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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ID : humordata_257460
    작성자 : 거참..
    추천 : 7
    조회수 : 1584
    IP : 218.147.***.30
    댓글 : 4개
    등록시간 : 2005/07/18 18:48:06
    http://todayhumor.com/?humordata_257460 모바일
    [퍼온글] 사료로 본 원균........
    사료로 본 원균... 수정판 v1.2입니다.



    사료로 본 원균... 수정판 v1.2입니다.

    보시고 퍼가시려면 퍼가세요...

    공홈들에서 제 예전 버전이 떠돌고 있더군요

    ---------------------------------------------------------------

    원균의 일생을 사료들을 중심으로 말해보죠...

    일단 원균은 애초부터 과거시험에서 부정을 저지른 인물입니다.

    증거사료를 보여드리죠..

    명종실록 명종 19년 6월 21일//사인 최옹이 함경북도 병사 곽흘 등의 자제의 무과 응시에 관하여 아뢰다

    사인(舍人) 최옹(崔翁)이 삼공의 뜻으로 아뢰기를,
    “함경북도 병사 곽흘(郭屹), 평안 병사 이택(李澤), 경상우도 병사 원준량(元俊良)이 그들의 자제(子弟)를 무과(武科) 초시(初試)에 응시하도록 허락한 일은 지금 추고(推考) 중에 있습니다. 신들이 듣건대, 과거 사목(科擧事目)이 문과는 상세한데 무과는 일정한 규정을 세우지 않은 까닭에 그 자제들이 군관(軍官)으로서 구례대로 응시하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법을 어기고 거짓으로 응시한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니니, 상께서 참작하여 처리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곽흘과 이택의 벼슬살이는 그래도 그 중에서 잘한 점이 있다 하겠으나, 원준량은 갖가지로 재물을 긁어 들여 군졸들이 원망하고 괴로와하면서 날마다 파직되어 가기만 고대하였다. 그런데도 윤원형 등이 일찍이 그의 뇌물을 받았기에 파직되어 갈릴까 염려되어 이렇게 임금을 속이어 아뢰었으니, 앞으로 저런 재상을 어디에 쓰겠는가.】

    【원전】 20 집 698 면
    【분류】 *인사-선발(選拔) / *역사-사학(史學)

    원준량은 원균의 아버지입니다. 당시 원준량의 아들 중 과거 응시 가능 연령자는 단 둘... 원균과 그 동생 원연뿐인데... 원연은 문과지망생이었습니다... 답이 나오죠?


    어떤 이들은 원균이 북방에서 세운 전공이 크다고 하는데 말도안되는 소리입니다.

    원균이 북방에서 세웠다는 전공의 진실이 뭘까요?

    원균의 행장에서는 원균이 조산보만호 재직중 전공을 세워 부령부사로 특진했다고 하는데.... 문제는 원균이 전공을 세웠다는 기록도, 부령부사 등의 지위를 지냈다는 말이 공식기록에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아마 니탕개의 난 즈음인데 여러 단어로 실록 검색해봐도 안나오더군요...) 특진 등의 인사기록은 반드시 남게 되어있는데... 공직수행 기록이 개인기록에는 등장하지만 공식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다면 과연 진실은...?

    녹둔도 전투 이후 조정에서는 당시 함경 북병사 이일의 주관으로 여진족의 시전 부락을 토벌하게 합니다. 이 토벌작전을 그린 전쟁기록화가 전해지고 있는데 <장양공정토시전부호도>라고 합니다. 이 그림에 당시에 참전했던 여러 무관들의 이름이 보이는 데 원균의 이름도 보입니다.(신각, 서예원, 원호, 이순신 등도) 하지만 웃기는 건 특별한 전공을 세웠다는 소리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원균의 당시 보직은 좌위소속의 1계원장입니다. 계원장의 직책은 뒤에 대기하고 있다가 적의 공격이 있을 경우, 예하부대 이끌고 지원하는 임무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시전부락토벌전에서 이일이 이끈 조선 기병대는 새벽에 공격을 가해 순식간에 여진족들을 쓸어버리고 수급 380여급을 거두었습니다.


    북병사(北兵使)의 계본(啓本)에, 경원(慶源)의 번호(藩胡) 중 녹둔도(鹿屯島)에서 작적(作賊)한 시전 부락(時錢部落)에 이 달 14일에 본도(本道)의 토병(土兵) 및 경장사(京將士) 2천 5백여 명을 거느리고 길을 나눠 들여보내, 이경(二更)에 행군하고 삼경에 강을 건넜다가, 15일 평명(平明)에 그들의 궁려(穹慮) 2백여 좌(坐)를 분탕(焚蕩)하고 머리 3백 80급(級), 말 9필, 소 20수(首)를 참획(斬獲)하고 전군(全軍)이 무사히 돌아왔다고 하였다.

    【선조실록 1588/01/27 기사】

    다음해 무자년(戊子 1588 선조 21년) 1월에 길주진(吉州鎭) 이북 온성진(穩城鎭) 이남에 거주하는 1등 토병(土兵), 2등 토병과 행영(行營)의 군사와 경장사(京壯士)와 경흥진의 관할 하에 있는 4보의 군마 등 모두 2,700여 명을 징발하고, 회령 부사(會寧府使) 변언수(邊彦琇)를 좌위장(左衛將)으로 삼고, 온성 부사(穩城府使) 양대수(楊大樹)를 우위장(右衛將)으로 삼아, 군사와 병마를 부서로 나누어 편성한 다음에, 그들이 생각지도 못한 때를 틈타서 길을 나누어 모두 진군시켜, 군사를 숨겨 두만강을 건너가서 새벽녘에 적의 소굴을 습격하였는데, 적호(賊胡)들이 모조리 무리를 지어서 나와서 장차 포위망을 돌파하고자 하였으나, 관군이 힘을 합쳐서 공격하고 힘껏 싸워서 모두 섬멸하였다. 적의 2백여 채의 가옥을 불태우고, 오랑캐의 머리 383급을 베었다.

    【제승방략(制勝方略) 무이보(撫夷堡)의 고사(故事)에서】

    1월. 북병사 이일(李鎰)이 순행하다가 경흥(慶興)에 이르러 우후 김우추(金遇秋)를 파견하여 기병 4백 명을 거느리고 언 강을 건너 새벽에 추도(楸島)의 반호(叛胡)를 습격하여 33급을 베었다. 이어 계속 길주(吉州) 이북 각 진의 기병 2천여 명을 동원하였는데, 회령 부사 변언수(邊彦琇), 온성 부사 양대수(楊大樹), 부령 부사 이지시(李之詩)가 군사들을 통솔하였다. 적들이 모르게 강을 건너 밤에 시전(時錢)의 반호(叛胡)를 습격하여 가옥 2백여 채를 불태우고 3백 80여 급을 베었다.

    【선묘보감(宣廟寶鑑) 무자년(1588) 조(條)에서】


    원균이 뭘 할 수 있었을까요? 그냥 조선군이 일방적으로 여진족들을 짓밝아버린 순식간에 끝난 전투인데.... 계원장 직책으로는 그냥 뒤에서 대기만 하면서 끝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는 동안 원균은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전라좌수사가 됩니다. 그러나 곧 잘리죠... 고을 수령으로 있을 때, 사간원의 건의 고적이 거하다는 즉, 근무성적이 나쁘다는 이유로...

    《 선조 025 24/02/04(신미) / 간원이 초수된 전라 좌수사 원균의 체차를 청하다 》

    사간원이 아뢰기를,
    “전라 좌수사 원균(元均)은 전에 수령으로 있을 적에 고적(考積)이 거하(居下)였는데 겨우 반 년이 지난 오늘 좌수사에 초수(超授)하시니 출척 권징(黜陟勸懲)의 뜻이 없으므로 물정이 마땅치 않게 여깁니다. 체차를 명하시고 나이 젊고 무략(武略)이 있는 사람을 각별히 선택하여 보내소서.”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원전】 21 집 477 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원균의 고적이 거하를 맞은지 반년밖에 안 됐는데 수사직에 놓는 것은 부당하다는 사간원의 건의는 개인의 능력부족보다는 규정상 임용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고적, 즉 인사고과에서 거하, 즉 3급 평가를 받으면 해당자는 당상관일 경우 즉각 파직, 당상이 아닐 경우 적어도 인사고과 평가 2회 기간 동안은 승진할 수 없습니다.
    또한 여기서 유의해서 봐야 할것이 초수(超授), 승진했다는 소리네요.... 이 인사정책에 뭔가 상당한 야료가 있었다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1년 몇개월 후 원균은 경상우수사로 임명됩니다.

