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열정이 넘치던 시기가 있었다. 해결책이 보이지 않아 고민하던 문제들은 화장실에서 심지어 꿈에서 해결하기도 했다. "그 일"이 없는 내 미래는 없었다. 그렇게 5년을 보냈던 것 같다. 내가 하는 일이 어떤 가치가 있는지 스스로 되묻기 시작했다. 딱히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내가 하는 일은 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것도 아니었고 음악처럼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종류와도 거리가 멀었다. 그렇게 5년여를 더 일했다. 마지막 2년은 오로지 정규직에 대한 갈망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렇게 나는 내 일을 떠나기 직전에 있다. 오랜 연인과 이별하기 직전에 이런 느낌이었던가? 내 컴퓨터, 휴대폰, 공책은 말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 영수증 뒷면에도 급하게 휘갈겨 쓴 아이디어들이 있었다. 이것들을 어떻게 다 버리나...</div> <div><br></div> <div>엄마가 밥을 차려 주신다. 꿈을 향해 달려가는 자식이 대견하고 걱정스러운 눈빛이다.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직장도 없이 평생 뒹굴거려도 같은 눈빛으로 바라봐 주실까? 마음만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실 것이란 걸 안다. 그래도 문득 확인받고 싶은 그런 순간이 있지 않나? "그래도 네가 이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널 사랑해"라는 말이 듣고 싶다.</div> <div><br></div> <div>다시 생각이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미래와 열정에 가득 차 오만하기까지 했던 나는 "그래도 나를 사랑" 할 수 있을까? 다 커서 장가까지 간 아들을 지원해줘야 하는 부모님께는 죄송한 마음이 들겠지. 아무것도 안 하고 놀기만 하는 남편을 바라보는 아내에게도 같은 마음이겠지. 그래도, 그래도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내가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헛짓 하느라 젊은 청춘 다 보내고 지금은 이 모양 이 꼴이지만 그래도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어쩌면 누군가에게 듣고 싶은 말이 아니라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나보다.</div> <div><br></div> <div>여전히 나는 젊고 새로운 일을 시작할 시간이 있다. 여전히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고, 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다만 오랜 열정이 남긴 잔해들을 보니 아쉬운 마음이 든다.</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