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안녕하십니까?</div> <div>오유 2004년 가입된 딸둘인 징어입니다.</div> <div>긴급하게 문제가 생겨 글 남깁니다.</div> <div> </div> <div>2011년 11월~2013년 10월까지 현재의 세입자와 아파트 전세계약을 했습니다.</div> <div>2년이 경과되어 2013년 11월~2015년 10월까지 다시 재계약을 했습니다.</div> <div> </div> <div>현재 저희는 어린딸 둘을 부양하는 맞벌이 부부라서 홀로되신 장모님 댁에 같이 들어가서 살고 있습니다.</div> <div>좋은 기회에 아파트를 분양받아 내년 10월 입주입니다.</div> <div>지금 아파트 중도금 때문에 집을 매매해야 하는 상황이라 이런 문제가 생겼습니다.</div> <div> </div> <div>지난 9월 12일 손에 선물셋트를 끼구서 딸래미랑 와이프랑 같이 미리 전화하고 약속시간 잡아서 전세집에 방문을 했습니다.</div> <div>저희 사정을 얘기하고 어쩔수 없이 매매해야 하니 집을 알아봐달라...</div> <div>최대한 빨리 이사 부탁드리고 10월 말까지 이사날짜라도 얘길 해달라 라고 말씀 드렸습니다.</div> <div>그래야 저희도 집을 내놓을수 있으니까요.</div> <div> </div> <div>제가 독일 출장 다녀온 뒤 연락을 드렸습니다.</div> <div>저희 아는 분 부동산에 가셔서 집을 알아 보셨더군요. 그런데 그분 말로는 "살것 같지 않던데? 두집 봤는데 썩 맘에 들어하지 않더라."라고 하시더군요.</div> <div> </div> <div>3주가 지난 시점에 알아보셨냐고 연락 드렸고 </div> <div>그분께서 "맘에 드는 집이 없다. 알아보고 있는데 내년 3월에 나는 집이 사실 마음에 든다." 라고 하네요.</div> <div>그때면 저흰 상황상 돈이 필요 없는 상황이죠. 저희가 대출받아 중도금을 납부 해야 하니까요.</div> <div> </div> <div>그래서 3월이면 그냥 10월까지 계약 유지하시고 이사비용 등등도 못드린다. 만약 전에 나가실려면 나가는 날짜~10월 말까지 살 사람 구하시고 나가시라고 했습니다. </div> <div>그리고 저희는 전세 안고서 집을 팔려고 집을 내놨구요.</div> <div>집을 보러온다는 사람과 약속을 하고 세입자분께 연락을 드리니...</div> <div> </div> <div>"아니 젊은 사람이 시간 얼마줬다고 벌서 다른 사람에게 팔라고 하느냐. 절대 집 안보여줄꺼다. 나에게도 권리가 있다. 그러니 그 사람들 와도 집을 안보여 줄테니 알아서 해라"</div> <div>라고 합니다.</div> <div>아마도 젊으니 얕잡아 보는것 같습니다. </div> <div> </div> <div>참고로 사시는 분은 본 계약자가 아니고 그분 언니의 명의로 계약을 한 상태구요.(아마도 세금문제인듯 합니다.)</div> <div>사시는 분은 계약자의 동생 부부입니다. 그분 원룸 사업을 하신다고 들었는데... 흠...</div> <div> </div> <div>이거 어떻게 해야 할까요??</div> <div>머리가 아프네요 ;ㅁ;</div> <div>전문가분들 도와주십시오!!!!</div>
만약 당신이 독립투사의 후손이라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그러니까 예를 한번 들어볼께...
흠... 당신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께서 원래는 무척이나 부자셨어... 그런데 자신의 나라가 일본에게 넘어가버린거야. 분노하시고 터질듯한 가슴을 추스리지 못해 직접 자신의 가계를 들고서 의병을 일으키시고 군자금을 대시고 직접 게릴라전을 하면서 의병장으로 활동하셨다.
물런 멋지겠지... 떳떳할꺼고... 그렇죠?
그 여파로 잘나가던 가세는 국가를 위해 다 써버렸고 자신의 부인과 함께 도망다니다 부인은 수차례 경찰서가서 폭행에 고문당하고 아이들은 돈이 없어 배우기는 커녕 밥조차 제때 연명하기 힘든 생활을 했다면...??