    어떤 분들은 원균이 능력이 없었다면 어떻게 경상우수사가 될 수 있었느냐고 하시는데... 전공도 없고 인사성적도 안좋은 사람이 제대로 된 임무수행능력이 있을까요? 다른 능력입니다. 그 대답은 당시 조정 대신들 명단이랑 원균의 인맥을 살펴보시면 답이 나옵니다.

    당시 명문가인 원주 원씨 출신에 부친은 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윤두수, 윤근수 형제와는 동서지간이었고, 윤두수의 맏손자는 선조의 부마였습니다. 그것도 선조가 가장 총애하던 인빈 김씨의 소생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원균이 당시 임란 당시 싸우다 패했다고 하는데... 웃기는 건 일본측 기록(!)에는 조선 수군과 싸워서 이겼다는 승전기록이 없고, 그저 대마도와 부산포만 왕복했다고 합니다.

    또한 어떤 이는 원균이 소집령을 내렸으나 군사들이 소집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진실은..?


    과연 원균은 초반에 병사를 소집하려 했으나 부하들이 따르지 않았나?

    천만에요… 경상좌수사 박홍은 병사를 소집했습니다. 완벽한 기습으로 부산포, 다대포, 경상좌수영이 함락되었어도, 박홍은 병력 소집령을 내렸고 1,500여의 병사를 당일 소집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 동래로 구원하려 가보니 왜군의 수가 너무 많아 (고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1진 전투병만 17,800, 하인과 인부, 수부 포함하면 그 두 배가 넘음)전의를 잃고 달아났습니다. 동래성은 함락되었죠…

    왜군의 직접적인 침입을 받은 경상좌수영도 병력소집이 가능했는데 침입을 받지않은 경상우수사 원균이 당시 병력을 소집하려면 할 수 있었다는 소리입니다.

    경상좌수영 말고 다른 예들을 들어볼까요?

    동시기 병력소집 문제는 경상좌병사 이각의 밀양에 모인 13읍 군사, 대구에 모인 문경 이하 제읍의 군사, 전라좌수영 이순신의 수군, 도순변사 신립이 충주에서 지휘한 군사 등등을 보면, 이일과 신립이 서울에서 직할병력 모으기 어려웠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지방에서 동원예정병력이 집결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전혀 없습니다. 병력은 모였는데 이각처럼 장수가 도망가거나, 이일처럼 서울에서 장수가 늦게 내려와 병력이 해산했다는 사료는 있습니다. 소집령이 내려지면 해당 병역자원 상당수가 제대로 집결했다는 뜻입니다

    황당한 사례지만 실제로 임란초기에 경상도에서 아군이 아군 기병대를 전멸시킨 사건이 있었죠. 용궁현감 우복룡이 영천 길가에서 점심을 먹는데 하양 군사 수백명이 말타고 지나갔다고 괘씸해서 다 죽여버린 사건입니다. 용궁현은 상주 인근, 하양군은 경산 인근에 있었습니다. 하양군사들은 지휘하는 장수가 없는데도 병사들이 집결해 지정된 위치로 제대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남쪽에 있는 군사는 북쪽으로, 북쪽에 있는 군사는 남쪽으로 움직여 좀 그렇기는 합니다만, 병력동원체계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병력은 고을 단위로 집결해 이동합니다. 군사들 각자 개별 이동이 아니죠. 고을 단위라면 몰라도 개인 단위로는 빠지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각 고을에서는 할당된 숫자를 채워서 집결지로 보냅니다. 안 그러면 고을수령이나 병방이 처형당합니다. 실제로 임란 중 1594년 1월 남평과 남원 도병방이 수군 결원 많이 되었다고 처형당합니다.

    어느 고을 병력은 며칠까지 어디로 집결해 누구의 지휘를 받고 등등 이런 증거자료들이 있는데, 구태여 경상우수영만 병력동원체계가 제대로 작동 안했다는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까?

    병력동원체계가 실제로 작동했는가 하는 문제는, 열거한 사례에서 보시다시피 실제로 작동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위에 열거한 예들에서 보이듯이 경상좌수영, 경상좌병영, 경상순변사 지정 병력은 분명 소집에 응해 제대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경상우수영 병력만 소집에 응하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경상우수영만 소집령을 내리지 않았다거나, 소집령을 내려 병력이 집결했는데 이후에 흩어졌다고 보는 편이 훨씬 합리적이겠습니다. 설마 경상우수영 관할지역 사람들만 특별히 인간성이 더럽다거나 병역기피자만 모인 지역이라고 할 수 없겠죠? 다 똑같은 경상도 지역 아닙니까? 경상우수군, 즉 지역민들에게 책임을 묻기 전에 경상우수사 원균에게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를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증거기록은 많죠.

    난중잡록과 연려실기술의 기록을 보면 정말 뒤집어집니다.

    ○ 경상도 연해의 왜적이 거제도(巨濟島)로 향하니 원균(元均)은 우후(虞侯)한테 군영을 지키게 하고는 배천사(白川寺)까지 달려갔는데, 우리나라 어선을 보자 왜적의 배인 줄로 생각하고 창황히 달아나 노량(露梁)으로 물러났다. 우후가 그 소식을 듣고 나가길 독촉하니 온 성 안의 늙은이와 어린이들이 어지러이 길을 꽉 메웠다. 그러자 우후는 다함께 피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활을 당겨 마구 쏘아대자, 임신한 두 여인이 한 화살에 맞았는가 하면 그 밖에도 무고하게 죽은 자가 퍽 많았고, 온 섬의 장병들이 모두 소문만을 듣고도 흩어져 버렸다. 남해 현령(南海縣令) 기효근(奇孝謹)은 창고를 불사르고 달아났는데, 왜적은 아직 남해 땅을 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난중잡록]


    처음 적병이 한 방향으로 거제를 향하였다. 경상 우수사 원균이 우후(虞侯)를 시켜 병영을 지키게 하고 백천사(白川寺)에 달려가서 관망하다가 우리나라 어선을 적선인 줄 알고 당황하여 노량(露梁)으로 물러났다. 우후가 그 소문을 듣고 성중 노약자(老弱者)를 나가라고 독촉하니 죽은 자가 많았다. 어느 섬의 군사가 그 형세를 보고 모두 흩어졌다. 해남 현령 기효근(奇孝謹)은 창고를 불태우고 달아났다. 원균은 적이 여러 성을 연달아 함락시켰다는 말을 듣고 주사(舟師)를 인솔하고 가덕도(加德島)로 향하다가 적선이 바다를 뒤덮으며 오는 것을 보고 퇴각하여 돌아오니 여러 장수도 차차 흩어져 갔다. 원균이 육지에 올라 적의 칼날을 피하려 했다. 기문(記問)에는 전선 백여 척과 화포와 군기를 다 바다에 빠뜨리고 홀로 비장(裨將)을 데리고 곤양으로 달아났다 했다.

    [연려실기술]

    허허허… 원균은 겁먹고 도망가고, 참모장인 우후가 백성들 피난시키면서 뒷수습했다네요…. 수사등이 튄 걸 안 모든 병사들이 다 흩어지고… 문제는 그 다음의 행적입니다. 경상순영록에 따르면 김성일이 원균을 윽박질러서 다시 성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리고…



    ○ 삼도(三道)의 해군 함대[舟師]가 가덕도(加德島) 앞바다까지 왜적을 추격하여 크게 이기다. 이에 앞서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은 왜적들이 여러 성을 연달아 함락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해군 함대를 이끌고 가덕도로 향했는데, 왜적의 배가 바다를 덮고 있는 것을 보자 마침내 퇴각하여 돌아오고, 여러 장수들도 점점 흩어져 가버렸다. 원균은 아군의 전함을 다 침몰시키고는 육지에 올라가서 왜적을 피하려 하였으나, 옥포만호(玉浦萬戶)이운룡(李雲龍)이 안 된다고 하여 마침내 중지하였다. 원균이 이운룡 등의 몇 척의 배와 함께 노량(露梁)에 퇴각해 있는데 적병이 뒤따라 좇아오자, 이운룡이 전라도의 해군에 구원을 청하고자 곧 작은 배 하나를 타고 달려갔다.

