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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history_21176
    작성자 : 낙타파
    추천 : 0/6
    조회수 : 1994
    IP : 14.51.***.121
    댓글 : 8개
    등록시간 : 2015/06/06 07:13:59
    http://todayhumor.com/?history_21176 모바일
    북미대결의역사2
    [2개의 전쟁전략: 제2부]

    이란의 군사력은 북한 군사력의 1/4(25%)
     
     
     
    Journal by Whang Kil Kyoung
    2010년 3월29일 새벽 3시37분 씀
     
     
     

    미국 CIA는 북한이 파키스탄에 이어 이란에게 핵무기를 넘기려 한다는 정보를 획득하게 됩니다.  유대자본에게 있어 이건 숨이 턱 막히는 정보입니다.  저절로 탄식이 나오게 하는 것이 이란의 경우입니다.  이란이 핵무기를 갖는다면 그 자체가 악몽입니다. 정말 다른 차원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막아야 합니다.


    당시 파키스탄 군부에는 유대자본의 끈이 잠복 중이었으므로 미국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파키스탄은 핵무기를 넘겨 받은 1998년에서 한해도 지나지 않은 1999년 10월 인디아출생 육군참모총장 페르베즈 무샤라프(Pervez Musharraf)가 군사 구테타를 일으켜 파키스탄 대통령이 됩니다.  그는 1999년 10월에서 2008년 8월까지 파키스탄 대통령으로 재임했습니다.  무샤라프는 북한과의 핵 거래가 끝나자마자 곧바로 군사 구테타를 일으켜 핵무기를 접수한 셈입니다.


    파키스탄 부토 전 총리의 노력으로 얻은 핵무기는 무샤라프 군사정부에 의해 결국 유대자본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고 압둘 카다르 칸 박사는 체포되었습니다.  칸 박사는 그가 알고 있는 북한 관련 정보를 어두컴컴한 취조실에서 진술 해야만 했으며 정작 진술서에는 거짓 진술로 채워졌습니다.  유대자본의 침투력을 실감케 하는 장면입니다.  유대자본이 왜 약소국에게 '개방'을 요구하는지 이유를 알게 해줍니다.  북한은 절대로 '개방'을 하지 않았습니다.  은둔의 나라가 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던 것입니다.


    파키스탄 압둘 카다르 칸 박사의 역할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이 언론에 회자되고 있지만 대부분 거짓말입니다.  칸 박사는 2008년 6월 과 전화 인터뷰에서 데이비드 올브라이트 미국 과학국제안보연구소(ISIS) 소장이 자신의 진술서 등을 인용해 펴낸 보고서를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런 주장은 모두 거짓이며 한치의 진실도 담겨 있지 않은 헛소리다.  서방 국가들이 (핵) 기술 제공자들이다.  그들이 팔았다. 왜 그들은 이스라엘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는 펴내지 않느냐, 핵 문제에 관한 한 이스라엘 이야기는 단 한 단어도 포함되지 않는다.] - 연합뉴스 2008.06.17 17:23


    "서방 국가들이 (핵) 기술 제공자들이다.  그들이 팔았다.  왜 그들은 이스라엘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는 펴내지 않느냐"라는 발언의 의미는 즉, 서방(유대자본)이야말로 이스라엘과 인디아에 핵을 팔아먹은 당사자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2009년 군사 정부의 강요에 의해 작성된 자기의 진술서가 서방에 의해 그들의 원죄를 숨기는데 사용된다는 사실에 분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북한에게 농축우라늄 기술과 핵무기 제조 기술을 이전한 나라가 파키스탄인 것처럼 거꾸로 꾸며대는 유대자본의 짓거리에 진절머리를 느끼면서 내어 놓은 대답입니다.  칸 박사는 부토 총리의 승인 아래 북한으로부터 몇 개의 핵무기와 미사일 기술을 구입하였습니다.


    칸 박사는 2008년 5월 <돈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나는 이미 작성된 폭로 기자회견문을 받았다. 그렇지만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을 말했어야 했는데.. (핵 이전 사실을) 시인하더라도 내게 아무런 해가 없을 것이라던 친구들 말에 속았다"라며 당시 발표가 거짓임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는 그를 안심시켰던 인물로 초우더리 수자트 후세인 파키스탄무슬림리그(PML-Q) 대표와 S M 자파르 상원의원을 지목하였습니다. (세계일보 2008.05.30 18:05)


    유대자본은 파키스탄에 대한 북한의 핵 확산 때까지만 해도 걱정하지는 않았습니다.  파키스탄 군부에 심어놓은 무샤라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구조는 북한 관련 정보를 얻는데 유용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1994년 북한과 이란의 핵 거래는 남아프리카공화국, 파키스탄과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이란의 경우 종교적, 군사적 이유로 유대인과 유대자본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반제국주의 국가입니다.  이란은 1980년 9월 미국의 지원을 받는 수니파 이라크의 선제공격을 받아 1988년 8월 유엔 정전결의안에 따라 정전할때까지 8년간 고난의 전쟁을 치루었는데 이때 북한을 포함한 공산진영의 군사지원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란-이라크 전쟁이 핵 거래와 관련이 있다는 증거는 없지만 이란은 늘 생존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1991년 소련이 해체 되어 공산진영이 무력화 되자 중동에서 시리아와 함께 겨우 살아남아 있는 이란으로서는 위기에 처한 상태였습니다.  만약 이란이 핵무기를 얻게 된다면 중동에서 이란의 영향력을 확대시키는 촉진제가 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이스라엘에 해를 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란이 1980년대 말 파키스탄에서 100억 달러를 주고 핵무기 구입을 시도했다.  이란 군 고위지도자였던 알리 샴크하니가 파키스탄에 도착해 3개의 완성된 핵폭탄을 요구했었다.  미르자 아스람 베그 전 육군참모총장이 이란으로부터 돈을 받는 대신 이란에 핵 협력을 제공하도록 베나지르 부토 당시 총리 및 보좌관들에게 촉구 했고, 결국 낡은 원심분리기(P-1) 2대를 박스에 포장해 설계도와 함께 이란에 건네줬다. 1994년 또는 1995년에 이란 당국자들과 다시 직접 접촉을 가졌으며, 이 때 좀 더 진전된 P-2 원심분리기 설계도를 넘겨주는데 동의했다.] - 연합뉴스 2010.03.15 01:00


    이 내용은 칸 박사가 무샤라프 군사정권의 강압적인 취조에서 유대자본이 필요로 하는 내용으로 진술한 내용 중 일부입니다.  위의 내용 중에서 '파키스탄' 대신에 '북한'이라는 단어로 교체하면 곧바로 진실이 됩니다.  바로 잡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란이 1980년대 말 북한에게서 100억 달러를 주고 핵무기 구입을 시도했다. 거의 100억 달러에 핵무기를 구입하려는 이란의 시도였다. 이란 군 고위지도자였던 알리 샴크하니가 북한에 도착해 3개의 완성된 핵폭탄을 요구했었다. 결국 낡은 원심분리기(P-1) 2대를 박스에 포장해 설계도와 함께 이란에 건네줬다. 북한은 1994년에 이란 당국자들과 다시 직접 접촉을 가졌으며, 이 때 좀 더 진전된 P-2 원심분리기 설계도를 넘겨주는데 동의했다.] - 연합뉴스 2010.03.15 01:00


    P-1 원심분리기가 이란으로 넘어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P-2 원심분리기까지 넘겨주기로 하였다는 내용입니다.  파키스탄의 정치 구도로 보았을 때 북-이란 간의 이러한 핵 거래 상황을 미국은 당시 알았을 것입니다.  칸 박사와 나눈 핵 거래 정보가 무샤라프 일당 등을 통해 미국 CIA로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북한은 이러한 파키스탄의 정치적 실태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칸 박사라는 매개를 통해 북한은 클로즈트랙의 진척상황을 미국이 인지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되므로 결과적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우와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북한의 핵거래는 순서가 있습니다.  구형(P-1) 농축우라늄 기계를 넘겨주었다가 다시 회수하고 다시 신형(P-2)으로 교체해주고 최종적으로 신형(P-2)을 회수하고, 마지막으로 핵무기를 넘겨주는 것은 미국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도록 하는 차원입니다.  그러므로 P-1, P-2를 통해 생산되는 저농축 우라늄을 북한이 회수해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북한은 핵무기의 확산 자체가 목적은 아니니까요.  미국은 흥분하게 되어 있습니다.


    북한은 이러한 고도의 계산된 압박을 통해 미국이 협상에 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로 몰아 넣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한을 못박아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듭니다.  1994년은 북한이 못박은 시한의 해입니다.  베트남의 예와 같이 평화협정을 맺고 미국이 물러가는 것을 북한은 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지구가 깨어지는 전쟁이거나 평화 협상의 타결이거나 미국은 선택을 해야 합니다.


    1994년 3월17일 2년 차이던 김영삼 대통령은 와의 인터뷰에서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가 필요하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합니다.  그러자, 1994 년 3월19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실무접촉에서 북측 박영수 대표는 남측 대표단 앞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하였습니다.  이 발언은 영상으로 공개되어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남한이 발칵 뒤집어진 내용으로서 소위 '서울 불바다'발언입니다.


