는 말들, 아내 자체가 지겨워지고 아내에게 이제는 무슨 말을 해도 답답하고 말이 통할때가 없다.</div> <div>2002년</div> <div>결혼한지 18년차..</div> <div>회사동료들과 술마시는것도 이제 지겨워지고 매일 반복되는 하루에 즐거울것 없는 일상..</div> <div>2002년은내 인생의 지루함을 없애주는 2002 월드컵이란 것이 찾아왔다.</div> <div>월드컵분위기와 함께 회사에서도 한국경기가 있는 날이면 일찍 보내주거나 모두 정신적으로 흐트러진 상태였고 구지 그것을 제지하려는 사람도 없었다.</div> <div>퇴근길,집에 오는데 치킨집이 보인다. 그래, 오랜만에 집에 일찍 들어가는데 아이들 좋아하는 간식거리 사들고 집에서 축구나 봐야겠다.</div> <div>축구시작하기 딱 10분전에 맞추어 집에 도착했다. 나보다 치킨을 더 반기는 아이들은 내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치킨봉지를 내 손에서 쏙 빼 마루 tv 앞에 앉아 대기하고 있다가 방에 있는 아내에게 소리친다.</div> <div>"엄마!축구 시작할때 되면 불러달라며! 이제 할거야 빨리 나와!"</div> <div>작은아들이 아내를 부르자마자 아내는 벌건색 red티를 입고 상기된 표정으로 마루로 나온다.</div> <div>축구에축자도 모를정도로 관심없던 아내가 저런티를 입고 나오니 웃기지도 않았다.</div> <div>"뭐야,어디 나가서 응원하는것도 아닌데 쓸데없이..."</div> <div>내가짜증내고 있다는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내는 동네에서 4천원주고 티셔츠를 샀다며 흥분된 목소리로 들떠있다.</div> <div>내팔을 붙들고 이거저거 설명하는 아내가 짜증나 팔을 신경질적으로 떼고 tv 앞에 앉았다.</div> <div>내가사온 치킨을 맛있게 먹는 아이들... 평소에 치킨같은거 좋아하지도 않는 아내도 목살을 집어 뜯고있다.</div> <div>치킨을먹는 아내의 토끼앞니가 더 커보여 뵈기 싫다. 게다가 목살을 돌려먹던중 치킨조각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다.</div> <div>어쩜저렇게 미운짓만 골라서 하지.. 기름기묻은 바닥을 휴지로 닦고 있는 아내의 뒷모습..</div> <div>뱃살은더이상 나올데도 없어 옆으로 삐죽삐죽 튀어나와있고 남산만한 엉덩이에 어디 한군데 좋게 봐줄데가 없다.</div> <div>경기중아깝게 골이 안들어가거나 안풀리는것 같을때마다 이때다 하고 아내에게 괜히 짜증내며 물가져와라, 맥주가져와라 일부러 시켜댔다. 이제는 하라고 하면 다 하는 아내의 곰탱이같은 모습까지 미련해보인다.</div> <div>2003년</div> <div>결혼한지 19년차</div> <div>결국 안되겠다 싶어 아내에게 각방을 쓰자고 말해 현재는 각방을 쓰고있다. 이 생활이 너무 좋다.</div> <div>아내와잘 마주치지 않을 수 있고 예전처럼 아내가 밥과 청소등 집안살림은 그대로 도맡아하고..</div> <div>왜진작 이런 생각을 안하고 살았는지 빨리 생각해볼껄 하는 후회도 있지만 말이다.</div> <div>가끔씩단둘이 저녁식사를 할때 아내는 내 눈치를 힐끔힐끔 보면서 방을 다시 합치면 안되냐 물어보지만 무시하면 땡이다.</div> <div>식탁이쨍하고 깨질정도로 젓가락과 숟가락을 놓고 아내를 노려보면 아내도 더이상 말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며 밥만 떠먹는다.</div> <div>이제나에게 아내는 파출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div> <div>한달에한번씩 월급주듯 생활비 쥐어주면 아이들 키워주고 집안살림해주는 능력좋은 뚱뚱한 파출부...