    답이 나오죠? 도망쳤던 원균… 슬그머니 남은 병사랑 배 수습해서 출동했다가 겁먹고 도망쳐서 전함들 다 자침시키고… 장수들도 다 흩어집니다. 그리고 아주 도망치려다가 이운룡이 뜯어말려서 이순신에게 구원을 청한 것이죠…

    덤으로 제가 제일 열받는 것은 임란 당시 참전 일본 장수 중에서 수군을 보면 그들이 조선에 온 것이 4월 25일이 이후라는 것입니다. 수군 대부분이 4번대와 5번대 소속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동안 제대로 된 수군의 호위없이 수송선들이 일본과 조선을 오갔다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가장 쇼킹한 사실은 위의 1진의 고니시의 병력 수송하는데 동원한 배들이 600여척… 이상하게 많지 않습니까? 결론은 다 작은 배들이라는 소리입니다. 다 작은 배는 아니었겠지만 절대 다수가 소(小) 세키부네와 고바야 등으로 구성되어진 허접한 수송함대들인데… 그것들이 부산포와 대마도 사이만 오가며 가토 기요마사의 2번대와 구로다 나가마사의 3번대를 유유히 다 수송했다는 소리입니다.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왜란 개전일로부터 원균이 맘에 제대로 먹었다면, 즉각 동원가능한 판옥선 40여척, 그리고 소집령 내려서 동원가능한 100여척의 판옥선으로 비무장의 작은 왜수송선단을 대상으로 말그대로 대학살극을 벌일 수 있었다는 겁니다.


    더 이상은 말하기 싫네요… 이후 원균은 이순신의 함대를 만납니다. 그리고…


    五月初一日。至固城之蛇梁。
    5월 초하루 고성 사량진에 이르렀다.

    時賊勢甚急。嶺南沿海諸鎭。無暇整軍。惶怯失措。皆自沈其戰船。
    이때 적의 형편은 파죽지세와도 같이 매우 급하여 영남 연해의 여러 진들은 군기를 바로잡을 겨를도 없어 두렵고 겁이 나 조치를 잘못 취했으며, 모두 제 스스로 자기네 전선을 바다에 가라앉혀 버리고 말았다.

    元均亦以一夾船。竄伏于赤梁島。聞舜臣至。自三川來見舜臣。
    원균 또한 협선 하나를 적량도에 잠복시켜 놓았다가 순신이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삼천으로부터 와서 순신을 뵈었다.

    泣曰。令公令公。吾固苦待之矣。吾之戰船。無一隻在。此將何爲。
    울면서 말하기를 "영공, 영공! 저는 실로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제게는 이제 전선 한 척도 없으니 '이 불쌍한 장수'가 여기서 무얼 할 수 있겠습니까!"하였다.

    舜臣慰撫之。且曰。此臣子報國盡瘁之秋也。
    순신이 그를 위무하고는 "여기 신하들이 보국함에 있어 몸이 여위도록 마음과 힘을 다 할 때입니다."라고 말하였다.

    遂留軍一日。
    드디어 하룻동안 군사를 머물게 했다.

    -은봉전서-


    아하하하! 지금 자판을 두들기면서도 미쳐가고 있습니다. 이 다음은 옥포해전이고…거기서부터 원균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는 잘아실테죠?

    뒷전에 있다가 전라좌수군이 적함들 깨부수자(撞破) 달려들어서 목자르기 하고, 전공 빼앗기 위해 아군에게 활을 쏴서 왜군이 입힌 피해의 두배를 전라좌수군에게 입힙니다. 문제는 원균이 용감하게 돌격했다면 뒤에서 활과 대포만 쏘고 있는 전라좌수군의 공격이 경상우수군을 때렸다는 기록이 나와야 정상인데... 그런게 안나오거든요.... 덤으로 전투 후, 원균은 물에 빠져 죽은 시체를 건지고 다른 수군들에게 수급을 조금씩 얻어서 오히려 다른 장수들보다 많은 수급을 조정에 바치게 됩니다. 그러자 조선수군은 한 숟갈씩 얻은 밥이 온공기보다 오히려 많다며 원균을 비웃습니다.

    안방준의 은봉전서의 내용입니다... 안방준은 당시 경상도에서 활동한 의병장이었으며 그의 당파는 원균의 당파인 서인(!)이었습니다. 보통 다른 기록자들과는 달리 말그대로 당시 현장에서 활동했던 사람이기에 그 기록은 상당히 신빙성이 높습니다. 또한 안방준과 원균과의 관계도 보통 관계가 아닙니다.

    아래는 원문입니다.

    元均則於前後之戰。頓無尺寸之功。而當諸將破賊之時。隨後取馘。諸將又各以其所獲。分載於均。均之所得。最多於諸將。(원균이 어떻게 수급을 모았는지 아시겠죠?)

    故其時陣中。有收匙飯多本飯之說。
    (진중에 퍼진 말입니다.)

    덤으로 당시 기록상으로는 원균이 자신의 소집에 응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장수는 거제현령 김준민 뿐입니다. 그나마도 김준민은 병사들 거느리고 육전벌이고 있었던 상황이고....

    그 다음의 일들은 모두 다 아실 겁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길 그 때 원균을 속이고 이순신이 몰래 장계보냈다고 하죠? 선조수정실록이 출처인데...


    "처음에 원균(元均)이 이순신에게 구원병을 청하여 적을 물리치고 연명(聯名)으로 장계를 올리려 하였다. 이에 순신이 말하기를 ‘천천히 합시다.’ 하고는 밤에 스스로 연유를 갖춰 장계를 올리면서 원균이 군사를 잃어 의지할 데가 없었던 것과 적을 공격함에 있어 공로가 없다는 상황을 모두 진술하였으므로, 원균이 듣고 대단히 유감스럽게 여겼다. 이로부터 각각 장계를 올려 공을 아뢰었는데 두 사람의 틈이 생긴 것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원전】 25 집 617 면
    【분류】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인물(人物)
    선조 25년(1592년) 6월 1일(기축)

    원균이 자신이 벌인 온갖 뻘짓 들키기 싫어서 이순신에게 사정했고, 이순신은 그걸 거부하고 곧이 곧대로 올렸다는 소리네요....

    말나온 김에 수정실록이 편찬된 계기를 말하겠는데, 당파싸움이 원인이라 생각하시나요? 천만에요. 임진왜란으로 선조와 조성이 피난 가는 도중 다수의 사초가 손실된 것이 원인입니다. 그래서 수정실록은 당시 활동했던 사람들의 개인기록들을 수집해서 기본 사료로 삼았으며, 그 내용은 실록을 보충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수정실록은 신빙성이 부족하다는 것이 현재의 정설이며 보충자료로만 사용합니다.
    여담으로 수정실록을 보면 원균은 선조실록보다 더 흉물로 기술하고 있습니다.

    수정실록이 아닌 선조실록을 보면 이 사건에 대한 이산해의 발언이 나오는데 날짜가 옥포해전 직후가 아니라 정유년 1월 이순신을 잡아죽이려고 선조가 광분하던 달입니다.

    선조수정실록과의 날짜 차이가 나지요? 선조수정실록은 명확한 시간이 기술되어 있지 않는 한, 대략의 달을 정하고 그달 1일로 표기합니다. 그 증거로 임진왜란 개전시의 수정실록 기록을 보면 대부분 그달 4월 1일자 기사로 표기되었습니다.

    옥포해전 장계에 경우 옥포 해전이 5월 7일이고, 충무공이 장계를 올린 날이 5월 10일입니다. 이것은 난중일기와 선조실록 기타 여러 자료에서 교차검증됩니다. 저 실록의 신빙성이 좀 부족하지요?


    장계의 문제로 넘어가서 말하자면...

    임진년 초반 통제사가 없을 때는 각 수사들이 따로 올렸습니다. 연합작전이라도 단독장계입니다. 한산해전에 대한 충무공 장계 외에 원균의 장계도 있었습니다.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충무공 장계 내용을 보면 다른 수영에서 작전한 내용은 총괄적 언급에만 머물렀습니다. 전라우수사나 경상우수사가 따로 장계를 보낼 것을 감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임란 중 연명장계의 예는 계사년 통제사 이순신과 충청수사, 전라우수사가 함께 올린 예가 있습니다. 내용은 왜적에게 포로가 됐다가 탈출한 경상우수영 소속 군관 제만춘에 대한 심문과 이에 대한 대책입니다. 특이하게 경상우수사 원균은 연명에서 빠졌습니다. 통제사 직제가 설치됐는데도 특정 사안에 대해서는 연명장계가 원칙인지 모르겠습니다. 원균이 기분 나쁘다고 거부해서 통제사가 다른 수사들과 같이 연명으로 올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 실정을 알리는 중요한 내용이거든요.


    이후 원균이 벌인 난동은 장난 아닙니다. 병사들 굶겨죽여, 매질해 죽여, 피난민 처녀 끌어들여, 위에서 보내온 무기 가로채, 원균과 사이 안좋던 이순신의 난중일기 기록일까요? 실록과 연려실기술 등의 기록입니다. 난중일기보면 더 황당하죠...
    이억기, 구사직 등 다른 수사들도 다 원균 싫어합니다. 심지어는 원균 부하인 이영남, 이의득 등도 다 원균 싫어했습니다.... 원균은 한마디로 '따'였습니다.