    [팀스피리트 훈련이 재개되고, 패트리어트 미사일 배치 계획을 그대로 밀고 가고, 우리에게 제제를 한다는 것에 동참을 한다고 하는 것은 대화를 포기하겠다는 것이고, 분명 우리와 대결을 하겠다는 선언이고, 다른 하나는 나아가서 엄중하게 전쟁을 하겠다는 선언입니다. 남측은 전쟁이냐? 대화냐?를 분명히 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은 불바다가 되고 말아요 송선생도 아마 살아나기 어려울 거에요.]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말아요."
    "아니 지금..."
    "송선생도 아마 살아나기 어려울 게요."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아니, 이에 대해 우리가 가만히 있을거 같아요?"


    박양수 대표의 발언은 그냥 홧김에 한 발언이 아니고 당시 멀지 않는 미래에 발발할 전쟁에 대한 의지를 걸어두고 미국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순서일 뿐입니다.  1993년 NPT를 탈퇴하고, 또 FOBS(부분 궤도 폭격 체계, 위성폭탄)을 공개하는 등의 조치와 병행하여 뉴욕채널을 통해 북-미 협상이 전개되고 있는 가운데 한정된 시한을 설정하여 미국을 압박하는 차원의 발언입니다.  미국도 물러설 태세가 없어 전쟁은 불가피한 것처럼 행동합니다.


    북한이 시한을 미국에게 통보하는 행위는 매우 공세적입니다.  아니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봐야 합니다.  미국으로 하여금 전쟁을 먼저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니까요.  미국은 1993년에 이어 1994년에도 팀스피리트 훈련을 실시하였습니다.  미국이 대규모의 무력이 한반도에 전개할 수 있는 기회이고 이 기회를 통해 전쟁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물론 북한은 이때 전투태세를 갖추어 놓고 미국이 전쟁을 선택할 때 대규모 보복과 3일내 완전 점령이라는 작전지도를 펼쳐 놓고 있는 것입니다.  박양수 대표는 이러한 시점에 남한에게는 현실을 직시하라는 충고의 발언이고 미국에게는 전쟁을 선택해보라는 공세적인 태도입니다.


    당시에 이러한 급박한 상황을 설명하는 내용으로 회자되는 내용 중에는 다음과 같은 재미 있는 내용들이 미국의 의도에 의해 전파되기도 하였습니다.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미국이 북한의 영변 핵 시설을 스텔스 전폭기를 이용하여 정밀타격을 시작으로 전쟁을 개시하는 군사 작전이 담긴 '작전계획 5026'이라는 선제공격 시나리오와 이후 전면 진공을 통해 북한을 완전히 점령한다는 작전계획이 담긴 '작전계획 5027' 시나리오를 실행에 옮기려 하였다.


    2) 미국은 전쟁을 개시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컴퓨터 시물레이션을 통해 가상 전쟁을 점검한 결과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미군은 약 10만 명이 사망하고 한국군은 50 만 명이 사망하며, 민간인 수 백 만 명과 전쟁비용이 1조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되어 미국은 전쟁시작 한 두 시간 전에 전쟁을 포기하였다.


    3) 1994년 6월16일, 레이니 주한 미대사는 세 손녀에게 사흘 뒤 한국을 떠나라고 지시했다.


    4) 이때 김영삼 정부는 일촉즉발의 전쟁계획을 알고 당시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박관용 전 국회의장이 뒤늦게 낌새를 안 김영삼 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절대 전쟁은 안 된다"고 강하게 항의했다.]


    이 내용은 모두 거짓입니다.  작전계획을 공개하는 미친 나라는 없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미국이 작전계획을 흘리는 것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일로서 비참한 처지에 있었던 자기의 체면을 살려보고자 언론을 조작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컴퓨터 시물레이션으로 가상전쟁을 점검했다는 것 또한 비밀에 쌓인 북한의 군사력을 알지 못하는 처지에서 컴퓨터 시물레이션이라는 것이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서 그냥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합니다.  주한 미대사 3손녀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미국은 비밀리에 휴전선 부근 미국인을 귀국하도록 권고하는 조치도 취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미국의 내심과 달리 전쟁불사 의지를 표현하는 행위에 그치는 것이고, 김영삼 대통령의 전화통화 이야기도 그와 유대자본과의 관계로 보았을 때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일촉즉발의 전쟁 상황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당시 미국은 팀스피리트 훈련을 기회로 삼아 전쟁을 개시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미국은 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음은 북한이 전쟁을 개시하는 순서가 남았습니다.  팀스피리트 훈련으로 물러난 미군의 무력 태평양 함대는 군함 33척과 항공모함 2척이 일본 가까이 동해에 집결되어 있었습니다.  이미 북한은 미군의 추가 배치가 있을 경우 이를 군사공격으로 간주하고 선제공격을 하겠다고 선언한 상황이었습니다.  북한은 어떻게 태세를 갖추었을까요?  5751번 게시글 ( http://cafe.naver.com/kocoree/5751 ) 첫번째 사진을 보십시오.  그 사진이 방어태세일까요? 밀고 내려오기 직전에 사진일까요?  그 사진은 2009년 3월경의 사진입니다.  그러나 1994년에도 똑같습니다.


    1994 년 5월13일, 북한은 오픈트랙에서 또다시 강력한 공세조치를 취했습니다.  국제원자력기구 사찰단이 도착하기 전에 영변에 있는 5메가와트급 흑연감속로에서 사용한 연료봉을 전격적으로 꺼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연료봉 꺼내기 작업을 전격 강행함으로써 국제원자력기구가 북한이 플루토늄을 얼마나 추출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는 근거는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1994 년 6월3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에 대해 경제제재 조치를 취하도록 하겠다고 발표하였고, 6월10일(북한이 연료봉 꺼내기 작업을 마친 날) 국제원자력기구 이사회는 북한에 대한 제재 결의안을 채택하였습니다.  이 제재 결의안이 나오자 북한은 6월13일 국제원자력기구에서 즉각 탈퇴하고, 어떠한 사찰도 더 이상 받지 않겠으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제재조치를 취할 경우 이를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1994 년 6월8일, 북한은 영변 원자로에서 핵연료봉을 인출하기 시작하면서, 동시에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전격 탈퇴합니다.  ‘불바다 발언’에 이어 이러한 전개양상에 대한 여파는 직접적이었습니다.  남한에서는 외형상 주식시장이 폭락하고 사재기 현상이 속출하였으며, 미국은 주한미군 가족들의 우선 철수 등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반도 전쟁 위기가 현실적으로 직면한 것입니다.  물론 미국의 별 의미 없는 벼랑 끝 전술입니다.  북한은 전쟁을 통해서 하느냐, 평화를 통해서 하느냐.. 두 가지밖에 모르고, 선택은 한정된 시한 내에 미국의 선택에 달려 있을 뿐인데 말입니다.


    미국은 결국 평화적인 방법을 선택하였습니다.  따라서 유엔본부 북한 대사관의 뉴욕채널을 통해 북-미는 대강의 합의를 완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역할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1994 년 6월15일,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기자와 함께 전격 방북 길에 오릅니다.  그는 판문점을 거쳐 김일성 주석을 만났습니다.  두 사람이 핵개발 동결과 핵사찰 원상복귀에 전격 합의한 것처럼 연극을 함으로써, 전쟁 일보 직전의 한반도 상황은 종료됩니다.  카터의 방북은 또 경수로를 제공하는 대가로 핵을 포기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제네바 합의의 단초가 됐습니다.  미국은 김영삼 대통령과의 정상 회담을 갖는 절차에 대해서도 북한의 요구를 수용하였습니다.


    카터 전 대통령이 기자를 대동하고 북한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가 이미 합의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6월17일 카터와 김일성 주석이 만난 자리에서 어떠한 대화가 오갔는지는 세상에 알려진 바 없지만 합의가 이루어진 결과에 대해 고무하면서 새로운 미래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을 것으로 예측 할 수 있습니다.


    평양에 들어갔던 카터는 김일성 주석과 만난 뒤에, 자신과 함께 간 방송 카메라 앞에 서서 김일성의 발언내용을 되풀이하여 전하면서 그것이야말로 '오늘의 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매우 중요하고 긍정적인 조치'였음을 자꾸 강조하였습니다.  하지만 카터의 발언은 국제원자력기구 요원 두 사람을 축출하지 않고 영변에 그대로 머물게 하겠다는 조치 이외에는 새로운 것이 하나도 없는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도 카터가 미국에 돌아온 직후인 6월22일 미국 대통령 클린턴은 조-미 3단계 회담을 재개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오픈트랙과 클로즈트랙이 서로 다른 트랙에서 대화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일련의 대치와 극적인 타결은 핵전쟁에 의한 멸망을 두려워한 유대자본이 전쟁을 회피하기 위하여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미국은 4개월 후 북미제네바 협정에 서명을 하게 됩니다.


