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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게시물ID : freeboard_2020890
    작성자 : 김찬
    추천 : 0
    조회수 : 890
    IP : 219.254.***.210
    댓글 : 2개
    등록시간 : 2024/02/08 18:26:49
    http://todayhumor.com/?freeboard_2020890 모바일
    구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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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작글

    KakaoTalk_20240208_174746162.jpg

    이중섭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1> 종이에 잉크와 유채, 20.3x32.8cm, 1954

     

    "환영!" 정욱이가 왼팔을 앞으로 내뻗으며 손바닥을 펼쳤다. 버드나무 잎을 때리는 빗소리와 함께 바람이 일었다. 좁은 거실 안에 여러 명의 정욱이 나타나 뛰었다. 숨 가쁜 목소리로 정욱이 다시 말했다. "봐, 봐, 아빠! 모르겠지? 여러 명이지?" 

     

    "오~ 제법인데?" 거실 벽에 기대앉은 채 티브이를 보던 매형이 빠르게 일어났다. 매형은 뛰어 도는 정욱의 몸을 따라 고개를 움직이다, 양팔을 들어 가위표로 만들곤 외쳤다. "거부!" 빗방울이 터져나갈 사자후였다. 강아지들처럼 부산스레 뛰어다니던 정욱의 분신들이 사라졌다. "여깄네!" 매형이 정욱이의 손목을 낚아챘다. 

     

    "아, 뭐야... 깰 파!" 왼 손목을 잡힌 정욱이 오른손을 높이 들어 매형의 머리를 내려쳤다. 열푸른 검기가 손날을 감쌌다. 

    "막을 방!" 매형도 남은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붉은 기가 반원의 물방울처럼 솟으며 얼굴과 어깨 앞에 펼쳐졌다. 칼과 방패가 부딪쳤다. 태풍에 휩쓸린 라벤더꽃들처럼 보라색 살기가 흩날렸다. 둘은 튕겨 나갔다. 

     

    "아, 둘이 뭐 하는 겨." 둘 사이, 거실 가운데 앉아 있던 내가 말했다. 매형과 정욱이가 거실을 쪼개는 동안, 나는 거북이처럼 머리를 어깨 속으로 넣고 있었다. "겁나 불안하네." 나는 리모컨을 찾아 쥐고 엉덩이를 끌어 베란다로 자리를 옮겼다. 

     

    "이번 대결은 비긴 거로 하자, 정욱아. 이따 또 싸우자." 매형이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좋다! 다음엔 안 봐줌!" 정욱이가 격양된 걸음으로 내 방으로 들어갔다. 

     

    "뭐야, 형. 만화에 나오는 거야?" 티브이 볼륨을 줄이며 내가 물었다. 

    "아, 책이야, 책. 한자 공부하는 건데, 요즘은 만화로 나오더라. 드래곤볼처럼." 매형이 앞머리를 쓸며 답했다. 

     

    "아니, 형도 엄청 신나보이던데?" 내가 채널을 돌리다가 매형을 쳐다봤다. 

    "어, 재밌잖아." 매형이 웃었다. 익살스러운 웃음이었다. 썰물이 나간 모래사장 같은 이마 밑에 아이가 뛰놀고 있었다. 

     

    "삼촌! 그 칼 어딨어? 나무로 된 거." 정욱이가 내 방을 나오며 물었다. 

    "칼? 칼이 어딨어. 아, 그거. 할머니가 버렸어. 이제 없어." 다급한 정욱이의 표정을 피해 재빨리 티브이로 시선을 옮겼다. 

     

    "나무칼? 뭐 말하는 거냐?" 매형이 내게 물었다.

    "목검 찾는 거 같은데." 내가 답했다. 

     

    "왜 그래, 밑에 집에서 뭐라 하겠다." 누나가 눈을 비비며 안방에서 나왔다. 

    "더 자지, 일어났어? 찬아, 네가 정욱이 데리고 나가서 산책 좀 해라." 매형이 주머니에서 현금을 꺼내며 덧붙였다. "먹을 것도 좀 사 오고."

    "난 설탕 없는 커피 아무거나 부탁해." 누나가 매형 옆에 앉았다. 

     

    해는 따듯한데 바람이 조금 찼다. 아파트 단지 안 놀이터에 아이들이 여럿이었다. 주차장 외에도 차들이 빼곡했다. 정욱이가 아무렇지 않게 내 손을 잡았다. 반대 손에는 목검을 쥐고 있었다. "삼촌! 삼촌은 커서 뭐 되고 싶어?" 

    난 스물여섯이었다. "음, 글쎄. 정욱이는 삼촌이 커서 뭐가 됐으면 좋겠니?" 내가 되물었다. 

     

    "권투선수!" 정욱이가 망설임 없이 말했다.

    "권투? 왜에?" 내가 말했다. 

    "그냥, 어울려. 잘할 거 같아!" 의도 없이 구르는 구슬 같은 목소리였다. 못생겼단 뜻일까? 뭐 되고 싶냐는 질문도 오랜만이었지만 권투라니, 잠시 머리가 복잡했다. 

     

    "삼촌 싸움 잘하지 않아?" 정욱이가 나를 올려다봤다. 

    "못 하는데?" 내가 답했다. 

    "정말?" 정욱이가 실망스러운 표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어, 정말! 나 맨날 맞고 다녔어. 빵셔틀이라고 아니? 누구보다 빵을 빨리 사 왔지. 정욱이는 삼촌처럼 되지 마라!" 내가 과장된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정욱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 믿는 것 같았다. 난 대형차들 사이에 주차된 소형차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욱이를 잡은 손이 축축해졌다. "정욱아, 이제 편의점 갔다가 들어가자. 뭐 먹고 싶어?" 잠깐 묵념의 시간을 지나 내가 말했다. 

     

    "아이스크림! 삼촌, 나 이거 무거워." 정욱이가 목검을 내게 건넸다. 

    "그래, 아이스크림도 사고 과자도 사고 먹고 싶은 거 다 사자. 가자!" 아파트 단지 후문을 나서며 내가 말했다. 

    "삼촌은 아까 밥도 많이 먹구선, 식탐이 너무 강해." 정욱이 내 손을 놓고 걸음을 재촉했다. 

    "오, 그런 말도 알아? 탐이 무슨 탐이야?" 나도 정욱을 쫓아 빨리 걸었다. 

    "탐낼 탐!" 이렇게 쓰 거야." 정욱가 뒤돌아보지 않은 채 허공에 대고 손가락으로 한자를 그렸다. 

     

    지나가는 차가 없는지 양쪽을 둘러보았다. 정욱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무겁지 않게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미 오리의 마음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사실 난 아이들을 싫어했다. 미운 일곱 살, 정욱이가 일곱 살이다. 물론 사랑하지만, 같이 시간을 보낸 지 두 시간은 된 것 같았다. '이제 나가야지. 피시방에 가든지, 술을 마시든지.' 정욱이를 한쪽 팔로 안고 편의점 문을 열었다. 

     

    "삼촌! 모레 우리 집에 같이 갈래? 나 장난감 되게 많아. 같이 놀자, 재밌겠다!" 구슬 같은 목소리가 더 높은음을 냈다. 

    "어? 진짜? 이야, 좋겠네. 근데 삼촌도 바빠서 모르겠네. 아니다, 그래, 그러자, 같이 가자!" 

     

    정욱이가 다시 내 손을 잡으며 아이스크림 판매대로 이끌었다. 나는 편의점에 진열된 상품들만큼 복잡해졌다. 작년과 다를 바 없는 구정이었다. 

    출처 접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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