    하도 원균이 설치다보니까 이순신은 조정에 원균을 자르던지 자신을 자르던지 양자택일 해달라고 장계를 보냅니다. 결과는 원균이 충청병사로 전출당하죠.. 원균은 충청병사로 가면서도 행패부리고 갑니다.


    충청병사로 갔더니 만만치 않은 사고를 치고 다닙니다.



    선조 066 28/08/15(을묘) / 사헌부에서 원균의 파직을 건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다 》

    사헌부가 아뢰기를,
    “충청 병사(忠淸兵使) 원균(元均)은 사람됨이 범람(泛濫)하고 게다가 탐욕 포학하기까지 합니다. 5∼6월에 입방(入防)한 군사를 기한 전에 역을 방면하고 그 대가로 씨콩을 거두어 다 농사(農舍)로 실어 보냈습니다. 또 무리한 형벌을 행하여 잔혹한 일을 자행하여 죽은 자가 잇달고 앓다가 죽는 자도 많아서 원망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온 도에 가득합니다. 이와 같은 사람은 통렬히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철원 부사(鐵原府使) 심원해(沈源海)는 사람됨이 탐욕스럽고 용렬합니다. 환자곡(還上穀)의 수효를 속여 보고하여 사사로이 사용하였으며, 소를 잡아 민간에서 재리(財利)를 꾀하였습니다. 심지어 형을 위해 경내에 집을 경영하고 전토를 널리 차지하기까지 하였으니 듣고 보는 이들이 경악하고 있습니다. 파직하소서.
    봉산 군수(鳳山郡守) 박응인(朴應寅)은 전에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있을 때에 백성에게 거두어들이는 것이 한이 없고 비용이 너무 과람하여 길가의 거읍(巨邑)이 탕진되어 텅 비게 하였으니 체차(遞差)하소서.”

    【원전】 22 집 546 면
    【분류】 *농업-경영형태(經營形態) / *구휼(救恤)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 *군사-군역(軍役)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선조 071 29/01/12(기묘) / 사헌부에서 충청 병사 원균의 추고와 최덕순의 종사관 칭호를 박탈하도록 청하다 》

    사헌부가 아뢰기를,
    “각도의 병사(兵使)에게는 본래 종사관(從事官)이 없는 법인데, 충청 병사(忠淸兵使) 원 균(元均)은 전 군수(郡守) 최덕순(崔德巡)을 종사관의 명칭을 붙여 수행시킬 것을 계청하여 거느리고 갔으니, 이는 법규에 어긋나는 처사로서 지극히 잘못된 것입니다. 덕순은 바야흐로 도내에 우거(寓居)하고 있다가 연줄을 이용해 간청하여 이 소임을 맡게 되었으나 별로 하는 일도 없이 열읍(列邑)에 전식(傳食)하므로 많은 폐단을 끼치고 있습니다. 원균을 추고하고 최덕순의 종사관 칭호를 없애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사는 추고할 수 없다. 칭호를 없애는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최덕순은 음관(蔭官)으로서 추솔하고 비루하여 한 가지 점도 취할 것이 없다. 임진란 때 가평 군수(加平郡守)로 있으면서 우리 나라의 피난민을 죽여서 머리를 깎고 이마에 문신을 새겨 왜인의 형색을 만들어 행재소(行在所)에 거짓으로 보고하고 상공(上功)을 노리다가 여러 사람이 목격하여 정상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그에게 형이 가해지지 않았으니, 통탄함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대관(臺官)의 이 논란 역시 너무 가벼운 것이다.】】

    【원전】 22 집 628 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관리(管理)


    이건 너무 길어서 상당산성부분만 발췌하겠습니다..^^



    《 선조 084 30/01/27(무오) / 수군의 작전 통제권을 가지고 대신들과 논의하다 》

    상이 이르기를,
    “원균은 자기 소견대로만 하고 고칠 줄을 모른다. 체찰사가 비록 논리적으로 개유(開諭)해도 고치지 않는다고 한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대개 나라를 위하는 데는 성심이 있습니다. 상당 산성(上黨山城)을 쌓을 때 움막을 만들고 자면서 역사를 감독해 수축하였습니다.”
    하고, 이산해가 아뢰기를,
    “상당 산성을 수축할 때에 위력으로 역사를 감독했기 때문에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하고, 이 정형이 아뢰기를,
    "상당 산성의 역사는 비록 이루어졌지만 도로 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원균이 온갖사고 다치고 다녀도 선조가 다 막아주죠? 제대로 한일이 있나요? 군사들 뇌물받고 풀어줘. 인사부정 저질러, 성 샇으라고 했더니 싸은 성이 비에 무너지게 부실공사해...


    그러고도 나중에 이순신 탄핵시에 자신이 통제사라면 왜적들을 내쫒을 수 있다고 장계를 올려 통제사가 됩니다.

    《 선조 084 30/01/22(계축) / 전라도 병마 절도사 원균의 서장 》

    전라도 병마 절도사 원균의 서장은 다음과 같다.
    “신이 중요한 임무를 위임받아 남번(南藩)을 지키고 있으면서 노둔하나마 힘을 다하여 만세의 원수를 갚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해도 몸이 이미 매우 쇠약하여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많지 못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임금을 우러르면서 단지 통곡만 할 뿐입니다. 지금 변방 일에 어려움이 많아 군사를 일으키고 대중을 움직이기에 겨를이 없습니다. 여러 고을에 신칙하여 군마를 정제하여 신이 사졸에 앞장서서 일거에 섬멸하려 합니다.
    다만 수륙(水陸)의 일을 헤아려 말한다면, 임진년 초기에 육지의 적이 기세를 떨쳐 순월(旬月) 사이에 평양까지 침입했으나 해상의 적은 해를 보내도록 패하여 끝내 남해(南海) 이서(以西)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니, 우리 나라의 위무(威武)는 오로지 수군에 달려 있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수백 명의 수군으로 영등포(永登浦) 앞으로 나가 몰래 가덕도(加德島) 뒤에 주둔하면서 경선(輕船)을 가려 뽑아 삼삼 오오 짝을 지어 절영도(絶影島) 밖에서 무위를 떨치고, 1백 여 명이나 2백 명씩 대해(大海)에서 위세를 떨치면, 청정(淸正)은 평소 수전(水戰)이 불리한 것에 겁을 먹고 있었으니,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것이라 생각됩니다. 원하건대 조정에서 수군으로써 바다 밖에서 맞아 공격해 적으로 하여금 상륙하지 못하게 한다면 반드시 걱정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는 신이 쉽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에 바다를 지키고 있어서 이런 일을 잘 알기 때문에 이제 감히 잠자코 있을 수가 없어 우러러 아룁니다.”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원균은 통제사가 됩니다. 하지만 자기가 말한 것을 했나요? 안했습니다. 또한 안방준의 은봉전서에 아주 기막힌 내용이 있습니다.


    원균은 나의 중부(仲父) 동암공(東巖公)【안중홍(安重洪)으로 세상사람들이 동암처사라 불렀다. 후에 효행으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다】의 처 원씨의 친족이다. 그가 통제사로 부임하던 날, 중부를 찾아와 인사하고 말하기를,
    『나는 이 직책이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직 이순신에게 치욕을 갚은 것이 통쾌합니다.』
    하였다. 중부께서 말하기를,
    『영공(令公)이 적을 격파하는데 마음을 다하여 공업(功業)이 이순신보다 두드러질 수 있다면 치욕을 씻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한갓 이순신을 갈아치운 것으로 통쾌히 여기면 어찌 치욕을 씻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니, 원균이 대답하기를,
    『나는 적을 만나 싸울 때 거리가 멀면 편전(片箭)을 쓰고 가까우면 장전(長箭)을 쓰며, 육박전이 벌어지면 칼을 사용하고 칼이 부러지면 정(곤봉)로 싸우니, 이기지 못할 리 없습니다.』
    하였다. 중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기를,
    『대장이 되어서 칼과 정을 사용하는 데 이른다면 옳겠는가?』
    하였다. 원균이 돌아가자, 중부께서 나에게 이르기를,
    『원균의 사람됨을 보니 큰일을 하기는 글렀다. 조괄(趙括)과 기겁(騎劫)도 필시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하고 오래도록 탄식하였다. 남쪽의 사람들은 지금도 이 일을 말하면 팔뚝을 걷고 분통해하지 않음이 없다.

    아주 재미있는 내용이죠? 안방준의 정체가 단순한 의병장이 아닌 원균의 친척이었다는 소리입니다. 그것도 작은아버지는 원균과 서로 왕래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고... 그리고 원균은 통제사직보다는 이순신에게 한방먹인 일이 더 기쁘다 하네요.



    문제는 원균이 통제사 된 이후의 사건입니다. 원균의 능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죠....