    이쯤에서 미국이 북한과 전쟁을 선택 하지 못했던 이유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막강한 군사력으로 그냥 밀어붙이면 될 것을 왜 미국은 작은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선택하지 못했는가?  더구나 핵 실험을 처음 했던 1971년 당시에는 북한이 미국의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미사일이 없었을 텐데 그때 미국은 왜 군사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는가?  누구나 의문을 갖게 될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미국이 핵무기를 독점하고 있던 때인 1953년 미국 태평양 사령관 맥아더가 평양과 신의주 등지에 핵무기를 투하하자고 건의 했을 때 유대자본은 동의하지 않았다는 점은 유념해야 할 대목입니다.  그때 핵무기를 투하하였다면 북한은 지금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진영에도 큰 타격이었을 것입니다.  유대자본은 '1'이 아니면 '0'이라는 접근법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늘 실용적입니다.  단정적인 사고를 가진 일반인들은 이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때에도 핵무기 사용을 거부했던 유대자본이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한 1971년 이후에 핵전쟁을 결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핵탄두 1개에 들어가는 무기급 플루토늄의 크기는 야구공보다 조금 큰 것이어서 미국의 감시망이 그것의 운반경로를 포착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물론 미국이 오늘날과 같은 처지가 될 것을 알았다면 기필코 핵전쟁이라도 선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은 바보가 아닙니다.  북한은 미국이 베트남에서 허우적거릴 때인 1971년 핵실험을 했습니다.  미국이 베트남에 발을 빼지 못하는 한 북한을 어떻게 해볼 수는 없습니다.  또한 1971년 당시 핵폭발로 추정되는 지진계의 그래프만으로 최종 결심에 이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미국이 결심과 더불어 작전계획을 세우자면 더 많은 정보가 필요했습니다.  문제는 북한에 대한 정보는 매우 제한적이라는데 있습니다.


    2008 년 6월, 칸 박사는 북한이 핵 관련 기술들을 러시아로부터 입수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모든 북한 과학자와 기술자는 러시아에서 공부했다. 북한의 핵 프로그램이 매우 정교하게 설계됐고 훌륭한 기술을 가졌다"고 말했습니다.  칸 박사의 이 같은 주장은"파키스탄이 북한, 이란, 리비아 등에 핵 기술을 제공했다"는 등의 거짓진술을 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사정에서 벗어나 그간의 진술을 뒤집은 것입니다. (YTN 2008.06.04 16:17)


    북한은 1956년부터 1991년까지 소련의 두브나 핵연구소에 2백여명의 연구인력을 파견하여 핵개발에 공동 참여한 바 있고, 1959년 북-소 원자력협정이 체결 되었고, 1962년 소련의 아이알티(IRT)-2000형 연구용 원자로를 건설하였으며, 연이어 퓨렉스 재처리 기술(Purex reprocessing technology)을 들여온 정황을 설명한 김명철 박사의 주장과 칸 박사의 "북한이 핵 관련 기술들을 러시아로부터 입수했다"는 인터뷰 내용은 일치합니다.


    당시 미국CIA는 북한의 과학자들이 소련의 두브나 핵연구소에서 핵개발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는 정보는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북한 핵 과학자들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게 된 직접적인 요인 인지 미국은 단정할 수 없습니다.  소련과의 연계 가능성에 대해서 밑줄을 긋는 것이 전부입니다.  미국 정보부의 판단은 북한이 뭔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핵실험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맴돌 수밖에 없습니다.  북한에 무엇이 있든 없든 미국은 그렇게 생각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미국과 북한 간에는 고도의 심리전이 펼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불확실한 사실이 존재하고 그 불확실성이 미래를 망칠 수 있다는 다급함이 유대자본에게 있다는 것을 북한은 알고 있으며, 이러한 취약한 부분을 이용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과의 핵거래, 파키스탄과의 핵거래는 일측면 심리전의 일환으로 전개된 것입니다.  짐작은 할 수 있으나 단정할 수는 없게 만들고 하나씩 공개를 해나가되 또 다른 의문이 생기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거짓은 믿게 만들고 진실은 모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미국 정보부는 "소련이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북한에 전달했다"는 정보, "핵잠수함을 전달했다"는 것과 같은 불확실한 정보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미국이 알아 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심리전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미루나무 벌목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1976년 6월 미국이 팀스피리트 훈련이 실시되자 2개월 뒤인 8월18일 미군 장교 3명과 미군 병사 7명이 노동자 다섯 사람을 데리고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있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다리 부근에 있는 커다란 미루나무가 미군 경비병의 관측시야를 가린다고 하면서 벌목작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8월 6일에도 그 나무를 자르려고 현장에 나타났다가 북한군 경비병에게 제지 당한 바 있었습니다.


    현장에서는 미군이 북한군의 제지를 무시하고, 남한 노동자들에게 나무를 자르라고 명령하자 북한군은 현장을 지휘하고 있던 미군 장교에게 달려들어 그 자리에서 때려눕혔습니다.  그러자 다른 미군이 노동자가 들고 있던 도끼를 북한군에게 던졌습니다. 이를 피한 북한군은 그 도끼를 집어 들고 쫓아 가서 미군을 죽여버리고 말았습니다.  미군 경비책임장교인 대위 한 사람과 중위 한 사람이 현장에서 맞아 죽었고, 다른 미군 여덟 명은 부상을 입었습니다.


    이를 빌미로 미국은 미루나무 자르기 작전을 '폴 번연 작전(Operation Paul Bunyan)'이라고 불리는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이 작전에서 미국은 에프(F)-111, 에프(F)-4 비행대대를 주한미군 기지에 배치했고, 항공모함 미드웨이호를 앞세운 전투선단을 동해에 출동시켰으며,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미 해병대 1천8백명이 포함된 미 지상군 1만2천명에게 한반도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내렸습니다.  주한미군사령관 스틸웰은 한-미연합군에게 완전 경계태세를 명령했고, 부사령관 쿠쉬맨은 핵공격을 할 수 있는 포대를 북한군에게 잘 보이도록 비무장지대를 따라 배치시켰습니다.


    1976 년 8월20일부터 핵무기를 실은 비(B)-52 폭격기가 괌의 앤더슨 제13공군사 공군기지에서 출격하여 한반도 상공에서 전속력으로 북상하면서 평양을 향하다가 비무장지대 상공에서 급선회하는 살벌한 위협비행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러한 핵전쟁 위협에 대항하여 북한도 전면전 태세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미국의 핵전쟁 위협에 관한 정보를 접한 북한 당국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즉각 전쟁 준비 상태로 돌입했습니다.  북한은 팀스피리트 군사훈련 하루 전날(3월8일)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전신명령'을 발표하면서 '준전시상태'를 선포하였던 터입니다.


    1976 년 8월21일 07시 정각, 주한미군과 남한군 특수부대의 호위를 받는 미군 공병대원들이 미류나무를 자르기 위해 현장에 접근하였습니다.  중대병력을 태운 헬리콥터 20대가 무장 헬리콥터 7대의 호위를 받으면서 임진강과 비무장지대 사이를 선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북한군은 '폴 번연 작전'을 현장에서 지휘하던 미군 소장 브래디가 타고 있는 헬리콥터에 사격을 가했습니다.  그 헬리콥터는 두 발을 맞고 겨우 비상 착륙했습니다.  같은 날 정오 비공개 회합에서 북한군 대표는 주한미군 대표에게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이 미군 총사령관에게 보내는 통지문을 읽어주었습니다.  이로써 북한과 미국의 위험한 심리전은 북한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적들의 침략전쟁에는 혁명전쟁으로 대답하고 적들의 기만적 <평화>술책에는 혁명적 원칙으로 대하는 것이 우리 인민의 입장입니다.  만일 미제국주의자들이 조선에서 새로운 전쟁을 일으킨다면 전체 조선인민은 단호한 반격으로 대답할 것이며 침략자들을 철저히 소멸할 것입니다.  이 전쟁에서 우리가 잃을 것은 군사분계선이고 얻을 것은 조국의 통일일 것입니다.  조선에서 평화냐 전쟁이냐 하는 문제는 결국 미제의 태도 여하에 달려있습니다.]


    이 사건은 우발적 사건이 아닙니다.  미국은 북한을 테스트 해보고자 일부러 미루나무를 자르려고 한 것이고 북한은 미국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강경하게 대응했던 사건입니다.  미국은 불확실한 정보에 고민하면서 북한이 어떤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지 북한의 반응을 통해 알아 보고 싶었고 급기야 '폴 번연 작전'을 계획하게 된 것입니다.  북한의 공세적인 모습에 미국의 결론은 "북한에게는 뭔가 있다"라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만약 그때 북한군이 미군 장교를 죽이지 않고 수세적인 모습을 보였다면 미국은 "북한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전쟁을 선택 했을 것입니다.


