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생태사학자인 김동진박사가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조선호랑이가 어떻게 멸종에 이르게 되었는지 자세히 설명해주시네요</div><a target="_blank" href="http://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725419.html?_fr=sr1">http://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725419.html?_fr=sr1</a> <div><b>1. 호랑이 주 서식지는 산속이 아니라 습지나 갈대숲이다. 산속은 먹이잡는데 불리하다</b></div> <div><b>2. 조선왕조는 체계적으로 상당한 수의 호랑이를 잡았고, 이미 17세기에는 그 숫자가 현저하게 줄어있었다</b></div> <div><br></div> <div>1389년 80여만결이던 농지는 16세기 후반 150만~170만결로 늘어났다. 야생에 살던 호랑이와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호환이 잦아질 수밖에 없었다. </div> <div>농지확장과 동시에 국가적인 범(호랑이·표범) 포획 작업이 조선왕조 내내 이어졌다. 범 포획 전문 군사조직인 ‘착호군’이 활동했고 호피공납제, 포호포상제, 호속목 등 호랑이 잡는 다양한 제도가 시행됐다. </div> <div><br></div> <div>중앙집권체제 강화, 관료제 발전 등 조선의 근대성이 강화되면서 동시에 호랑이와 같은 자연은 ‘관리’받았다. 호랑이의 이동 통로, 서식지 등이 기록됐다. 국가적인 호랑이 퇴치 작업으로 조선 말기 호랑이 개체수는 이미 꽤 감소해 있었다.</div> <div><br></div> <div>건국 초기부터 전국 330여 군·현에서 매년 겨울 세달 동안 호랑이와 표범을 매달 1마리씩 사냥해 가죽 3장을 공물과 진상 등으로 바치게 했다. </div> <div>성종 때 1만장 넘는 호피가 쌓여 썩어가고 있었다는 기록도 나온다. 이러한 제도가 200년 이상 안정적으로 시행됐다. </div> <div><br></div> <div>1<span style="font-size:9pt;line-height:1.5;">670년께에는 우역이 만연하면서 호랑이의 먹이인 사슴과 멧돼지가 전멸했다. 당시 호랑이가 미쳐서 백주 대낮에 마을을 횡행했다는 기록이 여럿 있다.</span></div> <div>먹을 게 없어서 마을까지 내려온 것이다. 더이상 호랑이와 표범을 잡기 어려워지자 17세기 초에는 군·현별로 바치는 호피와 표피의 수를 1~2장으로 줄여주고, 1724년에는 호속목(범을 잡지 못한 대가로 내는 벌금) 제도도 혁파된다</div> <div><b><br></b></div> <div><b>3. 조선 호랑이의 멸종은 근대성이 커지며 인간이 자연에 대한 관리를 강화하며 빚어진 결과이다</b></div> <div>대부분의 사람들은 호랑이, 표범, 늑대 등 야생동물이 해롭다고 느꼈고 그것을 없애는 데 특별한 거부반응은 없었다. </div> <div>1917년 일본인 자본가 야마모토 다다사부로의 정호군이 대대적으로 벌인 호랑이 사냥 때도 구경하고 환영하는 사람들이 몰렸다. </div> <div><br></div> <div><b>지금과 같은 야생보전 개념이 없었을 때다. </b></div> <div><b>민중은 호랑이를 영험한 동물로 여겼지만, 호랑이 잡지 말자고 했던 건 아니었다. </b></div> <div><b>낭만주의적으로 보지 않고 시대적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b></div>
댓글 분란 또는 분쟁 때문에 전체 댓글이 블라인드 처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