    원균이 통제사 되고 첫 해전인 기문포해전을 말하죠. 가만히 처박혀 술만 푸고 있지만은 않았거든요. 왜적을 잡으려고도 다녔습니다. 그는 기문포에서 왜적을 잡아서 승전보고와 함께 수급 47급을 올려보냅니다.

    기문포 해전 장계가 올라가자 초반에 조정에서는 원균의 칭찬이 돕니다. 선조는 원균의 품계를 올려주라고도 하고요.. 그러다 잠시 후 다른 장계들과 문서들이 올라옵니다. 기문포해전의 진실을 담은...

    3월 8일, 기문포에 상륙한 왜군들은 전투부대가 아니라 나무하러 온 일꾼 30여명이었고, 경상우병사 김응서가 허가한 벌목증을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3월 9일 그 소식을 들은 원균은 출동하고 왜군들이 조선군의 대함대를 보고 놀라 숨자 원균은 그들에 술도 먹이는 등 잘 다독거려 놓아보낸뒤 뒤에서 포로 쏩니다. 그런데 포는 빗나가고 왜군들은 그들을 잡으러 달려들던 판옥선들 중 고성현령 조응도의 판옥선으로 달려듭니다. 그리고 그 위로 올라가 조응도와 판옥선 승무원 합쳐 140여명을 모두 칼로 쳐죽입니다. 하지만 결국 왜군들은 모두 죽었고 원균은 이걸 승전이라고 보고했죠. 문제는 그 다음... 고성현에서 자기 현령이 전사했으니 새 현령을 임명해 달라고 자세한 전투 상황을 담은 장계를 보냄으로서 진실이 발각나고, 일본 측도 항의하고(일본측 항의서에는 사망자가 32명이라 했는데... 15급은 어디서 생겼는지...), 명나라도 휴전협상 중이라고 윽박지르고, 결국 원균의 승진은 유야무야 됩니다.


    나중에 휴전협상이 파토나고 왜군이 계속 부산으로 병력 증원하는 데도 원균이 움직이지 않자 조정에서는 원균보고 부산포를 공격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원균은 안골포와 가덕도를 육군이 30만을 동원해 먼저 쳐달라고 합니다. 30만이라는 황당한 수치나 섬을 육군으로 단독으로 점령하라는 소리나 헛소리에 연속입니다.

    《 선조 087 30/04/19(기묘) / 전라 좌수사 원균이 수륙 양군의 동시 출병을 청하다 》

    3월 29일 전라 좌수사(全羅左水使) 원균(元均)이 서장(書狀)을 올리기를,
    “신이 해진(海鎭)에 부임한 이후, 가덕도(加德島)·안골포(安骨浦)·죽도(竹島)·부산(釜山)을 드나드는 적들이 서로 거리가 가까와서 성세(聲勢)는 서로 의지되나 그 수가 수만에 불과한데도 병력도 외로운 듯하고 형세도 약합니다. 그중 안골포·가덕도 두 곳의 적은 3∼4천도 차지 않으니 형세가 매우 고단합니다. 만약 육군이 몰아친다면 주사(舟師)의 섬멸은 대쪽을 쪼개듯이 쉬울 것이요, 그 뒤로 우리 군사가 전진하여 장수포(長藪浦) 등처에 진을 친다면 조금도 뒤를 돌아볼 염려가 없게 됩니다. 날마다 다대포(多大浦)·서평포(西平浦)·부산포(釜山浦)에서 병위를 드날려 보인다면 회복의 계책이 거의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고 서로 버티며 날짜만 보낸다면 한 해를 넘어서지 못하여 우리 군사가 먼저 지치게 됩니다. 그리하여 내년에 더욱 심하고, 그 다음해는 더더욱 심할 것인데 군사가 쇠잔하고 군량이 고갈된 뒤에는 비록 지혜로운 자가 병력을 움직이려 해도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신(愚臣)의 망령된 생각에는 우리 나라 군병이 그 수가 매우 많아서 노쇠한 자를 제하고 정병(精兵)을 추리더라도 30여 만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늦봄인데다 날씨가 가물어서 땅이 단단하니 말을 달리며 작전을 할 때는 바로 이 때입니다. 반드시 4∼5월 사이에 수륙 양군을 대대적으로 출동시켜 한 번 승부를 겨루어야 합니다. 만약 시일을 지연시키다가 7∼8월 께 비가 개지 않아 토지가 질척거리면 기병이나 보병이나 다 불편할 것이니 이 때는 육전(陸戰)도 되지 않을 듯합니다. 신이 이른바 4∼5월 안에 거사하자는 것도 이를 염려하여서입니다. 그리고 행장(行長)·요시라(要時羅) 등이 거짓으로 통화(通和)하는 것이므로 그 실상을 알 수가 없습니다. 때를 타고 함께 공격하여 남김없이 섬멸한다면 일분의 수치나마 씻을 수가 있겠습니다. 조정(朝廷)에서 속히 선처하소서.”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하였다.



    《 선조 087 30/04/22(임오) / 적의 섬멸 기회를 놓치지 말도록 도체찰사 등에게 하유하다 》

    비변사가 아뢰기를,
    “통제사(統制使) 원균(元均)의 장계에, 안골포(安骨浦)·가덕도(加德島) 두 곳은 적세가 고립되어서 육군이 몰아낸다면 수군이 섬멸되기가 쉬울 것이라고 하였고, 또 우리 나라가 30만의 정병(精兵)을 얻을 수 있으니 4∼5월 안에 수륙으로 대거 출동하여 한번 승부를 결단하자고 하였습니다. 그가 적을 치려고 하는 뜻이 매우 결연합니다. 신들도 오늘날의 형세가 오래 버티기는 어려울 것을 염려하고 있으나, 적이 험조(險阻)한 곳에 둔거(屯據)하고 있으면서 둔전에서 운량하여 주인으로서 손을 기다리고 편히 쉬면서 우리가 힘들기를 기다리는 형세가 되었으니, 우리 나라 수륙의 군병이 날로 더 피곤하여져서 마침내 저절로 무너지는 형세가 될까 두렵습니다.
    진실로 탈 만한 기회가 있으면 더불어 한 번 승부를 결단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이지만, 저들에게는 탈 만한 기회가 있고 우리에게는 탈 만한 기회가 없다면 그 형세는 저절로 수수방관하고 앉아서 기회를 놓치는 데에 이르고 말 것인데 오늘날의 일이 바로 그렇습니다. 참으로 힘이 적을 제압할 수 있다면 마땅히 기미를 잘 판단하여 이로운 형세를 취하되 마치 빠른 우뢰에는 미처 귀를 막지 못하듯이 하여야 할 것이지 어찌 천 리 밖에서 싸움을 청할 것이 있겠습니까. 안골포는 지세가 육지와 이어져서 육군이 진격할 수도 있겠지만, 가덕도는 바다에 있어서 수군이 아니고서는 전진할 수가 없으니, 장계의 뜻은 상량(商量)이 부족한 듯합니다. 그리고 30만의 정병은 4∼5월 내에 소집하기가 용이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때 적을 섬멸해야지 지연시켜서는 안된다는 뜻은 참으로 원균이 아뢴 바와 같습니다. 이 일은 도체찰사(都體察使)와 도원수(都元帥)가 형세의 편부를 자세히 참작하고 사기(事機)의 득실을 잘 요리하여 좋을 대로 처치할 일이지, 멀리 조정에서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내용으로 속히 도체찰사와 도원수에게 밀유(密諭)하여 다시 사세를 살펴 치계(馳啓)하는 한편 가능함을 보아서 진격하여 사기(事機)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나의 뜻은 안된다고 여긴다. 그러나 시험하여 보라고 하유하는 것도 괜찮겠다.”
    하였다.