    이때부터 미국은 심리적으로 전쟁을 선택하지 못하게 됩니다.  '폴 번연 작전'이 패배로 끝나자 미국의 정치인 팻 부캐넌(Pat Buchanan)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것(미루나무 사건과 폴 번연 작전의 결과)은 실로 민주주의가 전세계를 휩쓸고, 미국이 냉전에서 승리하였다는 자아도취적 환상이 끝나는 순간 이었다.]


    미국의 작용에 더큰 반작용, 미국의 공세에 더큰 공세로 대답한 북한을 확인한 유대자본의 좌절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때부터 오히려 미국은 북한이 자기들을 공격할 것이라는 우려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북한은 미국으로 하여금 반드시 자기를 공격할 것이라고 믿도록 심리전을 펼쳐왔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미국 첩보함 푸에블로호 사건, 판문점 미루나무 사건, 미군 정찰기 격추 사건, 공세적인 외교 수사, 거친 군사적 발표, 불가사의한 군사행진 장면, 아리랑 집단 체조, 극도의 적대감을 표현한 도심에 내걸린 표어 등입니다.  이러한 표출은 "북한은 거칠다. 북한은 한다면 한다. 북한은 미국을 공격하는데 주저함이 없다"라는 심리적 상태를 갖도록 세뇌 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계산된 심리전은 북한이 설사 핵무기만 있고 미국을 타격할 수 있는 운반수단을 갖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미국으로서는 그러한 수단을 북한이 분명히 갖고 있을 것이며 의심의 여지 없이 자기들을 공격할 것으로 믿게 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북한이 1970년대에 미국을 타격 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고 판단했다가는 큰일 날수도 있습니다.  모르는 일입니다.  불확실성은 무서운 것입니다.


    < 연합뉴스> 2003년 1월23일자 뉴스는 <조선중앙통신>을 인용하여 “북한의 내각은 최근 `전원회의 확대회의'를 개최하였는데, 그 회의에서는 여러 토의 중에 특히 국방공업 발전에 우선적으로 힘을 쏟는 한편 '전민 무장화'와 '전국 요새 화'를 철저히 수행해 나가는 문제가 중요하게 다뤄졌다”라고 보도했습니다.  '전국 요새 화'를 2003년에도 진행중이었다는 사실로 보아 북한은 50년간 지하도시를 건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북한은 언제나 전쟁 중이고 지금 이 시각에도 계속 건설하고 있을 것입니다.


    북한은 중요한 군사시설과 무기생산시설을 지하요새에 배치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북한의 방어전략 지하요새화는 미국의 핵공격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서 1960년 '4대군사노선'에 따라 '전국토의 요새화' 선언 이래 오늘날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는 군사시설과 무기생산 시설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고 전인민의 생존 수단으로서 구축되는 것입니다.


    심지어 지하철까지 모두 미국의 핵 위협에 대처하여 건설되었습니다.  평양지하철은 평양 도심 지하에 광범위하게 설치된 군사용 기지 및 터널과 유기적인 구성을 이루고 있고, 역 자체가 지하로 매우 깊게 건설되어 있으며 승강장 입구에는 60~80톤이나 나가는 두꺼운 아연 재질의 문이 설치되어 핵 폭발에 의한 방사선을 차단하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극비 핵연구소인 로스 알라모스 연구소장 출신의 지그프 리드 헤커 박사는 "40㎏의 플루토늄은 몇개의 서류가방에 나눠 1만5000개의 지하터널 시설 중 하나에 감춰두면 그 누구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가장 큰 걱정은 북한 정권이 이 물질을 테러리스트에게 팔 수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문화일보 2006.01.02 14:35)


    1 만5000개의 지하터널 시설.. 상상이 됩니까?.. 미국 언론들이 밝힌 바에 따르면 금창리 굴착공사는 1989년에 시작되었으며, 굴착공사의 규모는 40만평방m라고 추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축구장 20여개를 합해놓은 넓이에 비길 수 있습니다.  특히 북한은 지형의 특성상 대부분 단단한 화강암 지형이라서 아무리 강한 핵무기라도 지하 깊숙한 곳에까지 타격을 입히기가 불가능합니다.


    미 의회 산하 '미국에 대한 미사일 위협 조사위원회'(위원장 도널드 럼스펠드 전 국방장관)의 비밀보고서에는 "북한은 지하시설을 건설하는 분야에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다. 실제로 직경 50피트, 깊이 200피트의 공간을 하루에 파낼 수 있는 기계를 개발하는 등 고도의 굴착기술을 보유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워싱턴 포스트 1998.7.29)


    1998 년 12월8일, 한국 국방부 북한정보본부는 북한의 주요 군사관련 지하시설은 8천2백36개소이며 총연장은 5백47km에 이르며, 최근에 주요 군수공장 1백80개를 지하공장으로 건설했다고 밝혔습니다.  이것은 1개 군마다 평균 40여개의 지하시설이 빽빽하게 들어있는 셈입니다.


    북한은 전쟁이 발발하게 되면 전 인민이 지하도시로 들어갑니다.  이 지하도시는 비축된 식량과 신선한 지하수, 지하 중수로발전소에서 나오는 전기와 난방, LED에 의한 태양을 대체하는 조명시설, 산소분리기에서 얻는 공기, 기타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을 것입니다.   족히 3년은 무사히 지낼 수 있습니다.


    북한이 파키스탄이나 이란으로부터 회수해가는 저농축 우라늄은 고농축 우라늄의 다시 농축되어 원자력잠수함의 원료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지하에 설치된 중수형 원자로의 원료로도 사용합니다.  원자로에서 다타고 재가 된 연료봉은 플로토늄 원자탄의 원료가 됩니다.  그리고 중수형 원자로에는 전기와 열(증기) 에너지가 생산됩니다.  원자력발전소이지요.  북한은 지하에 설치된 중수형 원자력발전소의 전력과 열을 지상으로 끌어내지 않습니다.  전기는 지하 공장의 동력과 지하 생활공간 곳곳을 환하게 밝히고 열은 냉난방과 따뜻한 물을 만들어 아늑한 곳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북한이 구축한 지하세계는 아마 놀라운 곳일 것입니다.


    이런 조건에서 핵탄두를 장착한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이 미국의 워싱턴과 주요도시를 강타했을 때 결국 누가 먼저 손을 들 것인가는 매우 분명합니다.  전략핵 공격력에서 북-미가 대등할지 몰라도 전략 방어력에서 북한이 미국의 MD에 비해 압도적으로 앞섭니다.  미국뿐만 아니라 유대자본은 군사적 패배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하 핵시설에 대한 추가 설명은 이곳(==>http://cafe.naver.com/kocoree/6679 )을 참고 바랍니다.


    1994 년 6월15일, 대통령 안보보좌관을 지낸 브렌트 스코우크로프트(Brent Scowcroft)와 미 국무부 정무차관을 지낸 아놀드 캔터(Arnold Kanter)는 <워싱턴 포스트> 일자 공동 기고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만약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나중에 전쟁을 하느니 차라리 북한이 일정량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지금 전쟁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쟁을 벌인다면, 그것은 김일성 정권의 몰락과 함께 북한의 붕괴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을 북한이 알게 하여야 한다.  이 싸움에는 너무나 많은 것이 걸려있다.  우물쭈물할 때는 이미 지났다.] - 워싱턴 포스트 1994.6.15


    "나중에 전쟁을 하느니 차라리 북한이 일정량의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지금 전쟁을 하는 것이 더 낫다.. 우물쭈물할 때는 이미 지났다".. 유대자본의 아픔이 잘 녹아 있는 문장입니다.  우물쭈물하는 사이 북한은 1993년 5월30일 최초로 FOBS(부분 궤도 폭격 체제, 위성폭탄)를 선보이고 정확히 1년 뒤 미국으로 하여금 전쟁과 평화 중에 선택 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미국의 이러한 현실이 그는 믿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미국이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완성된 공격수단과 방어수단은 핵무기가 장착된 FOBS 미사일과 기적 같은 지하도시로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는 북한만이 보유하거나 구축된 군사시스템입니다.


    지미 카터 전 미대통령의 방북으로 전쟁은 중단되었고 베트남 전쟁 때 파리 평화협정에 버금가는 밀약이 그해 10월 북-미 간에는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북한에서는 충격적인 변고가 발생합니다.


    1994 년 7월8일김일성 주석이 급작스럽게 이승을 떠나고 맙니다.  짐승도 발길을 멈추고, 새들도 노래를 멈추는.. 북한 인민들에게는 통곡 그 자체였고, 남한 국민들에게도 허전한 마음을 남겨주었습니다.  세계 언론은 연일 대서특필을 남겼습니다.  북한 인민들 입장에서 '폐하'는 그렇게 떠났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자기의 염원이 이룩되는 것을 끝내 보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염원?.. 북한 사람들은 이를 '그이의 염원'이라고 표현합니다.  '그이의 염원'은 무엇일까요?


