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font size="4" color="#0c0c0c">이런기사를 보면서 궁금해지는 것은 </font></div> <div><font size="4" color="#0c0c0c"><br></font></div> <div><font size="4" color="#0c0c0c">1.당시 에도정부는 수시로 흉작때문에 쌀이없어 굶은 농민들의 반란이 있었는데도</font></div> <div><font size="4" color="#0c0c0c"><br></font></div> <div><span style="color:#0c0c0c;font-size:large;line-height:27px;">일본측은 조선은 오키나와나 훗카이도같은 일본의 사실상의 식민지에서 본국에 인사하러 오는거라고 하면서도</span></div> <div><span style="color:#0c0c0c;font-size:large;line-height:27px;"><br></span></div> <div><font size="4" color="#0c0c0c">조선통신사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span style="line-height:27px;">전국 쌀 생산량은 2580만 석안팍일때 320만석을 사용했는지..</span></font></div> <div><span style="line-height:27px;"><font size="4" color="#0c0c0c"><br></font></span></div> <div><span style="line-height:27px;"><font size="4" color="#0c0c0c">(물론 조선통신사들 보단 몇배로 따라붙은 대마도넘들이 날름먹은거같기도 하지만..)</font></span></div> <div><span style="line-height:27px;"><font size="4" color="#0c0c0c"><br></font></span></div> <div><br></div> <div><br></div> <div><span style="line-height:27px;"><font size="4" color="#0c0c0c">2.병자호란전 대청제국황제 청태종 홍타이지 앞에서도 절을 안하고 꼿꼿했던 조선사신들이 </font></span></div> <div><span style="line-height:27px;"><font size="4" color="#0c0c0c"><br></font></span></div> <div><span style="line-height:27px;"><font size="4" color="#0c0c0c">일본천황도 아닌 일개 장군 급 에게 머리만 숙였는지 </font></span><span style="color:#0c0c0c;font-size:large;line-height:27px;">절을 숙였는지...궁금해지네요</span></div> <div><span style="color:#ff0000;font-size:large;line-height:27px;"><br></span></div> <div><span style="color:#ff0000;font-size:large;line-height:27px;"><br></span></div> <div><br></div> <div><a target="_blank" href="http://m.newsfund.media.daum.net/episode/1553" target="_blank">http://m.newsfund.media.daum.net/episode/1553</a></div> <div><br></div> <div> <h3 class="tit_view">3화. 한반도에서 받은 것을 부정하는 일본</h3></div> <div><br></div> <div><span class="txt_author">김종성</span><span class="txt_bar">|</span>2015.09.22</div> <div><br></div> <div>...........</div> <div><br></div> <div><img class="image_thumb" alt="한반도에서 받은 것을 부정하는 일본" src="http://t1.daumcdn.net/thumb/R708x0/?fname=http://u1.daumcdn.net/cod/de0236be8099b35738301b4899eb42d6a75d52c0"></div> <div><br></div> <div><br></div> <div> <div class="paragraph_view txt_left">일본 측의 초청을 받고 떠난 조선통신사 사절단은 한양에서 출발하여 부산과 대마도(쓰시마)를 거쳐 교토 혹은 에도(도쿄)까지 이동했다. 이들은 보통 몇 백 명으로 구성됐다. 인조 임금 때인 1636년에는 579명이고, 효종 임금 때인 1655년에는 488명이었다. <br><br>이들이 조선·일본의 공동 속국인 대마도를 지나는 순간, 사절단의 규모는 확 불어났다. 대마도인들로 구성된 수행단이 통신사 사절단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일례로, 1682년에는 대마도 수행원들이 1760명이었다. 조선통신사 일행보다 대마도 수행단이 훨씬 더 많았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사절단이었다. 양쪽을 다 합치면 전체 규모가 2천 명을 넘는 게 어렵지 않았다. <br><br>이 대규모 행렬의 이동 경비는 전적으로 일본 측이 부담했다. 일본 무신정권인 도쿠가와 막부는 통신사 행렬이 '지상 최고'의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막부는 통신사 행렬이 지나가는 도로나 교량을 정비 혹은 신설하고, 중간중간에 휴게소나 간이 화장실을 마련했다. <br><br>막부는 사절단이 육로로 이동할 때는 말들을 대령했다. 말들이 아프거나 다칠 경우에 대비해서 비슷한 숫자의 말을 '스페어'로 준비해뒀다. </div> <div class="paragraph_view txt_left"><font size="4" color="#ff0000"><br></font></div> <div class="paragraph_view txt_left"><font size="4" color="#ff0000">통신사 행렬이 중간에 선박을 이용하게 될 경우에는, 선박들을 호위할 배들을 따로 준비했다. 6척의 조선 선박과 50척의 대마도 선박을 942척의 일본 선박이 호위한 적도 있다. </font><br><br>통신사 행렬이 육로나 해로가 아닌 강을 통해 이동할 경우에도 많은 비용이 소모됐다. 이런 경우에는 사전에 지역민들을 동원해서 강바닥을 준설해두었다. 한 지역에서 몇 만 명의 주민이 동원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div> <div class="paragraph_view txt_left"><br></div> <div class="paragraph_view txt_left">준설 작업에 그치지 않고, 주민들이 직접 배를 끌어당겨야 할 때도 있었다. 강 양쪽에서 몇 백 혹은 몇 천 명이 통신사 선박들을 끌고 가는 장면을 구경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런 일에 수많은 인원을 동원하는 것 자체가 다 돈이었다. <br><br>통신사 행렬이 자기 지역을 지나가는 것도 부담스럽지만, 자기 지역에 체류하는 것은 훨씬 더 난감한 일이었다. 최상의 요리와 숙소와 여흥을 제공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비용을 사전에 준비할 목적으로, 통신사가 지나가는 지역에서는 1년 전부터 주민들에게 특별세가 부과되었다. <br><br><font color="#ff0000" size="3">이 부담이 어찌나 컸던지, 이로 인해 농민반란이 벌어진 사례가 있었을 정도다. 2천 명이 넘는 인원이 최상의 서비스를 받으며 6개월 내지 1년간 체류했으니, 통신사가 한 번 방문할 때마다 일본 전체가 홍역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font><br><br>옥스퍼드대학 동양학연구소 제임스 루이스 교수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b>통신사 접대비용은 일본 국가재정을 휘청거리게 할 만한 것이었다.</b> </div> <div class="paragraph_view txt_left"><br></div> <div class="paragraph_view txt_left"><font color="#ff0000" size="4">일례로, 1682년에 긴키 지역에서 통신사 접대에 투입된 비용은 쌀 320만 석 정도였다. </font></div> <div class="paragraph_view txt_left"><font color="#ff0000" size="4"><br></font></div> <div class="paragraph_view txt_left"><font color="#ff0000" size="4">17년 뒤인 1697년에 일본의 전국 쌀 생산량은 2580만 석이었다. 통신사 행렬이 얼마나 대단한 대접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br></font><br>통신사가 방문할 때마다 재정이 휘청거렸기 때문에, 일본의 국력이 어느 정도 신장된 18세기 후반에는 <b>"이렇게까지 조선을 접대해야 하느냐?"</b>는 불평이 막부 내부에서 나왔다. 이 정도로 통신사의 방문은 18세기 말 이전의 일본에게 부담스러운 일이었다.</div></div> <div class="paragraph_view txt_left"><br></div> <div class="paragraph_view txt_left">.........</div> <div class="paragraph_view txt_left"><br></div> <div class="paragraph_view txt_left"><br></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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