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겨울도 다 지났지만 아직도 춥다면서 벌레가 기어나올 듯한 자취방바닥에서 동면을 준비하던 작년 이맘때였다.</div> <div>임용고시도 떨어지고 대역죄인 재수생이었던 나는 아무것도 없는 자취방에서 평소처럼 라면을 끓일 준비를 하고 있었다.</div> <div>그렇게 아무 생각도 없이 귀여운 즐거움을 긁으며 라면을 찾던 중 텅 빈 냉장고는 물론이요 내 자취방에서 나올 수 없는 물건, 미역을 발견했다. </div> <div>자취를 시작하면 요리해서 밥도 꼬박꼬박 챙겨먹고, 공부도 열심히 하겠다며 독립할 때, 첫 요리로 끓어먹었던 미역국.</div> <div>그 보잘것 없는 다짐은 이미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지 오래이지만 이렇게 미역은 오롯이 남아, 아직도 4년은 버틸 수 있다는 자세로 찬장에 앉아 있었다. </div> <div>씁쓸한 기억에서 눈을 돌려 라면을 찾아내고, 나는 언제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라면에 미역을 넣으면 마치 너구리의 다시마처럼 장대한 황하강의 국물맛을 느끼게 해준다는 어떤 스갤러의 글을 읽은 기억에 망설이지 않고 하루의 구세주, 라면에 내 다짐이 섞여있던 그 미역을 넣었다.</div> <div>하지만 나는 그것이 커다란 실수였다는 120초 후에야 알 수 있었다.</div> <div>말린 미역은 불려서 투입해야 한다는 간단한 사실을 잊어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div> <div>다행히 미역을 적게 넣은 덕분에 냄비째 타들어가는 참사는 면했으나, 조금이라도 시간이 지체되었다면 이름모를 스갤러가 그토록 극찬했던 국물은 저 북괴 돼지같은 미역들에게 모조리 빼앗겨버릴 수 밖에 없었을 것이었다.</div> <div>일용할 양식을 이렇게 허투루 보내버릴 수 없었기에 나는 즉시 불을 끄고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div> <div>나의 배를 만족스럽게 채워줘야 할 라면은 당연히 설익어있었고 군데군데 내가 어릴적 '새우'라고 부르던 면이 아직 떨어지지 않은 부분이 남아있었다.</div> <div>그러나 면을 흡입하는 시간에도 미역을 탐욕스럽게 국물을 빨아들였다.</div> <div>나는 그때 미역을 건져내면 된다는 사소한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div> <div>아니면 그 미역에 남자의 허튼 투쟁심이 발했을 지도 모르겠다.</div> <div>그렇게 잠깐동안 미역과 푸드파이팅을 벌이던 나는 결국 내가 졌음을 시인하고야 말았다.</div> <div>면과 미역을 모두 들어내자 남아있는 것은 숟가락 하나에 찰 것 같지도 않은 국물 한 줌.</div> <div>그리고 물을 양껏 먹은 미역들은 초췌한 내 얼굴과는 달리 다시 태어난 것 같은 생기를 머금고 있었다.</div> <div>나는 힘없이 미역을 건져먹으며, 남아있는 국물 한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갔다.</div> <div>배고플 때 먹는 음식이 가장 맛있다는 만고불변의 명언을 들 것도 없이.</div> <div>그 라면국물은 내가 먹은 라면 국물 중 가장 맛있는 국물이었다.</div> <div>알싸한 라면스프에 이어 나타나는 섬집아기같은 바다의 냄새.</div> <div>나는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렇게 맛있는 라면은 끓여본 적이 없었다고 자부한다.</div> <div>나는 아기같이 순수한 미역들을 건져먹으며 생각했다. </div> <div> </div> <div>어쩌면 미역은 백수였던 내게 라면의 행복을 위해서는 남보다 먼저 먹으려는 투쟁과 설익은 라면을 먹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div> <div> </div> <div>옆집에서 흘러나오는 운동소리가 마치 어머니의 등짝 스매쉬처럼 은은히 울리는 밤이었다.</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