</div> <div>어느날은이 여편네가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저녁마다 운동을 할거란다. 306호 아줌마랑 동네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가서 하루에 줄넘기 50번씩 할거라고 내게 떠들어댄다.</div> <div>하던지말던지 무시하면 됐겠지만 난 아내를 또 약올리고 싶어 이렇게 말했다.</div> <div>"306호면그 호리호리한 아줌마? 하필 운동을 해도 비교되게 그런 아줌마랑 하냐, 하려면 혼자 동네에 최대한 안보이는 구석가서 뛰고와!"</div> <div>운동한다고얘기하면 내가 칭찬해줄것을 은근히 바랬었던 모양인지 내 말을 들은 아내가 멋쩍은 표정으로 아무말 않고 방으로 들어간다.</div> <div>그렇게아내가 운동을 하기 시작하고 일주일만에 아내는 운동을 그만두었다.</div> <div>"거봐,제대로 하지도 못할거면서.. 그렇게 운동한다 난리피더니만.."</div> <div>"여보,나 이상해.. 줄넘기 하는데 자꾸 소변이 조금씩 나오고 아랫배가 많이 아파."</div> <div>"그러게운동도 다 팔자타고난 사람이 하는거야, 그냥 생긴대로 노는게 제일 좋은거야."</div> <div>그날이후부터 아내는 틈만나면 온 몸을 주물럭거리며 피곤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div> <div>어느날은아이들에게 안마를 부탁하다 아이들이 기어코 해주기 싫다고 하며 아내를 지들방에서 내쫓았는지 아내는 내 방으로 슬슬 들어오더니 몸이 너무 뻐근해서 못참겠다며 안마를 해달라고 부탁했다.</div> <div>난소리지르며 내쫓을까 하다가 좋은 생각이 나 아내에게 흔쾌히 안마를 해주기로 했다.</div> <div>퍽퍽퍽!손에 힘을 주고 죽을힘을 다해 아내의 등이며 어깨를 때려주었다.</div> <div>아내는10초도 안돼 아프다며 내 안마는 너무 세서 몸에 안맞는것 같다고 나가버렸다.</div> <div>다시는이제 나에게 부탁안하겠지..</div> <div>앞으로귀찮아야될 한가지를 미리 없애놓으니 기분이 너무 좋다. 난 침대에 엎어져 배를 잡고 웃어댔다.</div> <div>2004년</div> <div>결혼한지 20년차</div> <div>아내의 아랫배 통증이 도저히 없어지질 않았는지 결국 병원가서 검사를 받으러 간다고 나한테 병원에 데려다 달란다.</div> <div>인터넷찾아 병원위치를 살펴보니 회사를 지나쳐 가야하는 곳인라 아내를 태우고 회사 앞에서 내린다음 택시타고 혼자 병원가라고 했다. 너무 힘드니 병원 앞까지 데려다 달라는 아내를 차에서 끌어내는데 아침부터 진땀을 뺐다.</div> <div>혹시나회사동료들이 아내를 보고있을까 차를 세우고 나서는 아내를 처음 대하는 사람인거마냥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는척을 하고 들어갔다. 회사로비를 들어가며 잠깐 뒤를 보니 아내는 그 자리에서 하염없이 날 바라보고 있는듯했다.</div> <div>그날집으로 돌아오니 아내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는듯 말한다.</div> <div>"여보,나 자궁에 물혹이 큰게 있대. 제거하는 수술을 해야하나봐."</div> <div>수술?그까짓거 죽는병도 아닌데 하라면 하라지..</div> <div>난그렇게 하라는 무성의한 대답을 해주고 아내 앞에서 일부러 꽝소리를 내며 문을 닫았다.</div> <div>병원에가보기도 싫었지만 보호자동의서 때문에 아내가 수술한날 입원실에 들러보았다.</div> <div>아내는소리가 나지도 않는 티비가 뭐가 재밌는지 들여다보고 있다가 내가 인기척을 내니 반갑게 웃어준다.</div> <div>여러가지속옷과 기타 준비물 챙겨온것을 아내옆에 내려다놓고 의자에 앉았다.