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 21년 8월 14일<br><br><p>임금이 말하기를,</p> <p><br></p> <p>“백두산 정계(定界)에 대해서는 혹 부족한 곳이 없던가?”</p> <p><br></p> <p>하니, 윤용이 말하기를,</p> <p><br></p> <p><span style="background-color:#7c43b1;color:#ffffff;">“토문강(土門江)에 목극등(穆克登)의 비(碑)가 있는데 여기서 바라보니, 모두 공활(空闊)하여 쓸모없는 땅이었습니다</span>. </p> <p><br></p> <p>잃더라도 해로울 것이 없겠습니다.”</p> <p><br></p> <p>숙종 28년 12월 7일</p> <p><br></p> <p>백두산 정계가 잘못된 것에 대한 겸문학 홍치중의 상소. 이에 대한 논의와 거산 찰방 허양의 공술 내용</p> <p><br></p> <p>이 기록은 상당히 길어 핵심부분만 나열하겠음</p> <p><br></p> <p>“신(臣)이 북관(北關)에 있을 때 백두산의 푯말 세우는 곳을 살펴보았습니다.</p> <p><br></p> <p> 대저 백두산의 동쪽 진장산(眞長山)안에서 나와 합쳐져 두만강(豆滿江)이 되는 물이 무릇 4갈래인데, </p> <p><br></p> <p>그 중에 가장 남쪽의 네번째 갈래는 곧 북병사(北兵使) 장한상(張漢相)이 가장 먼저 가서 살펴보려 하였다가 </p> <p><br></p> <p>빙설(氷雪)에 막혀 전진(前進)하지 못한 곳입니다. 그 북쪽의 세번째 갈래는 곧 북우후(北虞候) 김사정(金嗣鼎) 등이 </p> <p><br></p> <p>추후(追後)로 간심(看審)한 곳이고, 그 북쪽의 두번째 갈래는 곧 나난 만호(羅暖萬戶) 박도상(朴道常)이 청차(淸差)가 나왔을 때 </p> <p><br></p> <p>도로(道路)에 관한 차원으로서 따라갔다가 찾아낸 것입니다. 그 가장 북쪽의 첫번째 갈래는 수원(水源)이 조금 짧고 </p> <p><br></p> <p>두 번째 갈래와 거리가 가장 가깝기 때문에 하류(下流)에서 두번째 갈래로 흘러 들어 </p> <p><br></p> <p>두만강의 최초의 원류(源流)가 된 것이고, 청차가 가리키며 ‘강의 원류가 땅속으로 들어가 속으로 흐르다가 </p> <p><br></p> <p>도로 솟아나는 물이라.’고 한 것은 첫번째 갈래의 북쪽 10여 리 밖 사봉(沙峰)밑에 있는 것입니다. </p> <p><br></p> <p>당초 청차가 백두산에서 내려와 수원(水源)을 두루 찾을 때 이 지역에 당도하자 말을 멈추고 말하기를,</p> <p><br></p> <p> ‘이것이 곧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이라.’고 하고, 다시 그 하류를 찾아보지 않고 육지(陸地)로 해서 길을 갔습니다. </p> <p><br></p> <p>두 번째 갈래에 당도하자, 첫번째 갈래가 흘러와 합쳐지는 것을 보고 ‘그 물이 과연 여기서 합쳐지니, </p> <p><br></p> <p>그것이 토문강의 근원임이 명백하고 확실하여 의심할 것이 없다. 이것으로 경계(境界)를 정한다.’고 하였습니다. </p> <p><br></p> <p>이상이 여러 수원의 갈래로 경계를 정하게 된 곡절의 대략입니다.</p> <p><br></p> <p>신(臣)이 여러 차사원(差使員)들을 데리고 청차가 이른바 강의 수원이 도로 들어가는 곳이란 곳에 도착하자, </p> <p><br></p> <p>감역(監役)과 차원(差員) 모두가 하는 말이 ‘이 물이 비록 총관(摠管)이 정한 바 강의 수원이지만, </p> <p><br></p> <p>그때는 일이 급박하여 미처 그 하류(下流)를 두루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푯말을 세우게 되었으니 </p> <p><br></p> <p>한 번 가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p> <p><br></p> <p>그래서 신이 허(許)와 박(朴)【거산 찰방(居山察訪) 허양(許樑)과 나난 만호(羅暖萬戶) 박도상(朴道常)이다.】 </p> <p><br></p> <p>두 차원을 시켜 함께 가서 살펴보게 했더니, 돌아와서 고하기를, ‘흐름을 따라 거의 30리를 가니 </p> <p><br></p> <p>이 물의 하류는 또 북쪽에서 내려오는 딴 물과 합쳐 점점 동북(東北)을 향해 갔고, 두만강에는 속하지 않았습니다. </p> <p><br></p> <p>기필코 끝까지 찾아보려고 한다면 사세로 보아 장차 오랑캐들 지역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며, </p> <p><br></p> <p>만약 혹시라도 피인(彼人)들을 만난다면 일이 불편하게 되겠기에 앞질러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p> <p><br></p> <p>대개 청차(淸差)는 단지 물이 나오는 곳 및 첫 번째 갈래와 두 번째 갈래가 합쳐져 흐르는 곳만 보았을 뿐이고, </p> <p><br></p> <p>일찍이 물을 따라 내려가 끝까지 흘러가는 곳을 찾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본 물은 딴 곳을 향해 흘러가고 </p> <p><br></p> <p>중간에 따로 이른바 첫 번째 갈래가 있어 두 번째 갈래로 흘러와 합해지는 것을 알지 못하여, </p> <p><br></p> <p>그가 본 