    러시아가 공개한 비밀 외교문서 중에 1950년 1월17일 북한에서 있었던 일을 소련 슈티코프 대사가 본국에 보고한 내용이 담긴 비밀문서가 있습니다.  당시 이주연 북한대사의 중국 파송을 위해 마련된 만찬이 박헌영 외교부장의 관저에서 열렸는데 '만창장 사건'이라 불리는 특별한 일이 있었습니다.  만찬에는 중국과 소련의 외교관들 대거 참석하였는데 이때 김일성 주석이 만취된 상태에서 많은 속마음을 털어 놓았고 그 내용이 비밀문서에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이 공개된 비밀문서를 통해 김일성 주석의 입장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시 남한에는 '토벌'이라는 일이 일어나고 있던 때입니다.  다음의 <서울신문> 기사내용은 비밀문서 전문은 아니고 기자가 자기의 관점에서 쓴 내용입니다.


    [1950년 1월17일 저녁, 이주연 북한대사의 중국파송을 위해 마련된 만찬이 박헌영외교부장의 관저에서 열렸다. 김일성, 박헌영, 김두봉을 비롯한 북한 고위층인사들과 소련대사, 공사, 중국대사, 무역대표부 인사들이 대거 초대됐다.  슈티코프대사는 1월 19일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을 통해 김일성의 이날 만찬장에서의 행적을 낱낱이 보고했다.(대통령문서보관소)
    식 사가 끝난 뒤 김일성은 소련대사관의 이그나테프와 펠리센코 두 참사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매우 흥분된 목소리로 이제 중국해방이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으니 다음은 남조선동포들을 해방할 차례라고 떠들었다.  그리고는 남조선 인민들은 자기를 믿고 따르고 있으며 북조선의 군사원조를 받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빨 치산만 가지고는 문제를 풀 수 없다. 북조선에는 훌륭한 군대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떠들어대던 김일성은 "요즈음 통일문제를 걱정하느라 밤잠을 못 잔다.  남조선 해방과 조국통일 과업을 더 늦추면 나는 조선인민들의 신임을 잃을 것"이라고 말했다. .. (중략)


    이날 김일성은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는 "스탈린 동지를 만나게 해달라""나는 자나깨나 남조선해방만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슈티코프 대사는 보고서 끝머리를 이렇게 마쳤다.  "만찬이 끝날 즈음 김일성은 취한 상태였음. 그의 모든 대화는 매우 흥분된 상태에서 이루어졌음". .. (이하 생략)] - 서울신문 1995.05.19 10면


    카터의 방북 이후 며칠도 되지 않아 김일성 주석의 변고가 생기면서 미국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유대자본의 관심은 후계구도가 어떻게 되는가?  내부 혼란으로 붕괴되지는 않을까?  뿐입니다.  그러나 유대자본의 희망과 달리 김정일 위원장은 매우 자연스럽고 순탄하게 김일성 주석의 위치를 대신합니다.


    1994 년 10월21일, 북한과 미국간에는 '북미제네바 협정'이 맺어졌습니다.  뉴욕채널 '6월 합의'의 결과입니다.  오픈트랙으로 북은 핵동결을, 미국은 북에 부족한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중유제공과 경수로 발전소 지원을 약속합니다.  클로즈트랙으로는 일정한 과정을 거쳐 평화협정이 맺어지는 것인데 베트남 전쟁에서 있었던 일을 참고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당시 제네바에서 있었던 그 합의문 서명에는 북한의 강석주 부상이 참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북한에는 또 다른 악재가 닥쳤습니다.


    1995 년, 북한 지역에서는 대규모 홍수로 인하여 유래 없는 흉년이 닥쳤습니다.  1996년 1월1일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 등은 신년 공동사설에서 '모자라는 식량을 함께 나눠먹으며 일본군에 맞서 투쟁한 항일빨치산의 눈물겨운 고난과 불굴의 정신력'을 상기시키며 "'고난의 행군' 정신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가자"고 호소했습니다.  북한에서 말하는 1990년대 중반에 '고난의 행군'입니다.


    이 때 혈맹이라던 중국은 북한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러시아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국제식량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유대자본은 북한으로 쌀이 들어갈 수 있도록 허용하지 않으므로 달러가 있어도 쌀을 사올 수가 없었습니다.  많은 북한 사람들이 영양실조로 쓰러져 갔습니다.  기근은 나라님도 어찌할 수 없다는 속담처럼 속수 무책이었고 김정일 위원장은 처음부터 피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한(恨)의 핵전략입니다.  특히 중국은 매정하게도 왜 도와주지 않았을까요?


    유대자본이 일방적인 특혜로 보이는 조건으로 중국과 수교(1979년 1월1일)를 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미국의 수교 조건은만약 중국이 북한이 붕괴되도록 협조한다면 어마어마한 경제지원과 더불어 대만을 넘겨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헨리 키신저와 대면한 중국으로서는 구미가 당기는 조건이었으므로 거절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러한 조건에 합의하여 경제지원의 특혜를 받고 있던 중국이 북한을 도와 줄 수는 없었습니다.


    미국이 북한의 군사력 실체를 알 수 없는 지경에서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유일하게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북한의 붕괴 유도'입니다.  그러나 중국의 협력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임의의 나라에 혁명을 일으키거나 구테타를 일으켜 전복시키는 것에 자신감이 있는 당시 유대자본은 인류역사상 가장 큰 부흥을 맞은 제국의 존망을 걸고 거지와 같아 보이는 북한과 진흙 땅에 엉켜 굴러야 하느냐의 갈림길에서 중국과 수교를 선택한 것은 필연이었습니다.


    북한이 식량 사정이 어렵게 된 것에 대해 미국이 도와줘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자본의 진정성에 의심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공존을 모색하고자 맺어진 '제네바합의'가 과연 진정성 있게 실현될 것인가는 의문표를 남기게 됩니다.


    1996 년 4월21일, 베를린에서는 북-미 미사일 협상이 열렸습니다.  당시 그 미사일 협상에서 미국 대표로 나왔던 국무부 비확산 담당 차관보 로버트 아인혼이 1997년 10월 연방의회 청문회에서 "북한은 1996년 10월에 노동 미사일 또는 다단형 대포동 미사일을 시험 발사하려고 준비하였다가 그만두었다"라고 발언한 것으로 보아 미국이 협상의 진척에 지지부진한 것에 대해 북한의 압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미국은 오픈트랙에 중유는 제때에 보내 주었으나 지어주기로 한 경수로는 땅만 파놓고 더 이상 진척을 내지 않았고, 특히 클로즈트랙의 진척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의 변고와 어려운 식량 사정에 봉착한 북한을 상대로 유대자본은 합의의 진척보다는 교회에 나가 북한이 저절로 망할 것을 기도만 하고 있으니 북한으로서는 새로운 조치를 취하고자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미국은 시간을 질질 끌고 있습니다.  마치 고무줄처럼 당기면 끌려오는 척하다가도 놓으면 멀리 떨어지는 행태는 계속되었습니다.  정체된 상태로 세월을 잡아먹고 있었습니다.  유대자본에 대한 신뢰는 무너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채찍을 가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당나귀 같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제네바합의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는데 분노를 품은 북한은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습니다.


    1997 년이란 군 고위지도자였던 알리 샴크하니가 다시 북한을 방문합니다.  북한은 1994년 약속에서 나아가 P-2 원심분리기를 내년에 넘겨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리고 3개의 완성된 핵폭탄을 얻을 수 있음을 설명합니다.  그리고 알리 샴크하니는 북한이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무기공장들을 방문하게 됩니다.  핵탄두 공장, 미사일 공장, 탱크공장, 전투기 공장, 헬기 공장, 잠수함 공장, 조선소 등을 들러보고 그는 입이 떡 벌어집니다.  알리 샴크하니는 한껏 고무되어 이란으로 돌아가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에게 성과를 설명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북한과 이란의 접촉은 빈번하게 되고 핵거래의 단계를 넘는 비밀 계획이 논의 됩니다.


    1998 년 초, 파키스탄에 설치된 P-2 원심분리기는 모두 철거되어 이란으로 넘어 갑니다.  이때부터 북한과 이란의 전략적 동맹관계가 성립됩니다.  알리 샴크하니를 상대로 북한에서는 이란주재 조선특명전권대사가 관련 업무를 전담하게 됩니다.


    1998 년 5월28일, 파키스탄은 차갈 언덕과 발루치스탄 사막 지하에서 여섯 발의 핵폭탄 실험을 했습니다.  5월30일에 한 마지막 실험은 차갈의 첫 번째 실험장에서 약 100km 떨어진 사막에서 실시했습니다.  첫 번째 실험 및 두 번째 실험 모두 북한의 핵폭탄입니다.  특히 발루치스탄 사막에서 있었던 두 번째 실험은 북한의 수소폭탄 실험으로 여겨집니다.


    파키스탄은 차갈 언덕과 발루치 사막에서 실시된 핵실험 장면은 전세계가 특보로 방송하게 되므로 파키스탄은 핵보유국이 됩니다.  외형적으로 북한과 파키스탄이 '과학기술문화협정서'에 조인한 때는 1982년 10월이었고, 파키스탄은 핵탄두 20여 기를 보유하고 있거나 30∼50개의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580∼800㎏의 고농축우라늄을 갖고 있는 것으로 되었으나 진실은 핵탄두 3개를 갖게 된 것입니다.  실험은 모두 북한의 과학자들이 실시한 것입니다.