</div> <div>수술할때고생이 많았는지 입술이 허옇게 변해 부르트고 다크써클이 전보다 더 심해진것 같았다.</div> <div>그런아내가 조금 측은해져 더 옆에 있어주려 했지만 아이들은 어떻냐, 밥은 뭐해먹냐 쉴새없이 떠드는 아내의 입에서 나는 입냄새 때문에 역겨워져 담배피고 온다는 말 한마디 하고 그냥 집으로 가버렸다.</div> <div>2005년</div> <div>결혼한지 21년차</div> <div>물혹제거수술을 한 이후로 이상하게 아내는 몸이 더 좋아지질 않았다. 입맛없을때 자주먹던 열무비빔밥도 예전엔 한그릇 금방 뚝딱이더니만 오늘은 세숟갈도 못먹고 오렌지주스만 홀짝거리고 있는다.</div> <div>"쌀아깝게 그게 뭐야! 누군 밖에서 돈이 그냥 들어오는줄 알아?"</div> <div>큰소리좀냈더니 아내는 미안하다면서 다시 숟가락을 들고 밥을 뜨기 시작한다. 억지로 크게 한입 넣고선 우물거리다가 잘못 넘기거나 체했는지 급한 걸음으로 화장실로 가서 구역질을 한다.</div> <div>작은아들이 곧 화장실로 따라가 아내에게 괜찮냐고 물으며 등을 두드려준다.</div> <div>그러자다시 오바이트를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div> <div>예상했던둘째딸의 불평섞인 소리가 앞에서 들린다.</div> <div>"아씨아침부터 밥맛 떨어지게.."</div> <div>자식앞이라내가 하고싶어도 못했던 말을 둘째딸이 말해주니 괜히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다.</div> <div>회사나가는데배웅하는 아내가 아무래도 다시 병원에 가서 검사좀 받아봐야겠다고 말한다.</div> <div>"난이제 네가 병원간다고 하는것도 지겨우니까 보고하지말고 알아서 가!"</div> <div>아내의코앞에 대고 화를 내며 집을 나와버렸다.</div> <div>2006년...</div> <div>결혼한지 22년차..</div> <div>그리고아내가 세상을 떠난지 1년..</div> <div>결국 아내가 그토록 아파했던건 자궁암 때문이었다. 제거수술후 합병증으로 자궁암 바이러스가 찾아와 수술하는 도중 자궁을 드러내다 막을 수 없는 출혈이 생겨 아내는 수술도중 세상을 떠났다.</div> <div>아내가죽었어도 바뀐건 아무것도 없었다. 세상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갔고 아이들도 몇개월은 슬픔의 충격에 빠져 정신을 못차리는듯 싶더니 지금 둘째딸은 대학에 들어가 캠퍼스커플로 사랑을 하고 있기도 하고 큰아들은 좋은회사에 취업을 해 눈도 잠시 붙이기 모자란 바쁜일상을 보내고 있다.</div> <div>나또한 달라진것이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난 아내의 인생에 있어 나쁜남편이었고 아내가 죽었다해도 그 사실은 변함없는거니까...</div> <div>지금아내의 무덤앞에 앉아 소주병이나 들이키고 있는 날 마치 욕하는듯 햇빛이 너무나 강렬하게 나를 내리쬐고 있다.</div> <div>누군가나의 일기를 발견한다면 난 아내의 곁으로 가있는거겠지.</div> <div>제발오늘로써 나의 모든것이 끝이 나주길...</div> <div>이깟목숨 버리며 세상에서 가장 착했던 한 여자를 쓸쓸하게 죽게 한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는 내가 많이 나쁘다는것을 알지만</div> <div>벌을받더라도 얼른 아내의 곁으로 돌아가 받고싶다.</div> <div>=</div> <div>2006년 9월 충남 논산에서 자살한 고 김재형(가명)씨의 일기</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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