당신은 정말 떵떵거리며 그리고 지금 죽은 이후에도 정말 잘~ 살고 있는 친일파의 자손이 되렵니까? 아니면 배울때 못배우고 먹을때 못먹어 아주 낮은 삶을 사는 그런 독립군의 자손이 되렵니까?
갑자기 이런게 자신의 문제로 닥쳐 왔다면... 만약 독립군을 선택한 할아버지께 "정말 밑바닥 인생을 펼치고 있는 자손들의 모습을 보세요. 할아버지께서 괜한일 하셨어요. 이게 독립군 자손의 실상입니다!"라고 얘기 하겠습니까? 아니면... "그래도 할아버지가 자랑스럽습니다. 할아버지께서 계셨기에 지금의 우리나라가 독립된 우리나라가... 대한민국이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라고 얘기할래요?
사실... 잘모르겠네요.
저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께서 저런일을 하셨다네요.
독립군의 자손이란게 저였더군요. ^^
어짜피 되돌릴수 있는게 아니잖습니까? ^^ 뭐가요? 친일파로 떵떵거리며 살수 있는 기회를 돌리고 싶냐구요? 아뇨~~!
우리나라가 해방되지 못할께 아니잖냐는 말입니다. 물런 할아버지 같으신분이 계셨기에 말이죠.
사실 많이 부끄럽습니다.
역사학을 배우는 손자가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니 말이죠.
물런 친가나 외가나 다 반씩 피를 물려 받았으니 같게 생각해야 하는데 말이죠... ^^
할아버지... 전 할아버지가 자랑스럽습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께서 저희에게 아주 좋은 세상을 자신의 목숨과 바꾸어서 선물하셨으니까요... 
잘살께요. 
그리고 떳떳하게... 독립군의 자손의 이름에 걸맞는... 떳떳한 손자가 되겠습니다.
할아버지... 사랑합니다.
- 2004. 8월 29일 늦은 11시... 외고손 순찬올림 -
권석도(權錫燾) - 1880. 9. 9~1946. 4. 6 
경남 함양 - 의병 
서훈내역 - 독립장(86) 
공적내역 - 경남 함양(咸陽) 사람이다.
일제가 을사조약을 늑결하고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자 크게 분노하여 김동신(金東臣) 의병진에 참가하였다가 고광순(高光洵) 의병진과 합류하였다. 1907년 10월 11일 고광순이 전사하자 남은 의병을 이끌고 계속 활동하였다. 동년 12월 21일 경남 하동군 화개면에서 박인환(朴仁煥) 의병진과 합류하였으며, 박인환 등의 추대를 받아 의병장이 되었다.
이후 그는 지리산을 거점으로 하동·함양·구례 등지에서 항쟁하였다. 1908년에는 하동군 일대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던 중 동년 6월 26일 하동 일본수비대에 피체되었다. 하동주재소에 구금 중 그는 1908년 7월 9일 탈주에 성공하여 도피하다가 일경의 추격을 받아 흉부에 총상을 입고 산속에 은신하였다가 친척집에서 치료를 받았다.
1909년 3월 그는 다시 이학로(李學魯) 의병장과 합세하여 진주 서면 동양곡(東陽谷)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며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09년 5월 하순 박매지(朴每之)·이학로 등 수명과 함께 진주시 산기동(山岐洞)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일본수비대와 마주쳐 피신하였다. 그후 행상으로 변장하고 은밀하게 활동을 계속하던 그는 1909년 10월 10일 진주에서 다시 일경에 피체되고 말았다. 
그는 결국 1909년 12월 15일 부산지방재판소 진주지부에서 종신징역형을 받고 대구공소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종신형이 확정되었다. 모진 옥고를 치르던 그는 소위 일황의 특사로 재감 6년 9개월 만인 1916년 6월 24일 가출옥하였다.
그는 1918년 2월 일경으로부터 다시 강도사건의 누명을 쓰고 함양경찰서에 피체되었으나, 10여개월간 옥고를 치르다가 1918년 12월 12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출옥하였다. 이 당시 그는 허위자백을 강요하는 일경의 고문으로 반신불수가 되어 회복되지 못하였다고 한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일경의 소위 요시찰인 감시가 극심하자 그는 가족과 함께 포항·울진 등 낯선 고장을 전전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6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註·판결문(1910. 2. 19 대구공소원)
·판결문(1918. 12. 12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진주경찰서장 정보보고(1908. 6. 30, 7. 9, 1909. 10. 11∼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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