    기사에 의하면 당시 파키스탄의 핵실험이 있은 지 열흘 뒤인 1998년 6월10일 북한 항공기 고려민항기는 20명의 북한 과학자들과 실험기구 등을 싣고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 공항을 이륙해 평양으로 돌아갔다고 보도했습니다. (LA타임스 2004.3.1)


    당시 북한 외교관 부인이 실험결과를 미국 스파이에게 빼돌리려다 발각되어 총격으로 사망한 사건도 있었다고 합니다.  북한은 핵탄두와 노동급 미사일 기술을 넘겨주고 파키스탄과의 모든 핵 거래를 종료하게 되는 것입니다.


    1998 년 6월30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한국에너지개발기구(KEDO) 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회의는 '제네바합의'에 따른 북한 경수로발전소 건설을 위한 비용분담 회의였습니다.  'KEDO, 경수로 비용 분담회의 결렬'이라는 제하의 그 기사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북한에 대한 2기 경수로 공급과 관련하여 총공사비의 재원분담 문제를 집중적으로 논의하였으나 결론을 내지 못했다고 유럽 연합의 관리가 밝혔다. 한국에너지개발기구(KEDO)의 이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한국, 일본, 미국 및 유럽연합은 46억 달러 규모의 대북 경수로 프로젝트의 비용분담 문제로 인해 공사에 차질이 빚어질 수도 있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KEDO는 7월 중 조속한 시일 내에 다시 집행이사회를 소집하여 공사비 분담문제를 재론하기로 결의하고 이틀간의 회의를 끝냈다.


    KEDO 의 집행 이사회는 본 공사가 개시될 것으로 예정된 8월 중순까지 경수로 공사비 재원의 조달방안을 매듭 짓는다는 방침이나 이 같이 협의가 난항을 겪음에 따라 최악의 경우에는 8월 말까지 재원분담 문제를 마무리 짓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 로이터 1998.06.30


    이 기사에서는 클린턴 대통령이 홍콩의 무역발전국(TDC)이 주최한 연설회에서 "미국은 한반도의 평화정착 노력에 확실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고 강조하고 북한의 핵무기 계획을 종식시키기 위해 미국은 북한과 체결한 협정을 충실히 이행할 방침이며 북한도 똑같은 조치를 취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습니다. (로이터 1998.06.30)


    무슨 이유 때문인지 유대자본은 그 동안 진척을 내지 않던 경수로 건설에 급히 나서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8월 말까지 재원분담 문제를 마무리 짓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라며 마치 8월31일이 어떤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것처럼 전하였습니다.   8월31일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길래 그러는 것일까요?  클린턴 미대통령도 평화협정을 언급하면서 "미국은 북한과 체결한 협정을 충실히 이행할 방침이며 북한도 똑같은 조치를 취해 달라"고 사정하는 것일까요?


    1998 년 8월31일 12시07분북한은 무수단리의 발사장에서 익명의 미사일(로켓)을 발사합니다.  이 미사일(로켓)을 미국은 '대포동1호'로 불렀는데 정식명칭은 후에 '백두산1호'로 밝혀졌습니다.  백두산1호는 '광명성1호'라는 인공위성을 싣고 우주궤도를 향해 날아 간 것입니다.  FOBS(부분 궤도 폭격 체제, 위성폭탄)입니다.  1993년 발사한 FOBS가 일반적인 수준이었다면 이날 발사한 FOBS는 더욱 정밀하고 더욱 추진력이 높은 FOBS입니다.


    1998 년 9월5일, 북한은 "100% 우리 기술과 힘으로 인공위성을 발사했으며, 이 인공위성은 정상적으로 궤도에 진입했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같은 날(9월5일), 러시아의 <이타르타스통신>이 보도한 바에 따르면, 러시아 위성관측센터 대변인은 9월4일 오후 "북한이 지난달 31일 북위 40.8도, 동경 129.7도에 위치한 무수단리에서 성공적으로 최초의 자국산 인공위성을 발사했다"고 밝혔고, 이튿날에도 그 사실을 다시 확인하면서 "북한의 인공위성은 지구로부터 제일 가까운 거리는 218.82 km, 제일 먼 거리 6,987.2 km의 타원형 궤도를 따라 돌고 있으며 주기는 165분 6초인데, 그 위성은 위성목록에 정식으로 등록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유대자본은 유엔을 이용하여 제제안을 가결하였습니다.


    1998년 12월2일에 나온 북한군 총참모부 대변인 성명은 백두산1호와 광명성1호의 위력을 설명해주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식의 작전계획이 있다. <외과수술 식> 타격이요, <선제타격>이요 하는 것들은 결코 미국만의 선택권이 아니며 그 타격방식도 결코 미국의 독점물이 아니다. 우리 인민군대의 타격에는 한계가 없으며 그 타격을 피할 자리가 이 행성 우에 없다는 것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줄임) 미제가 <대화>와 <협상>의 가면을 벗어 던지고 정세를 전쟁접경으로 끌어가고 있는 오늘의 엄중한 사태에 대처하여 우리 혁명무력은 미제 침략군의 도전을 추호도 용서치 않고 섬멸적인 타격으로 대답할 것이라는 것을 주체조선의 존엄을 걸고 엄숙히 선언한다.]


    "우리 인민군대의 타격에는 한계가 없으며 그 타격을 피할 자리가 이 행성 우에 없다는 것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 북한은 FOBS(부분 궤도 폭격 체제, 위성폭탄) 미사일임을 친절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미사일 시험발사 혹은 인공위성 발사는 군사 기술력을 시위하는 행위이기도 하지만 특히 전환기를 뜻하는 정치적 의미가 반드시 포함됩니다.  북한이 미사일 시험발사 혹은 인공위성 발사는 정책의 방향이 바뀌거나 군사적 행동이 임박하였을 때 실시된다는 것입니다.  이점을 유념해야 합니다.  1998년 8월31일 백두산1호와 광명성1호 발사의 정치적 의미는 유대자본과의 협상이 종료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북한의 인공위성 광명성1호가 발사되던 바로 그 날,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한국이 경수로 건설비용의 70 퍼센트를 부담하기로 결정했으며, 일본은 10억 달러를 내기로 했다는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늦었지요.  북한은 경수로를 건설하겠다며 부리나케 움직이는 클린턴 미대통령의 간곡한 요청을 외면하고 유대자본과의 협상을 종료합니다.


    북한은 남아프리카공화국 그리고 파키스탄과의 핵 거래를 통해 압박하는 방법으로는 결코 유대자본의 적대적 태도를 바꾸어 전략적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협상에 의지하던 방식에서 군사력에 의거하는 방식으로 전환 된 것입니다. 물론 당장 전쟁을 통해서 목표를 달성할 수도 있지만 희생을 최소화 할 필요성이 심각히 검토되어야 했습니다.  특히 핵전쟁으로 생겨날 남한 민간인에 대한 희생이 크게 걱정입니다.  새로운 전략이 필요했습니다.  결정적인 담보를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입니다.  북한의 이러한 방향 선회는 당시 핵무기를 갈구하던 이란과 맞아 떨어졌습니다.  <2개의 전쟁전략>입니다.  10년 후인 2008년 9월로 목표점을 잡고 <2개의 전쟁전략>은 1998년 9월1일 시작된 것입니다. 그 결전의 날이 2008년 9월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1998년 8월31일은 김일성 주석의 '그이의 염원(念願)'이 김정일 위원장의 '그이의 이상(理想)'으로 바뀐 날이 됩니다.  북한은 '그이의 이상(理想)'이라고 표현합니다.  '그이의 이상(理想)'이란 일본 본토를 거쳐 미국 본토로 향하는 것입니다.

     

    물론 유대자본은 당시에 '그이의 이상(理想)'을 알지 못했고 '그이의 염원'만 해결해 주면 끝나는 것으로 여전히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제네바합의'를 버리지 못하고 북한에게 중유를 제공하고 경수로 건설에 박차를 가합니다.  결과적으로 이 시점 클로즈트랙에서 북-미의 대화는 각각 딱 한마디입니다.  미국은 "제네바합의를 하겠으니 이란과의 관계를 끊어달라".. 이에 대한 북한의 대답은 "모르겠고, 제네바합의나 이행하라"


    이란은 이슬람 시아파로서 원래부터 반미국가입니다.  그러나 이란은 석유 위에 앉아 있으면서도 전사로서의 의지는 있지만 맨날 유대자본에게 두들겨 맞으며 허름한 옷에 막대기 하나 들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러한 이란에게 갑옷을 입히고 허벅지에는 장검을 채우고 등을 빗겨 기관총을 질러주고 어깨에 바추카포를 얹어주고 허리춤에는 핵탄두을 걸어 강력한 전사로 키우는 것은 <2개의 전쟁전략>의 지휘자 북한이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북한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것은 이란이 해야 할 일입니다.  북한은 1998년 9월부터 2008년 8월까지 10년을 이란에게 투자하게 됩니다.  이란은 10년 만에 중동의 패권을 감당하는 강력한 전사로 새로 태어나게 될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1998년 9월6일, 미국은 북미회담을 제의합니다. 북한은 관심 없습니다.  1998 년 11월23일, 미국은 대북정책조정관으로 윌리엄 페리를 임명합니다.  페리는 미국정부의 대북정책 전반에 대해 재검토하여 1999년 9월 일명 '페리보고서'를 만들어 미 의회에 제출하는 역할입니다.  그 보고서 내용은 북한에게 아주 달콤한 내용입니다.  역시 북한은 관심 없습니다.


