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조선은 고려말 폐단을 개혁한다는 명분으로 역성쿠데타로 세워진 왕조이다.</div> <div>기본적으로 유교를 바탕으로 민본사상이 있었으며</div> <div>중국 명황제나 일본 무사난립이나 절대군주 유럽과 달리</div> <div>당시로서는 비교적 가장 소통하고 토론하는 국가시스템이 돌아가는 나라였다. </div> <div>(신분제도는 시대적 한계를 감안해야 함) </div> <div>국왕은 다양한 의견들을 들어야 했으며, 독단하지 않았다.</div> <div> </div> <div>세종은 백성들을 대상으로 수년에 걸친 설문조사를 거쳤으며,</div> <div>장애인 복지, 노비 복지 면 중에서는 현재 우리 서민의 삶보다 나은 점들도 있었다.</div> <div> </div> <div>조선 중기, 조세제도 변경은 여러대에 거쳐 </div> <div>의견을 듣고 변경하면서 시범지역을 확대해나갔다.</div> <div> </div> <div>조선 후기, 왕실 외척들의 세도정치와 삼정문란 부정부패로 헬조선이 되기도 했으나</div> <div>사회문제에 반말하여 갑신정변(1884),동학농민운동(1894)이 일어났고</div> <div>이는 갑오개혁(1894)에서 수용되어 신분제도를 폐지했다. </div> <div> </div> <div>(참고로 많은 사람들이 일본제국주의로 신분제가 폐지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div> <div>우리나라는 일본보다 먼저 우리나라 스스로 신분제를 폐지했다....</div> <div>오히려 일본은 현대까지도 전근대부터 내려온 권력세습, 부락민 차별 등 신분차별이 존재한다.)</div> <div> </div> <div>(유럽국가들도 1840~1850년대에 노예제를 없앴고,</div> <div>미국의 노예해방은 1865년이었다. 1894년 폐지한 우리나라는 매우 빠른 편.. </div> <div>반면에 그 서양 날도적들은 자국민 신분제는 없앴으나 대신에 제국주의 식민지 주민들을... 희생시켰다.)</div> <div> </div> <div>지금 동아시아에서 북유럽을 선망하는데,</div> <div>조선시대로 돌아간다면 </div> <div>그나마 현대기준으로 가장 인간존중을 하는 나라가 조선이었다고 본다.</div> <div> </div> <div>올해 우리나라는 그동안 켜켜이 쌓였던 문제들이 터져나왔고,</div> <div>그야말로 21세기 민주주의 국가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div> <div>우리 국민들은 불통과 실정으로 인한 고통을 겪고 있다... </div> <div> </div> <div>왕정신분제국가였던 조선에서 조차도 이러하였거늘 하면서</div> <div>많은 국민들이 답답해하는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현주소에서 볼만한 이야기 </div> <div>중흥기 영·정조 시대의 두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div> <div> </div> <div><strong><font size="3">한광국</font></strong></div> <div><strong>- 경상도 동래부 다대진 (부산광역시 사하구 다대동 다대포 일원) </strong></div> <div> </div> <div>조선시대 다대포 주민들처럼 포민(浦民), </div> <div>즉, 바닷가에서 물질을 하며 살아가는 갯마을사람들은 천민이었다.</div> <div> </div> <div>짚으로 만든 허리띠와 머리띠를 해서 구별하였고,</div> <div>정월초하루 새벽에는 고을 사또에게 절하러 가야하는 폐단으로</div> <div>조상 제사를 정월초하루(음력1월1일) 설날에 지내지 못 하고</div> <div>하루 전날인 섣달그믐(음력12월막날)에 지내야 했다.</div> <div> </div> <div>조선에서 조상을 제대로 모시지 못 하는 것은 크나큰 차별이었다.</div> <div> </div> <div>영조시대, 다대진의 아전 한광국은 아픈 몸을 이끌고 </div> <div>천리길 한양을 수차례 찾아가서 포민차별을 바로잡아 달라고 요청했다.</div> <div> </div> <div>몇년후 1763년 바닷가 갯마을사람들 포민들(어업민들)의 면천 결정이 내려졌다.</div> <div>이에 다대포는 물론, 다른 지역 어민들도 비용을 모아서</div> <div>한광국을 기리는 한광국불망비(한국을 잊지 말자고 새긴 선돌)를 2군데 세웠다.</div> <div> </div> <div><strong><font size="3">김이수</font></strong></div> <div><strong>- 전라도 나주목 흑산진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면 흑산도 일원)</strong></div> <div> </div> <div>흑산도는 외딴섬으로 나주에서 뱃길로 수백리라서 귀양지였다.</div> <div>부역이 많고 세금이 무거운 와중에</div> <div>나쁜 관리들이 부임하면 주민들의 괴로움이 더 하였다. </div> <div> </div> <div>특히, 장정 1명당 닥나무 40근에 달하는 닥나무종이 세금은 가혹했다.</div> <div>생업에도 지장을 주었고, 닥나무도 섬 안에서 바닥이 났따.</div> <div> </div> <div>이에 흑산도 주민 김이수는 섬을 대표하여</div> <div>흑산진에 탄원했으나 접수조차 되지 못 하였다.</div> <div> </div> <div>이에 김이수는 다시 나주목에 탄원했으나 </div> <div>나주목에서는 오래된 세금제도를 함부로 고치는 것을 난처해하며 반려했다.</div> <div> </div> <div>이에 김이수는 다시 전라도감영에 탄원했다.</div> <div>전라감사는 현지조사를 지시했다.</div> <div>그러나 관리들의 형식적인 조사로 흐지부지되었다.</div> <div> </div> <div>김이수는 임금에게 직접 호소하러 한양으로 갔다.</div> <div> </div> <div>이때 정조는 수원행차를 나섰다.</div> <div>정조는 임금의 행차를 보러 올 백성들을 위하여 한글로 널리 널리 알렸다.</div> <div>그리고 백성들이 격쟁(꽹과리를 쳐서 알림)하고 상언(말씀을 올림)할 수 있도록 하였다.</div> <div> </div> <div>김이수는 흑산도의 일을 격쟁하여 상언하였다.</div> <div> </div> <div>정조는 당시 행차에서 100여건의 상언을 처리하였다.</div> <div> </div> <div>이중 흑산도의 일을 두고 대신들은 우려.. 우려하였다.</div> <div>"흑산도의 닥나무종이 세금을 줄이면 </div> <div>기존에 나라와 관청에서 쓰던 그분량을 또 어딘가에서 부담해야 합니다."</div> <div> </div> <div>이에 정조는 "세금수입이 줄어드는 것은 나라에서 감수하여야 한다"고 했다.</div> <div>손상익하(損上益下) 위에서 덜어냄으로써 아래는 얻는다는 말이다.</div> <div> </div> <div>1791년, 불합리하고 가혹했던 흑산도의 닥나무종이 세금은 폐지되었다.</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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