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아이가 태어나면서 아버지라는 호칭을 얻은 나는 눈물을 머금고 디아블로 3의 모든 캐릭터를 삭제하는 결단을 내렸다. <div>(사실 그래 봤자 허접스러운 만렙 악마사냥꾼 하나와 대기만성형 야만전사 하나였지만...)<br><div><div>우연히 점심을 함께 먹은 직원들이 게임 이야기를 했는데 그중 한 여직원이 디아블로를 하고 있는데 이번 시즌이 시작되고 너무 재미있어서 밤에 </div> <div>잠도 못 자고 게임을 한다는 이야기를 엿들었다. 나도 예전에 잠시나마 디아블로를 했는데 내 주변에도 디아블로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div> <div>반가웠다. <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롤이 여전히 대세라는 직원들 사이에서 디아블로가 더 재미있다며 열변을 토하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야만전사 네 명으로 구성된 파티에 </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흠씬 두들겨 </span><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맞고 </span><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있는 뒤틀린 어미의 모습 같았다. 은퇴한 성역의 용자였던 나는 뒤틀린 어미 옆에 따라다니는 망자처럼 디아블로가 롤보다 </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재미있다면서 그녀를 </span><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도와주고 싶었지만 디아블로에 </span><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나는 뒤틀린 어미가 두들겨 맞고 있을 때 어미는 맞든 말든 토하고</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있든 무관심하게 </span><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시체를 뜯고 있는 </span><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망자처럼 밥을 먹었다. </span></div></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br></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 머릿속에는 온통 디아블로에 대한 생각이었다. 악마사냥꾼 유저라면 하나쯤은 들고 다니던 만티코어도 없이 </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이름만 </span><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무시무시한 </span><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지옥포를 들고 다니며 주인 잘못 만나 화살 쏘는 시간보다 도약하면서 도망 다니던 시간이 더 많았던 비운의 악마사냥꾼에 </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대한 미안함과 </span><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환갑잔치도 치러주지 못하고 </span><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30대 젊은 나이에 그 흔한 전설템 하나 없이 강제로 요절시킨 야만전사에 대한 애틋함으로 일을 할 수 </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없었다. </span><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결국 나는 다시 성역의 용사 삶을 살아가기로 했다.</span></div> <div><br></div> <div>퇴근 후 와이프의 동의를 얻고 피시방으로 향했다. 처음 디아블로를 잡으러 갈 때 설렘을 안고 총총걸음으로 달려가던 나의 악마사냥꾼처럼 </div> <div>나의 발걸음은 <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가벼웠다. 피시방에 앉아 그동안 봉인되었던 계정을 열었다. 중국인 천사가 돈을 2억 넣어줬네, 아이템은 모조리 전설로 바꿔줬네 </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하는 </span><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훈훈한 </span><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사연이 내게도 생기길 바랐지만, 중국인 천사들이 요즘 보이스피싱 사업으로 바쁜지 내 캐릭터은 빈공간이었다.</span></div> <div><br></div> <div>캐릭 생성 창을 앞에 두고 나는 창조주가 된 기분이었다. 남자로 할까? 여자로 할까? 당연히 여자지! 하면서 여성 캐릭터들을 살펴봤다.</div> <div>검은 머플러와 하이힐이 인상적인 도도한 도시 아가씨 같은 악마사냥꾼, <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피어싱과 문신을 한 반항아 같은 부두술사, 단정한 단발머리의 </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유니 섹스한 </span><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외모의 수도사 그리고 집에 있는 그분을 연상시키게 하는 야만전사까지..</span></div></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그녀들을 보며 마치 우연히 종로 거리에서 첫사랑을 만난 것과 같은 설렘을 느꼈다. 하지만 모니터에 비찬 내 모습을 보며 차마 여성캐릭터를 </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선택할 수 없었다. </span><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지금 나의 외모와 가장 흡사한 남성 부두술사와 수도사 이 두 대머리를 외면할 수 없었다.</span></div> <div><br></div> <div>"그래 이왕이면 조금 더 잘 생긴 대머리인 수도사로 하자!" </div> <div><br></div> <div>결국 나는 수도사 시즌 캐릭터를 생성했다. 사람이 알몸으로 세상을 나오듯 나의 수도사도 소중한 부위만 가린 채 벌거벗은 채 "나를 강하게 </div> <div>키워줘! <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물론 그 전에 제대로 된 옷도 좀 입혀주고.." 라며 바라보고 있었다.</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br></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널 세상에서 가장 강한 대머리로 키워주겠어!" 수도사를 바라보며 다짐했다.</span></div> <div><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br></span></div> <div>그리고 당당히 접속했다. 게임설정 화면이 나왔다. 캠페인 모드와 모험 모드.. 나는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기 때문에 모험은 즐기지 않는다. </div> <div>당연히 캠페인 모드로 접속했다. 발가벗은 나의 수도사는 부끄러움도 잊은 채 좀비들에게 상반신을 중심으로 경락 마사지를 선사했고</div> <div>디아블로의 민폐녀 레아를 만났다. </div> <div><br></div> <div>"이 년.. 약해 보이는데 나의 천둥주먹 몇 방이면 앞으로 고생길을 1막 1장에서 끝내버릴 수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div> <div>나는 매너있는 신사였기 때문에 차마 그녀에게 천둥주먹을 날리지는 못했다. </div> <div><br></div> <div>그렇게 나의 두 번째 디아블로3 인생은 시작되었다.</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