것이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인 줄 잘못 알았던 것이니, 이는 진실로 경솔한 소치에서 나온 것입니다. </p> <p><br></p> <p>이미 강의 수원이 과연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청차가 정한 것임을 핑계로 이 물에다 막바로 푯말을 세운다면, </p> <p><br></p> <p>하류(下流)는 이미 저들의 땅으로 들어가 향해간 곳을 알지 못하는데다가 국경의 한계는 다시 의거할 데가 없을 것이니, </p> <p><br></p> <p>뒷날 난처한 염려가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臣)이 여러 차원들과 함께 상의하기를, </p> <p><br></p> <p>‘이미 잘못 잡은 강의 수원을 비록 마음대로 우리가 변경할 수는 없지만, 하류가 어떠한지는 논할 것 없이 </p> <p><br></p> <p>물의 흐름이 끊어진 곳 이상은 진실로 마땅히 푯말을 세우는 안이 되어야 하니, 먼저 비(碑)를 세운 곳에서부터 역사를 시작하여 </p> <p><br></p> <p>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되, 나무가 없고 돌만 있으면 돌로 쌓아 돈대를 만들고 나무만 있고 돌이 없으면 </p> <p><br></p> <p>나무를 베어 목책(木柵)을 세우기로 한다. 오늘날 조정의 명령이 당초부터 한 차례 거행으로 역사를 마치려는 뜻이 아니었으니, </p> <p><br></p> <p>빨리 마치려고 하지 말고 오직 견고하게 하기를 힘쓰되 이른바 물이 나오는 곳에까지 이르지 아니하여 </p> <p><br></p> <p>우선 역사를 정지하고 돌아간다. 강의 수원을 변통하는 것에 있어서는 서서히 조가(朝家)의 의논이 결정되기를 기다렸다가 </p> <p><br></p> <p>내년 역사를 계속할 때 진퇴(進退)하는 바탕으로 삼아도 늦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더니, 차원들이 모두 옳다고 하였습니다. </p> <p><br></p> <p>그런데 신이 뒤에 들으니, 허양(許樑) 등이 미봉(彌縫)하는 데만 급급하여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목책을 </p> <p><br></p> <p>두 번째 갈래의 수원에다 대놓았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목책이 끝나는 곳은 바로 국경의 한계가 나누어지는 곳입니다. </p> <p><br></p> <p>두 나라의 경계를 정하는 일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 한 두 차원의 뜻만으로 조정에서 알지도 못하는 물에다 </p> <p><br></p> <p>강역(疆域)을 제멋대로 정했으니, 이는 마땅히 징치(懲治)하여 강토에 관한 일을 중히 여김을 보여야 합니다. </p> <p><br></p> <p>그리고 강의 수원에 관한 한 가지 일은 또한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보다 좋은 대로 잘 처리하게 하소서.”하니, </p> <p><br></p> <p>임금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라고 명하였다. </p> <p><br></p> <p>영의정 이유(李濡)가 연석(筵席)에서 아뢰기를,</p> <p><br></p> <p>“목차(穆差)가 정한 수원(水源)은 이미 잘못된 것인데, 차원들이 감사(監司)에게 말하지도 않고 평사(評事)의 지휘도 듣지 아니한 채 </p> <p><br></p> <p>멋대로 푯말을 세웠으니, 일이 지극히 놀랍습니다. 청컨대 잡아다 추문(推問)하고, 감사도 또한 추고(推考)하소서.”</p> <p><br></p> <p>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형조 판서 박권(朴權)이 아뢰기를,</p> <p><br></p> <p>“홍치중의 상소에 보건대, 수원(水源) 중에 최초의 한 갈래는 곧 목차가 정한 것인데, 이번에 세우는 푯말은 안쪽으로 거의</p> <p><br></p> <p> 20리 가량 옮겨 세웠다고 했습니다. 만일 뒷날 그들이 와서 보고 멋대로 옮긴 까닭을 묻는다면 무슨 말로 답하겠습니까. </p> <p><br></p> <p>목차가 정한 물이 비록 북쪽으로 뻗어나갔다 해도 진장산(眞長山) 밖을 굽어 돌아 흘러내려 가는 것인 듯하고, </p> <p><br></p> <p>그 사이의 연무(延袤)16360) 가 비록 넓다 하지만 이미 목차가 정한 것이니 이대로 한계를 작정해도 </p> <p><br></p> <p>진실로 해로울 것이 없을 것입니다. 끝내 과연 북쪽으로 뻗어나가 두만강에 속하지 않는 것이라면 목차에게 말을 전하되, </p> <p><br></p> <p>‘당초에 정한 것은 잘못 안 것 같다.’고 한다면, 그들이 마땅히 답변하는 말이 있을 것입니다.”</p><br>
Here we go, come with me,
There's a world out there that we should see,
Take my hand, close your eyes
With you right here, I'm a rockete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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