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p>이번엔 통일 신라와 발해의 발전과 쇠망에 대해서 이야기 하겠습니다.</p><p><br></p><p>먼저 간략하게 신라의 시기는 상대, 중대, 하대로 구분을 지었는데, 이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한 구분입니다.</p><p><br></p><p>상대는 박혁거세부터 진덕여왕까지 삼국시대 이며 성골 출신의 귀족들이 왕위에 올랐습니다.</p><p><br></p><p>중대는 삼국을 통일 시킨 무열왕부터 혜공왕까지 약 100년이며, 진골출신의 귀족들이 왕위에 올랐습니다.</p><p><br></p><p>하대는 선덕왕부터, 경순왕까지 약 120년간 이며, 경순왕을 끝으로 멸망을 하였습니다.</p><p><br></p><p>신라의 발전은 보통 왕권의 강화와 연결이 되며, 쇠락기에는 왕권이 약화되는 모습으로, 왕권에 관련하여 설명하겠습니다.</p><p><br></p><p>먼저, 이전에 적은 것처럼, 내물왕,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을 거쳐 왕권을 강화했고,</p><p><br></p><p>중대에는 전제왕권강화를 위한 여러가지 정책을 시행하였습니다. 이로서 집사부의 시중은 역할이 강화되었고,</p><p><br></p><p>귀족들의 수장인 상대등은 역할이 약화되었습니다.</p><p><br></p><p>진골출신 최초왕인 무열왕에 이은 문무왕 시기에 외사정과 같은 지방조직 관찰 조직을 정비하고, 상수리 제도를 통해 지방 귀족들의 자식을</p><p><br></p><p>신라의 수도에 불러서, 중앙집권화를 하였습니다.</p><p><br></p><p>특히, 신라의 중대에 신문왕은 여러 방법으로 전제왕권을 꾀하였는데, </p><p><br></p><p>먼저, 김흠돌의 난을 계기로 진골 귀족들을 숙청해내어 권력의 집중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 김흠돌의 난은 현재 해석으로는 실질적으로</p><p><br></p><p>난을 일으킨 것이 아닌 명분을 위해서 난을 일으킨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p><p><br></p><p>그 후에, 9주 5소경 체제를 정비하였으며, 신하들에게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하여 귀족의 권력을 약화시켰습니다.</p><p><br></p><p>관료전은 단순히 수조권만을 행사할 수 있었고, 녹읍은 수조권만이 아니라, 공납, 노동력까지 징발할 수 있는 권한으로,</p><p><br></p><p>녹읍을 통해, 귀족들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는데 이 녹읍을 폐지하여, 왕의 권력을 키웠습니다.</p><p><br></p><p>또한, 진골 출신만이 아닌 6두품을 등용하여 자신의 사람을 늘렸으며, 국학을 통해 유교를 가르침으로서 왕에 대한 충성해야하는 </p><p><br></p><p>학문적인 이유를 만들었습니다.</p><p><br></p><p>이렇게 계속 신라가 증훙이 되고 왕권이 강화될 것 같았지만, 신라 하대에 왕의 권력이 약해짐에 따라 쇠퇴기에 들어갑니다.</p><p><br></p><p>집사부의 시중의 권한이 축소하고, 상대등이 권한이 커짐음 물론, 녹읍이 부활하여 귀족의 힘이 기반이 생성되었고,</p><p><br></p><p>6두품이 천대를 받아 지방으로 떠돌아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로인해 6두푸뫄 지방호족들이 결합하여</p><p><br></p><p>지방에 새로운 세력이 성장하였고, 이는 후삼국시대의 기반이 되었습니다.</p><p><br></p><p>후삼국시대가 일어나기 위한 정신적 학문은 새로이 풍수지리가 발달하여, 경주의 기가 쇠한것을 명분으로 삼고,</p><p><br></p><p>불교 중 선종이 발달하여,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진골 출신의 왕만이 아니라, 우리도 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p><p><br></p><p>지방 세력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인해 신라가 쇠퇴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p><p><br></p><p><br></p><p>신라의 행정조직</p><p><br></p><p>중앙에는 귀족회의로 화백회의(상대등)이 있었고, 수상으로 시중이 있습니다.</p><p><br></p><p>중앙 직계의 행정조직으로 왕 및에 집사부 외 13부가 있었고, 국학을 설립하여 유교의 가르쳤습니다.