    1999 년, 북한과 미국은 2차례 회담을 갖기도 하고, 9월에는 '페리보고서'가 등장하기도 하며, 윌리엄 페리가 평양을 방문하기도 합니다. 미국이 급하니까 매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형국입니다.  북한은 어차피 10년의 시간이 필요하므로 회담이든 평양방문이든 마다하지 않지만 진정성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진정성을 갖는 곳은 이란의 수도 테헤란입니다.


    1999 년 5월, 미.중 수교 20주년, 미국이 이끄는 나토군이 유고주재 중국대사관을 ‘오폭(誤爆)’해 중국대사를 포함해 수십 명의 사상자가 나면서 양국 관계가 급랭하게 됩니다.  ‘오폭’이라던 미국의 변명을 믿는 중국인은 지금도 없습니다.  유대자본은 중국이 별 도움이 되는 행동을 하지 않자 발끈한 것이지요.


    2000년 6월15일,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됩니다. 김정일 위원장은 6월13일 순안 공항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면접하게 됩니다. 미국이 애를 많이 쓴 셈입니다. 그리고 6월15일 평양에서는 '6.15공동선언'이 발표됩니다.


    2000년 10월12일, 북한 조명록 특사가 최초로 미국 워싱턴을 방문하여 클린턴 미대통령과 만나, 회담하고 '북.미 공동성명'이 발표됩니다.


    2000년 10월23일, 올브라이트 미국무장관이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면담을 가지기도 합니다.


    조명록 특사의 역사적 방미와 올브라이트 미국무장관의 방북을 시작으로 북한에 대한 일방적인 유대자본의 관계 개선은 빠르게 진행됩니다.  영국과 독일이 이미 대북 수교를 천명했고, 일본도 수교교섭 전격 재개 의사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북경제제재 완화 조처 발효, 북미 관계개선 회담(독일 베를린), 북미 첫 외무장관 회담(타이 방콕), 북미 통합의제 회담(뉴욕), 북미 미사일회담(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개최되었습니다.  유대자본이 북한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매우 급했던 시기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북한과 이란간의 관계를 변화시키지는 못합니다.


    이러한 때에도 이란에는 P-2 원심분리기가 가동되고 있고, 북한의 미사일 완제품이 수출되고, 북한의 지원 하에 미사일 공장, 전투기 공장, 헬기 공장, 전투함 공장, 잠수함 공장 등이 건설됩니다.  뿐만 아니라 병법 일반론, 병법 세부론, 병법 실무, 땅굴 파는 법, 게릴라 전술법, 심지어 군사 행진법까지 가르쳐 줍니다. 이란은 당시 고유가 행진을 하던 석유를 팔아 북한에게 엄청난 자금을 공급합니다.  북한은 그 자금으로 군사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합니다.  이때 이란의 석유를 수입한 나라가 중국입니다.  유대자본 나토군이 유고주재 중국대사관을 '오폭'한 이유는 이것 때문입니다.  유대자본을 추종하던 중국이 정신을 차린 것이지요.  이란의 변화.. 유대자본은 애가 타서 미치고 환장합니다.  미국의 환상적인 구애가 전혀 먹혀 들지 않고 있는 것이지요.


    2001년 1월20일, 빌 클린턴 미 대통령에 뒤이어 조지 부시 미 대통령 취임합니다.
    2001년 1월21일, 북한은 외무성 대변인 담화 발표하여 클린턴 정부가 북.미 정치협상에서 동의한 것을 부시 정부가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을 이행할 것을 요구 합니다.
    2001년 5월3일, 평양에서 열렸던 조선-유럽연합 정상회담에서 북한은 2000년 10월의 조.미 공동성명에서 발표한 '대포동 2호' 발사에 대한 유예조치를 2003년까지만 지속하겠다고 밝혔습니다.
    2001년 5월16일, '북미 기본합의문에 따른 경수로 건설 지연에 대한 상보' 보도를 발표하면서 전력보상을 요구하고 연계하여 핵동결 해제를 언급합니다.
    2001년 5월21일, 미 국무부는 세계식량계획 요청에 따라 북한에 식량 10만t 지원 결정합니다.
    2001년 6월7일, 부시 미 대통령은 '포괄적 접근'틀에 따른 대북 대화 재개 성명을 발표합니다.


    2001 년 9월11일, 미국 뉴욕의 110층짜리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고, 워싱턴의 국방부 청사(펜타곤)가 공격을 받은 대참사가 발생합니다.  미국은 '9.11테러'라고 합니다.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의 이슬람 테러조직인 알 카에다가 자행한 테러라고 수사결과를 발표합니다.  너무나도 큰 대형 사건이라서 전 세계가 긴장합니다.


    이 사건에 대해 말이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911테러'는 미국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한 주장은 상당한 이유를 갖고 있는데 인터넷에 동영상 등이 널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묘하게도 북핵정세와 맞아떨어집니다.  '911테러'는 미국이 중동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정당성을 부여하였습니다.  부시 미대통령은 즉각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악의 축'을 지목했습니다.


    미국 심장부 무역센타 쌍둥이 빌딩이 주저앉는 모습은 전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미국은 대가리를 얻어맞은 사자처럼 화가 나있었으며, 테러와의 전쟁은 선포되었고, 미국에게 밉게 보인 나라들은 벌벌 떨었습니다.  이란은 당연히 겁먹을 수 밖에 없습니다. 북한은 이것이 미국이 중동전을 벌리는 기회로 이용할 것이고, 결국 이란을 향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유대자본은 북한은 건들지 못하고 <2개의 전쟁전략>에 한 축으로 있는 이란을 치겠다는 뜻이지요.  유대자본이 이란을 점령한다면 <2개의 전쟁전략>은 힘을 잃게 될 것이니까요.


    2002 년 1월29일, 부시 미대통령은 연설에서 이라크와 이란북한을 지목하며 '악의 축(axis of evil)'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아주 작심하고 한 발언입니다.  '악의 축'이라는 용어를 두고 '테러를 지원하는 정권(regimes that sponsor terror)'이라는 뜻으로 해석을 하지만, 이는 911테러 사건을 빌미로 미국이 반테러 전쟁의 일환으로 이라크를 거쳐 이란을 침공 목표로 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내용이고, 북한에 대해서는 침공 목표는 아니고 표현상에 지목한 것에 그칩니다.  다시 말해서 제2단계 표적으로 이라크와 이란을 지목한 것이고, '악의 축'으로 북한과 이란을 지목한 복합적인 의미입니다.  1단계 표적은 빈 라덴이 머물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입니다.


    미국이 1999년, 2000년, 2001년, 도합 3년간 북한에게 갖은 구애를 하였지만 이란과의 관계를 단절시키지 못하자 전략을 수정한 셈입니다.  이란을 제거하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입니다.


    2002 년 10월3일, 제임스 켈리 특사 등 미국대표단 8명 북한을 방문하여 강석주 부상과 대면하게 됩니다.  강석주 부상은 켈리에게"너희가 이란을 칠 생각이냐?"라고 묻자, 켈리는 "이란과 관계를 중단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강석주 부상은 "한번 해보자는 얘기냐?"라고 묻자, 켈리는 "우리는 그럴 수밖에 없다"라고 대답합니다.  강석주 부상은 마지막으로 "지켜 보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라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클로즈트랙입니다.


    2002 년 10월17일, 미국으로 돌아간 켈리 특사는 열흘이 넘도록 아무 말이 없다가 "내가 강석주 부상을 만나서 북한이 농축우라늄 제조에 사용되는 알루미늄 봉 구입 영수증을 증거로 내밀자 강 부상은 잠깐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더니 '우리는 농축우라늄보다 더한 것도 만들겠다'라고 대답하였다. 북한은 농축우라늄 핵개발계획을 시인했다"라고 발표합니다.  이것은 오픈트랙입니다.


    2002년 11월15일,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집행이사회는 12월부터 대북 중유지원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합니다.
    2002년 12월12일, 북한은 핵동결 해제를 선언하고, 12월21일 핵시설 봉인과 감시카메라 제거 등 핵동결 해제 조치를 개시합니다.
    2002년 12월31일, 조지 부시 미대통령은 "북핵 문제를 외교적 방법에 의해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고 천명합니다.
    2003년 1월10일, 북한은 외무성 성명 통해 NPT(핵무기비확산조약) 탈퇴를 선언합니다.