    《 선조 089 30/06/11(경오) / 원균이 수륙의 병공을 처치해 줄 것을 요청하다 》

    수군 통제사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水軍統制使全羅左道水軍節度使) 원균(元均)이 치계하기를,
    “신이 11월 15일에 먼저 안골포(安骨浦)를 공격하겠다는 계책을 갖추 계달하였는데 명을 기다리는 사이에 시일이 쉽게 가버려 앉아서 기회를 잃게 되었으니, 매우 안타깝습니다. 대개 전에는 적들이 비록 거제(巨濟)·웅천(熊川) 등처를 점거하고 있었으나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었고 주사(舟師)가 장생포(長生浦)·다대포(多大浦)를 출입하면서 스스로 화친한 뒤라고 칭탁하며 철병(撤兵)하겠다고 크게 소문을 냈었는데, 이제 거제의 적은 안골포로 들어가 점거하고 김해(金海)의 적은 죽도(竹島)로 들어가 점거하여 목을 막고 정치(鼎峙)하여 서로 성세(聲勢)를 의지하면서 우리 나라의 뱃길을 막고 있습니다. 따라서 부산 앞바다로 나아가 적의 무리를 차단하여 공격할 방도가 다시 없게 되었는데, 설사 대거 이를 수 있다 하더라도 나아가서는 배를 머무를 곳이 없고, 물러나서는 뒤를 돌아다 보아야 할 근심이 있으니, 실로 병가(兵家)의 승산(勝算)이 아닙니다. 신의 계책으로는 반드시 수륙(水陸)으로 병진하여 안골포의 적을 도모한 연후에야 차단할 방도가 생겨 회복하는 형세를 십분 우리에게 유리하게 전개시킬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조정에서도 방도를 강구하지 않는 것은 아니겠으나, 신이 변방에 있으면서 적을 헤아려 보건대 금일의 계책은 이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조정으로 하여금 각별히 처치하여 속히 지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啓下)하였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원균의 뜻은 반드시 육군이 먼저 안골포(安骨浦)와 가덕도(加德島)의 적을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고, 도원수와 체찰사의 뜻은 그렇지 않아 수군을 나누어 다대포 등처를 왕래시키면서 해양에서 요격하려는 계획입니다. 이는 대사(大事)이니, 여러 장수의 계책을 하나로 결정하여 처리해야지 서로 달라서 기회를 잃게 해서는 안됩니다. 신들 역시 지도(地圖)로 형세를 살피고 해변의 형세를 자세히 아는 사람의 말을 참조하건대 안골포는 김해(金海)·죽도(竹島)와 매우 가깝고 지형이 바다 가운데로 뻗어 나왔으므로 군사가 육로로 공격하면 적에게 뒤에서 엄습당할 염려가 없지 않으니, 도원수가 진공(進攻)을 어렵게 여기는 것이 또한 반드시 소견이 있을 듯합니다. 대저 군중(軍中)의 일을 제어하는 권한이 체찰사와 도원수에게 있으니, 제장(諸將)으로서는 품하여 지휘를 받아서 진퇴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근일 남쪽의 장수들이 조정에 처치해 달라고 자청하는 일이 다반사여서 체통을 유지시키는 뜻이 도무지 없습니다. 위의 사연을 도체찰사와 도원수에게 모두 하유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그리고 6월 18일에 또 한차례 해전이 있었습니다. 안골포 등지에서 왜군들이 놀라 버리고 간 배 몇 척 불지르고 대신 보성군수 안흥국과 평산포 만호 김축 등 여러 장수가 총에 맞아 죽거나 부상당했습니다. 자세히 말하면 속터집니다. 왜냐고요...? 수군도 아니라 육군 수송함대보고 그거 잡으려다가 이꼴이 난겁니다.


    이런 원균의 추태를 보다 못해 원균의 후훤자인 선조조차 폭발하고 맙니다.

    《 선조 090 30/07/10(기해) / 비변사의 건의대로 원균에게 후퇴하지 말고 적을 공격할 것을 명령하다 》

    비변사가 아뢰기를,
    “적병이 비록 해안에 나누어 점거하고 있으나 군량을 조달하고 병사를 보충하는 길은 바다에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주사(舟師)를 적이 무서워하니 부대를 나누어 번갈아 나가 바다에 왕래하면서 적의 보급로를 끊는다면 이는 곧 적의 허점을 공격하는 것임과 동시에 요해처를 장악하는 것이니 현재의 계책으로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제장들이 명령을 잘 이행하지 않아 부득이 출병하였다가 오히려 앞을 다투어 돌아옴으로써 크게 형세를 이루어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지금 양 총병의 분부가 이와 같으니, 접견할 때 문답한 내용을 자세히 거론하여 미리 도체찰사와 도원수에게 하유하되 시급히 전일 분부한 대로 주사의 제장을 엄하게 독려하는 한편 기회를 살펴가며 도모하여 기회를 잃어 대사를 그르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전교하기를,
    “아뢴 대로 시행하라. 원균(元均)에게도 아울러 말을 만들어 하유하기를, ‘전일과 같이 후퇴하여 적을 놓아준다면 나라에는 법이 있고 나 역시 사사로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라.”
    하였다.


    그리고 7월에 대망의 칠천량해전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게 권율이 사지로 원균을 곤장쳐서 몰아넣었다고 하는데.. 이거 선조가 이순신을 끌어내리고 원균을 통제사에 앉힌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면피하려고 한 말인거 아시나요?

    칠천량 해전 전투기록 보면 황당합니다 시간순으로 정리해보지요...

    7월 4일. 원균은 부산포로 떠납니다. 삼도수군과 140여척의 판옥선을 거느리고... 그리고 7월 7일 부산포 근처에 도착해 왜선 8척을 불사릅니다. 문제는 이때 부산포로 들어오던 일본군 수송부대가 그걸보고 도망가자 그걸 쫒아가다가 물마루에 걸려 경상우수영 배 5척, 전라우수영 배 7척을 표류시킵니다. 경상우수영 배는 무사히 귀환하지만 전라우수영배들은 서생포에 상륙했다가 가토 기요마사 부하들에게 몰살당합니다.

    7월 9일 다시 부산포로 갔던 원균은 일본 육군 수송함대(!)가 덤비자, 놀라 달아나다가 전선 20척을 한척씩 갖다바칩니다.

    7월 11일 그리고 돌아오다가 권율의 소환을 받고 고성으로 간 원균... 곤장을 맞습니다.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20척이 넘는 판옥선과 수군들을 날려버렸죠... 대충 2,500에서 3,000명 가량의 병사들을 죽인 겁니다. 곤장 맞은게 다행입니다. 참수당해도 아무 말 못합니다. (임진왜란 개전 직전 전라좌수영의 판옥선이 24척이었습니다.)

    7월 14일 다시 부산포로 갑니다. 이번에는 배는 안 잃습니다. 그러다 돌아오다가 가덕도에서 하루 머무르려고 나무와 물을 구하려고 병사들 보냈다가 가덕도에 주둔하던 왜군이 기습하자 육지에 나무하던 400여명의 병사들을 버리고 도망칩니다.

    7월 15일 다시 두들겨 맞습니다.(11일과 15일 기록에 따라 다르고 두번 맞은 것일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7월 16일 홧술을 퍼마시다가 잔 원균은 일본군이 야습해오자...(일본측 기록에 의하면 달랑 두 척) 당황해서 아군 다버리고 무작정 도망칩니다. 왜군 함대는 그걸보고 그냥 따라오고, 그걸 보고 놀란 원균은 춘원포에 내려서 앞장서 도망치고, 다른 장수와 수군들도 덩달아 도망칩니다.

    그리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두 장수만 춘원포에서 싸우다 전사합니다. 이게 칠천량해전입니다. 말도 안된다고요? 황당하다고요? 칠천량해전 참전자인 김완(당시 조방장)의 해소실기, 세남(수군 격군)의 보고서 그외 일본측 기록인 등당기(일본수군 총대장 도도가의 기록), 조선일일기(제성수비군감 오타 가즈요시 휘하 종군승 케이넨의 일기) 그외 수많은 양측 참전자들의 기록에서 일치하는 내용인데요? 조선 수군들 거의 다 도망치고, 빈 배 불태우고 육지에서 추격해 조선군 다수 참살했다고... 심지어는 중국측 기록에도 이 사건은 황당하게 등장합니다.


    그리고 원균은 사라집니다. 어떤 이는 도망치다 추격해온 왜군에게 칼맞아 죽었다고 하는데 웃기는건 당시 기록들을 보면 그때 원균이 죽었다는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선전관 김식의 보고서에도... 징비록에도... 또한 7월 18일 도원수 권율의 군관 최영길이 원균을 만나 대화했다는 내용이 실록에 실려있습니다. 그리고 칠천량해전의 진실을 알고 분노한 선조가 수군 장수들을 처벌하려 하니 조정에서 원균부터 잡아오자고 하니 선조가 말을 돌립니다. 하늘이 수군을 패하게 했다니 뭐니 하며...