</p><p><br></p><p>지방의 행정조직으로는 수도에 6부, 지방에 8주, 군, 현, 촌이 있었으며, 특수구역으로 5소경이 존재했습니다.</p><p><br></p><p>6부에는 9서당이라는 중앙군이 있었는데, 이 중앙군은 백제, 고구려, 말갈, 신라인 들이 전부 포함된 군대로 신라의 유화 정책을 볼 수 있습니다.</p><p><br></p><p>그 아래 지방에는 9주가 있었으며 지방관의 명칭이 도독으로 변경되었습니다. 이전 삼국시대에서는 군사적 + 행정적 모습이라면,</p><p><br></p><p>이제는 행정적 성격이 강화 되었습니다.</p><p><br></p><p>이러한 지방은 외사정이라는 기구를 통해 감사하고, 상수리 제도를 통해서 권력을 약화시켰습니다.</p><p><br></p><p>상주하는 군대로는 10정이 있습니다.</p><p><br></p><p>특수구역으로는 5소경이 있는데 이는 수도의 치우침을 보완하고, 지방문화가 발달시키기 위해서 구역을 만들었습니다.</p><p><br></p><p>원주에 북원경, 남원에 남원경, 충주에 중원경, 청주에 서원경, 김해에 금관경이 존재했습니다.</p><p><br></p><p><br></p><p>발해의 발전과 쇠망</p><p><br></p><p>발해는 분명 고구려를 계승한 역사이고, 우리가 인식해야할 역사이지만 사료가 많지 않아 많은 자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p><p><br></p><p>먼저 대조영이 동모산에서 698년에 건국을 하였고, 무왕, 문왕, 선왕 차례대로 성쇠를 계속해왔으며, 10세기에 급작스러운 멸망을 한 국가 입니다.</p><p><br></p><p>무왕은 상당한 정복군주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어, 북만주를 장악하였고, 요서 및 산중 지역을 공격하엿습니다. 또한, 인안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p><p><br></p><p>중국과의 별개로 선을 그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p><p><br></p><p>이 때의 외교는 돌권 일본과 친선외교이고, 당, 흑수말갈, 신라와 적대적인 성격을 취하였습니다.</p><p><br></p><p>문왕시기에는 무왕과는 다르게 당나라와 친선을 유지하고, 신라와의 교류를 시작하엿습니다.</p><p><br></p><p>또한, 수도를 동모산 -> 중경 -> 상경으로 천도를 하였습니다.</p><p><br></p><p>선왕시기는 발해의 전성기 였으며, 드디어 요동에 진출을 하여 한국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해동성국으로 불렸습니다.</p><p><br></p><p>그 이후에 926년에 거란이 침략하여 발해는 멸망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됩니다.</p><p><br></p><p>발해는 역사적인 사료가 별로 없지만, 우리가 중요하게 봐야 할 것은 우리의 역사로서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명확히 알아야 합니다.</p><p><br></p><p>그를 통해, 중국의 동북공정을 막아낼 수 있는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p><p><br></p><p>고구려의 계승 근거로는 정치적으로 문왕이 일본에 국서를 보낸적이 있는데 이때, 스스로 고려왕이라고 칭한 것이 있습니다.</p><p><br></p><p>이 고려왕은 그 시기에 고구려왕을 고려왕이라고 불렀다고 하니 고구려의 계승국가로 볼 수 있습니다.</p><p><br></p><p>또한 지배층은 고구려인으로 구성되어 있고, 피지배층이 말갈인으로 이원적인 지배구조를 가지고 있었으며,</p><p><br></p><p>고구려부터 내려온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온돌문화가 발해에서도 발견되고 있습니다.</p><p><br></p><p>하지만, 이에 반하여 당의 영향을 받은 것도 있는데,</p><p><br></p><p>이는 행정체제인 3성 6부 체제가 있습니다.</p><p><br></p><p>또한 상경에 있는 용천부 앞에 주작대로라는, 궁전 앞에 큰 대로가 있는데 이는 중국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p><p><br></p><p>이번에도 쓰고 나니깐 많이 어색하네요..</p><p><br></p><p>앞으로 더 노력하겠습니다. </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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