    미국은 아무리 중유를 북한에 제공해봤자 이란과의 관계를 중단시키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중유 제공을 중단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부시는 "북핵 문제를 외교적 방법에 의해 평화적으로 해결하겠다"고 북한의 반작용(전쟁)을 걱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자본이 중동에서 전쟁을 시작하는 시점이 초읽기에 들어갑니다.  이란은 정말 걱정되고 덜덜 떨리기까지 합니다. 급기야 이란은 P-2 원심분리기 공장의 전원 스위치를 내립니다.


    [상원 외교위 보고서는 이날 이란이 2007년 미국 국가정보 평가의 결론처럼 국제사회의 압력애 의해서가 아니라 충분히 핵개발을 진전시켰기 때문에 2003년 핵개발 프로그램을 중단했다며 이같이 지적했다.


    보고서는 외국 정부를 위해 일하는 정보 분석가와 핵 전문가들을 인용, 이란이 적절한 핵무기 설계를 끝내고 일부 부품을 만들었으며 핵 개발 계획을 잠시 정지할 수 있을 만큼 성공적인 폭발 실험을 실시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전했다.
    때문에 외국 정보 분석가들은 이란의 핵개발 작업이 수 발의 핵탄두를 제조하는데 필요한 핵물질을 생산하는 것만을 남긴 상황으로 보고 있다고 보고서는 강조했다. ] - 뉴시스 2009.05.07 07:59:30


    이 기사는 당시의 사정을 밝혀주는 기사인데, "2003년"이란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할 당시를 의미하는 것이고, "핵개발 프로그램을 중단했다"는 문장은 이란이 P-2 농축우라늄 공장의 전원 스위치를 내렸다는 뜻이며, "핵 개발 계획을 잠시 정지할 수 있을 만큼 성공적인 폭발 실험을 실시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문장은 이란이 핵실험을 했다는 뜻입니다. 일반인들은 이 기사를 절대로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당시 핵무기가 없는 이란이 어떻게 핵실험을 했다는 얘기인지 모순입니다.


    2003 년 3월18일,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기 이틀(2일)전동해 공해상에서 북한지역을 정찰하려던 미국 정찰기 RC-135를 향해 북한 어랑공군기지를 출발한 미그 29기 2대와 미그 23기 2대가 날아갑니다.  갑자기 나타난 북한의 미그 전투기들은 미국 정찰기를 포위합니다.  그리고 미그29 전투기 1대가 정찰기 옆 15미터까지 접근해 날개 짓으로 "따라오라"고 신호를 보냅니다.  놀란 미국 정찰기가 전속력으로 도망가자 북한 조종사는 "죽이겠다"는 의미를 손짓(주먹)으로 표시 합니다.


    그래도 죽기살기로 도망가자 10분 후 다른 미그29기 1대와 미그23기 2대가 따라붙어 미사일을 발사하려 '로크온'을 겁니다.   '로크온'이란 화기지원 레이더 조준을 말합니다.  즉 레이더를 켜는 것이지요.  레이더를 켜면 목표물이 디스플레이(화면)에 표시되고 버튼을 누르기만 하면 공대공 미사일이 레이더의 유도에 따라 날아가서 때립니다.  공중 폭파되는 것입니다.  버튼만 누르면 미군 조종사와 승무원들은 죽을 판입니다.  그러자 미국 정찰기는 최고 속도를 초과하여 도망갑니다.  악세레이타를 있는 힘껏 밟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자 이제는 미그29기 1대가 정찰기 바로 앞에서 가로막으며 비행하며 에프터버너(After Burner)를 점화합니다.  미국 정찰기는 버너의 후폭풍에 심하게 충격을 받아 위태롭습니다.  정찰기는 버너의 후폭을 피하려 아래로 위로 지랄비행을 하면서 기어코 도망갑니다.  22분 뒤 북한 전투기 4대는 선회하여 어랑비행장으로 유유히 돌아갑니다.  이것이 동해 공해상에서 벌어진 22분간의 '로크온'사건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4693번 댓글( http://cafe.naver.com/kocoree/4693 )과 4707번 댓글( http://cafe.naver.com/kocoree/4707 )을 참고바랍니다.  당시 미군 조종사의 진술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미군 조종사의 진술은 "(북한 전투기가) 북한으로 함께 가자는 신호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북한 조종사는 "당장 쏘아 떨구어 죽이겠다며 주먹을 내흔들었다"고 진술했습니다.  북한 전투기는 "따라와라. 그러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의미로 날개 짓과 손짓을 한 것으로 해석됩니다.  미군 조종사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미사일을 맞고 추락할 것으로 생각했다. 3일간은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라고 진술한 했습니다.  이에 북한 조종사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미군 조종사는) 제발 살려달라고, 손을 싹싹 빌면서 애걸복걸하다가 제한 속도를 훨씬 초과하면서 황급히 도망가더라"라고 진술했습니다.


    북한 영공도 아닌 공해상에 날으던 미군 정찰기를 향해 요격태도를 보인 매우 공격적인 모습입니다.  미국은 가데나공군기지에서 전투기를 발진시키면 5분이면 북한전투기와 조우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발진하지 못했습니다.  미국은 겁먹은 것일까요? 위급상황을 알리는 RC-135 정찰기를 향해 미국 지도부는 "죽어도 끌려가지 말라"는 명령뿐이었습니다.  약 22분 동안의 일입니다.  미국으로서는 심장이 벌렁벌렁 뛰고 전쟁으로 번질까 온몸이 얼어붙는 순간입니다.  미국은 겁먹었습니다.  미국은 이사건 이후 매일 띄우던 RC-135 정찰기를 일주일 이상 띄우지 못합니다.


    P-2 원심분리기 공장의 전원 스위치를 내릴 정도로 겁먹은 이란이 힘을 얻은 것은 이 '로크온 사건'을 지켜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란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아~ 형님이 더 쎄다. 겁먹지 말자!"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기 이틀 전에 '로크온 사건'을 당한 미국은 이란을 치기도 전에 김빠지고 말았습니다.


    당시 미국의 발언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현상을 찾을 수 있습니다.  미국은 자꾸만 겁먹거나 굴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애써 강조합니다.


    [부시는 '우리는 북한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고.. 코언 전 장관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당장은 북한의 핵 위협에 대해 보상하거 나 포용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으나 결국은 외교를 통해 이를 해결해야 한다'고 조언했다고 한다. ] - 연합뉴스 2003.01.07


    [ 미국무부는 '우리는 (북한의) 핵위협 공갈에 겁먹거나 굴복하지 않을 것이며 이를 허용치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 - 연합뉴스 2003.04.26


    [ 파월 장관은 '미국은 북한의 수사적 위협에 굴복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 - 연합뉴스 2003.06


    이라크는 이란의 서쪽에 있고, 아프가니스탄은 이란의 동쪽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는 이란을 포위하고 있는 형세입니다.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한 이유는 바로 이란을 치기 위한 사전 작업 차원입니다.  특히 이라크는 남쪽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있고 서쪽에는 시리아가 있어 친미국가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기에 용이하고 반유대국가 이란과 시리아의 연결을 차단할 수 있는 절묘한 위치입니다.


    2003 년 3월20일 시작된 이라크 전 당시 유대자본은 500여대의 헬기를 포함한 항공기 1600여대의 공중전력과 항모 7척, 함정 120여척, 항공기 480대로 구성된 해상전력이 투입됐습니다. 미국과 영국이 주축이 된 ‘이라크 자유작전’은 43일 만에 막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라크에 깊숙히 들어간 미군에게 빠져나올 수 없는 늪이었다는 것을 미국이 깨닫는데 3년이면 충분합니다.


    2003 년 4월 초 어느 날, 미군이 이라크에서 점령을 마무리하고 있을때, 북한은 핵무기를 항공기에 싣고 이란으로 날아 갑니다. 그리고 이란의 한 사막에서 보란 듯이 폭발시킵니다. 이 성공적인 핵실험은 이란의 핵보유 여부와는 무관하고 미국이 이란을 침공하면 핵무기가 실제 사용될 수 있음을 미국에게 경고하는 것이므로 이란의 생존을 보장하는 핵실험입니다. 위의 기사는 그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공적인 폭발실험'.. 이것은 2003년 이란에서 북한의 핵실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란은 북한의 진정한 힘을 보았습니다. 믿고 따를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용감해지는 것이지요.


    자 작극인지 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911'에 얻어 맞고 미친 사자처럼 날뛰는 미국을 북한은 가볍게 제압하였습니다.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이라크를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거기까지입니다. 북한의 보호를 받는 이란을 미국이 손댈 수는 없었습니다. 미국은 43일 걸린 이라크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북한과 협상을 진행합니다. 중국이 자리를 빌려주므로 북한과 미국은 베이징에서 3자 회담을 4월23일부터 25일까지 3일간 개최합니다. 물론 이란과의 <2개의 전쟁전략> 계획은 변함 없이 진행됩니다. 북한은 미국을 능수능란하게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지금까지 황길경의 가설이었습니다. 가설은 제3부로 이어집니다

    출처 단공박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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