    선조30년 7월 22일 / 선전관 김식이 한산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보고하다

    선전관 김식(金軾)이 한산(閑山)의 사정을 탐지하고 돌아와서 입계하였다.
    “15일 밤 2경에 왜선 5∼6척이 불의에 내습하여 불을 질러 우리 나라 전선 4척이 전소 침몰되자 우리 나라 제장들이 창졸간에 병선을 동원하여 어렵게 진을 쳤는데 닭이 울 무렵에는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왜선이 몰려 와서 서너 겹으로 에워싸고 형도(刑島) 등 여러 섬에도 끝없이 가득 깔렸습니다. 우리의 주사(舟師)는 한편으로 싸우면서 한편으로 후퇴하였으나 도저히 대적할 수 없어 할 수 없이 고성 지역 추원포(秋原浦)로 후퇴하여 주둔하였는데, 적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여 마침내 우리 나라 전선은 모두 불에 타서 침몰되었고 제장과 군졸들도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모두 죽었습니다. 신은 통제사 원균(元均) 및 순천 부사 우치적(禹致績)과 간신히 탈출하여 상륙했는데, 원균은 늙어서 행보하지 못하여 맨몸으로 칼을 잡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신이 달아나면서 일면 돌아보니 왜노 6∼7명이 이미 칼을 휘두르며 원균에게 달려들었는데 그 뒤로 원균의 생사를 자세히 알 수 없었습니다. 경상 우수사 배설(裴楔)과 옥포(玉浦)·안골(安骨)의 만호(萬戶) 등은 간신히 목숨만 보전하였고, 많은 배들은 불에 타서 불꽃이 하늘을 덮었으며, 무수한 왜선들이 한산도로 향하였습니다.”

    【원전】 23 집 267 면
    【분류】 *군사(軍事) / *외교-왜(倭)

    죽었다는 얘기는 없군요... 그런데....


    7월 21일에 성첩(成貼)한 도원수 권율의 서장에 아뢰기를,
    “신의 군관인 최영길(崔永吉)이 한산도에서 지금에야 비로소 나왔는데 그가 말하기를 ‘원균(元均)이 사지를 벗어나 진주로 향하면서 말하기를, 「사량(蛇梁)에 도착한 대선(大船) 18척과 전라선(全羅船) 20척은 본도에 산재해 있고, 한산에 머물러 있던 군민(軍民)·남녀·군기(軍器)와 여러 곳에서 모여든 잡선(雜船) 등을 남김없이 창선도(昌善島)에 집합시켜 놓았으며, 군량 1만여 석은 일시에 운반하지 못하여 덜어내어 불태웠고, 격군(格軍)은 도망하다 패배한 배는 모두 육지 가까운 곳에 정박시켰으므로 사망자는 많지 않았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최영길을 곧이어 올려보내겠습니다. 이순신(李舜臣)에게 흩어져 도망한 배를 수습하도록 사량으로 들여보내소서.”
    하였는데, 비변사에 계하(啓下)하였다.

    【원전】 23 집 269 면
    【분류】 *군사(軍事) / *외교-왜(倭)


    원균을 만났답니다. 그것도 아주 상세히 현 수군 상황을 보고하네요? 하지만 이후 원균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지요. 나타났다가는 참수당할텐데...

    그리고 전후 공신책봉에서 원균은 맨처음에 선무 2등 공신으로 올라갑니다. 이것도 신하들이 선조 눈치 보면서 말이죠... 그런데 선조가 바득바득 우겨서 1등으로 올라갑니다.

    1등공신 되기 참 쉽죠...



    마지막으로 훗날 나온 원균의 기록들을 보여드리죠....


    민정중(閔鼎重)이 말하기를,

    “원균(元均)이 전선(戰船)을 많이 모아 바다에 침몰(沈沒)시키고 달아났으나, 이순신(李舜臣)이 십여 척으로 적(賊)을 격파(擊破)하였는데, 쓰인 배는 또한 모두 위급한 상황에 임하여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장차 마땅한 사람을 얻지 못한다면, 배가 비록 많다 하더라도 또한 어디에 쓰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명하여 상의(相議)해서 변통(變通)하도록 하였다.

    [숙종 7년 5월 3일]

    배를 많이 만들어봤자 원균같은 이가 지휘관이면 말짱 도루묵이라는 소리네요
    민정중은 송시열의 문인입니다. 즉 서인이지요. 원균은 서인이고 이순신은 남인인데 이미 예송논쟁으로 두 세력의 사이가 악화된 상황에서 같은 서인인 원균을 마땅한 사람이 아니라고 하고 있고 숙종도 동의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의 반발도 없지요.


    그 뒤의 원균은 3번 더 언급이 되는데 2번은 암행어사로 유명한 박문수가 백성들에게 가혹한 양역을 비판하면서 위의 민정중과 비슷한 발언을 합니다. 박문수는 소론인데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진 상황이니 그 역시 서인 중 일부입니다.

    “또 적을 막는 길은 오로지 장수다운 사람을 얻고 못 얻고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나의 통영인데도 원균(元均)이 장수가 되니, 군대 전체가 패망하고, 이순신(李舜臣)이 장수가 되니 가는 곳마다 겨룰 만한 상대가 없었습니다.”-영조 26년 7월 3일

    “.....원균(元均)이 장수가 되어서는 폐전하였고 이순신(李舜臣)이 장수가 되어서는 승전(勝戰)했으니, 장수의 잘하고 잘못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이지 어찌 선척의 낙인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겠습니까?” -영조 29년 2월 22일

    한마디로 원균은 무능한 장수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백성들에게 부담을 지우며 군비를 강화해봤자 원균이 지휘관이면 말짱 황이니 지휘관의 선택을 잘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정조 때 이충무공전서가 발간이 되는데 한마디로 이순신을 기리는 책입니다. 정조의 윤음이 말머리에 붙어있으니 개인이 쓰는 전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공식적인 조선왕실의 입장이지요. 이에 대한 자료는 조선왕조실록에 딱 한번 보이고 이것이 원균이 나오는 마지막 기사입니다. 그리고 원균을 비겁한 장수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용인(龍仁)의 유학(幼學) 안석광(安錫光)이 상언(上言)하기를,
    “신의 6대조 안홍국(安弘國)은 힘껏 싸우다가 만력(萬曆) 정유년 6월 19일 안골포(安骨浦) 앞 나루에서 한 몸을 바쳤는데,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에는 ‘통제사(統制使) 원균(元均)과 7월 15일 한산도(閑山島)의 군진(軍陣)이 무너질 때에 같이 죽었다.’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죽은 것은 같으나 싸우다가 죽은 것과 군진이 무너져서 죽은 것은 아주 다릅니다. 뜻을 두었던 일이 이로 인하여 묻혀버리고 공적이 이로 말미암아 없어졌으니, 삼가 바라건대 특명으로 《충무공전서》에 고쳐 기록하게 해 주소서.”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힘껏 싸우다가 죽은 것이나 군진이 무너져서 죽은 것이나 죽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만 용맹함과 비겁함은 판이합니다. 지명과 날짜가 이처럼 서로 틀리니, 당초 책을 편집한 신하로 하여금 사적을 다시 상고해서 사실대로 바로잡도록 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내각(內閣)으로 하여금 공사(公私)의 문적을 다시 고증하게 한 뒤 바로잡아야 하거든 바로잡도록 하라.”
    하였다 -정조 21년 8월 19일.

    안흥국... 위에 나온 보성군수로 원균의 뻘짓 때문에 6월에 전사한 사람입니다. 그 후손도 이럽니다. 자신의 조상은 싸우다 전사했지 원균이랑 도망치다 칼맞아 죽지 않았다고... 조정에서도 그의 수정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실록 외의 기록으로 안방준의 은봉전서에도 기막힌 비판내용이 있습니다. 약간 자료가 중복되긴 합니다만...


    ○ 백사가 말하기를 『상(上)께서 일찍이 수군과 육군을 지휘한 여러 장수들의 공을 논하면서 「이순신과 원균의 해상 대첩과 권율의 행주 대첩이 마땅히 으뜸가는 공이다」고 하였으니, 이는 바뀔 수 없는 정론이다.』하였고, 또 말하기를 『원균은 다만 남을 의지해서 일을 이룬 자이니, 진실로 감히 이순신과 공을 겨룰 수는 없다...』하였다.
    백사의 이 말은 어찌하여 그렇게 오류를 범했는가? 왜적이 수군[舟師]을 거느리고 멀리 호남을 향해 진격해 갔을 때, 이순신은 목숨을 걸고 계략을 짜내어 한산도에서 차단함으로써 적으로 하여금 서쪽으로 노를 저어가지 못하도록 한 지 모두 6년이나 되었다. 원균은 겁이 많아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스스로 그 전선을 침몰시키고 해도(海島)로 숨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군중으로 데려다 놓고 돈과 군량을 넉넉히 배급하였으며, 노획한 적의 머리와 포로를 원균에게 나누어주어, 원균이 군율로 다스려짐을 면하게 했을 뿐 아니라 또 상까지 받도록 했다.
    원균은 이순신에게 난육[卵育 보살피고 양육한다는 뜻이다]의 은혜를 입은 바가 참으로 셀 수도 없이 많았는데도, 균은 득의한 뒤로 오히려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을 품어 이순신을 해치는 데 못할 것이 없었다. 「바다의 제왕[海王]」이라는 설을 만들어 원근에 퍼뜨렸고, 가등청정이 바다를 건너게 되자 은밀히 장계를 올려 이순신이 두려워서 머뭇거리며 나아가지 못했다고 말하여, 순신은 결국 체포되어 국문을 받기에 이르렀다. 원균이 그를 대신하였으나 한시도 넘지 못하고 온 수군이 침몰하니, 목을 벨 죄만 있지 기록할 만한 공은 없는데도 도리어 이순신·권율과 더불어 칭송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대개 (원균은) 대대로 서울지역에 살면서 그의 가족들이 지위 높은 권신과 끈을 맺고 또 시국을 담당한 사람을 아첨으로 섬겨 그를 도와준 자가 많았다. 그 때문에 임금을 속이고 형벌과 상을 뒤엎은 것인데 백사는 (그것을) 아직 들어보지 못했는가? 어전에서 공을 논할 때 어찌하여 이를 아뢰어 우리 선왕(先王)으로 하여금 옳고 그름을 명백히 알도록 하지 않았는가? 물러 나온 뒤에 처음에는 「바뀔 수 없는 정론」이라 말하고 끝에서는 「감히 이순신과 공을 겨룰 수 없다」고 말하니, 정론이 과연 이와 같은가?
    원균은 나의 중부(仲父) 동암공(東巖公)【안중홍(安重洪)으로 세상사람들이 동암처사라 불렀다. 후에 효행으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되었다】의 처 원씨의 친족이다. 그가 통제사로 부임하던 날, 중부를 찾아와 인사하고 말하기를,
    『나는 이 직책이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직 이순신에게 치욕을 갚은 것이 통쾌합니다.』
    하였다. 중부께서 말하기를,
    『영공(令公)이 적을 격파하는데 마음을 다하여 공업(功業)이 이순신보다 두드러질 수 있다면 치욕을 씻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한갓 이순신을 갈아치운 것으로 통쾌히 여기면 어찌 치욕을 씻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니, 원균이 대답하기를,
    『나는 적을 만나 싸울 때 거리가 멀면 편전(片箭)을 쓰고 가까우면 장전(長箭)을 쓰며, 육박전이 벌어지면 칼을 사용하고 칼이 부러지면 정[  기름을 칠한 곤봉이다]으로 싸우니, 이기지 못할 리 없습니다.』
    하였다. 중부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하기를,
    『대장이 되어서 칼과 정을 사용하는 데 이른다면 옳겠는가?』
    하였다. 원균이 돌아가자, 중부께서 나에게 이르기를,
    『원균의 사람됨을 보니 큰일을 하기는 글렀다. 조괄(趙括)과 기겁(騎劫)도 필시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하고 오래도록 탄식하였다. 남쪽의 사람들은 지금도 이 일을 말하면 팔뚝을 걷고 분통해하지 않음이 없다.


    허허허, 이항복이 원균 약간 옹호했다고 지독한 비판을 하네요... 그리고 남도 사람들은 원균 말을 하면 아직도 길길히 날뛴다고 하고...
    여담으로 조괄과 기겁은 중국 전국시대 인물로 조괄은 염파를 몰아내고, 기겁은 악의를 몰아내고 대장이 되었다가 전군을 말아먹은 장수들입니다.


    마지막으로 선조 31년 실록에 적힌 사관론입니다. 원균을 논할 때마다 제가 딱 이 심정이거든요...


    【사신은 논한다.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柵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將卒)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 위인으로서 당초 이순신(李舜臣)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湖南)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마지막으로 덤입니다.

    우리가 흔히 잘못 알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이순신이 조정의 명을 받고 부산포로 출전하지 않았다고 하는데...(많은 소설 등에서 이걸 표현하고 간혹 폄훼하기도 함) 이순신은 거역한 적이 없습니다.

    정유년 2월 10일경 이순신은 판옥선 63척을 거느리고 부산포 앞바다에 나타나 대규모 무력시위를 합니다. 왜군들은 나가 싸울 엄두를 못내고 벌벌떨고 있었고, 이순신은 부산앞 절영도 앞바다에서 이틀을 머무른 후 돌아갑니다. 그러다가 가덕도 앞바다에서 하루 머무르다가 왜군의 기습을 당합니다. 사후선(판옥선에 따라붙는 보트)한척이 습격당해 초동이 한 명 죽고 격군 5인이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다음날 무시무시한 보복이 가덕도 왜성에 머무르는 왜군들에게 퍼부어집니다. 마침 연합작전을 펴고 있던 경상우병사 김응서는 예하 병사까지 상륙시켜 공격하고 두들겨 맞던 왜군들은 다음날 안골포에서 간첩 요시라(아시겠죠)가 찾아와 포로를 풀어줄겠다고 협상하자 포위를 풀고 돌아갔습니다.

    통제사로 부임한 원균은 여기서 큰 거 한 방을 날립니다. 패전 장수들을 처벌해 달라고... 이순신이 함부로 부산포 공격하다가 부하들 떼죽음 시키고 이순신의 상선도 좌초되어 다른 판옥선이 끌고 나왔다고 말입니다. 문제는 같이 작전을 했던 김응서의 장계에는 전혀 그런 내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권율도 김응서의 치계를 인정했고 말입니다.

    실록 검색가능하신 분은 정유년 1월 기록을 보시면 아주 재미있는 것을 보실 수 있으십니다. 고니시가 요시라를 통해 가토의 도해를 알려주었던 것도 사실이고, 그 정보도 사실이었습니다. 문제는 요시라가 김응서에게 정보를 전해준 날짜가 1월 11일, 김응서가 권율에게 보고한 날짜가 12일, 그리고 가토가 다대포에 도착한 날이 13일입니다. 이것은 기장현감 이정견이 체찰사 이원익에게 보낸 문서에서 확인됩니다.

    조정에서 김응서의 보고를 들은 날이 1월 19일, 조정이 수군 출동 명령 내린 날은 1월 21일입니다. 그리고 13일 가토가 도해했다는 이원익의 보고가 이 날 서울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1월 22일 원균의 장계가 도착하죠.. 자신이 통제사라면 가토를 몰아낼 수 있다는 내용의...(그런데 원균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육군이 30만을 동원해 안골포와 가덕도를 점령해주면 자신이 부산을 치겠다고 말을 바꿉니다. 30만? 조선군이 가장 많이 병력 동원했을 때가 육군, 수군 합쳐 17만 인데요? 그리고 가덕도는 섬인데...? 육군보고 갑옷입고 무기랑 식량지고 바다를 헤엄쳐 건너라는 소리인가요?)

    그리고 2월 6일 조정에서 이순신을 잡아오라는 명령이 내려집니다... 그리고 2월 26일 이순신은 잡혀갑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으신가요? 위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실록이 중점입니다.

    다른 기록입니다. 난중잡록이 중점입니다.

    이순신은 당시 부찰사 한효순을 만나러 남해현에 가있는 중 요시라가 경상좌수영을 통해 보낸 전언을 듣습니다. 1월 10일 가토가 도해했다고.... 날짜 잘 보세요... 요시라가 각각 다른 정보를 보낸 것일 수 있습니다.

    14일 권율이 한산도에 도착해 출동명령을 내립니다. 이 때, 이순신이 출동했는지 안했는지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이분이 지은 행록에는 이순신이 출동했다고 하지만 행록 같은 사적 기록은 교차검증이 불가능합니다. 선조수정실록에도 이순신이 1월에 출동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수정실록은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어쨌거나 바다에서 가토를 잡는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임을 알 수 있고 이순신도 못잡았다고 보고를 합니다.

    난중잡록에는 이 때 이순신이 보고서를 올리면서 광주목사 등이 수군에 군사들은 안 보낸다고 혼 좀 내주라고 해서 조정이 혼을 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점점 미궁의 경지로 빠져듭니다...

    결론은 하나입니다. 억지로 죄를 뒤집어 씌웠다는... 말이 안된다고요...? 저도 안 믿고 싶어요. 문제는 당시 조정은 전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김덕령을 쳐죽일 때의 기록을 보시지요. 차이점이라면 김덕령은 역적죄로 붙잡혀갔지만 이순신은 부국지죄라는 죄목으로 잡혀갔다는 점.. 그 때문에 이순신이 잡혀가자 이원익, 이억기가 구명상소 올릴 수 있었고, 고문이 시작되자 정탁이 신구차를 올리는 등 다른 사람들도 구명활동을 펼 수 있었다는 것 뿐입니다.(역적 용의자를 옹호하다가는 그 옹호자 가족이랑 당파까지 다 박살납니다.)

    뭐 용의자가 고문 중에 죽으면 그만이고 설사 억울하게 죽었다는게 밝혀지더라도 글 몇 장에 신원해주면 땡이거든요.(이런 사례 참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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