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P> <P style="TEXT-ALIGN: left"><IMG style="FLOAT: none; CLEAR: none" class=txc-image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209/a148b6f4d10397d43bb9194b39b685f4.jpg"></P> <P> </P> <P>반독재, 반유신을 외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박정희가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아 사형 시킨 사건.</P> <P><BR></P> <P>사형선고를 받은 8명은 <a target="_blank" h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80948" target=_blank>대법원</A> <a target="_blank" h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55386" target=_blank>확정판결</A>이 내려진 지 불과 18시간 만인 1975년 4월 9일 전격적으로 형이 집행되었다.</P> <DIV style="POSITION: fixed"> <DIV style="BORDER-BOTTOM: medium none; TEXT-ALIGN: left; BORDER-LEFT: medium none; BACKGROUND-COLOR: transparent; COLOR: rgb(0,0,0); OVERFLOW: hidden; BORDER-TOP: medium none; BORDER-RIGHT: medium none; TEXT-DECORATION: none" id=new_selection_block0.826068417967692> <DIV>[출처] <a target="_blank" href="http://term.naver.com/entry.nhn?docId=1136220" target=_blank><FONT color=#444444>인민혁명당사건</FONT></A> | 두산백과</DIV></DIV></DIV> <P></P> <P>이 인권침해 사건은 해외에도 알려져, 제네바 국제법학자협회가 1975년 4월 9일을 '<STRONG class=hl>사법사상 암흑의 날</STRONG>'로 선포하였다.</P> <P><BR></P> <P>이후 2002년 9월 <a target="_blank" h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20189" target=_blank>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A>에서 이 사건을 고문에 의한 조작된 것으로 발표하였고 같은해 12월 인혁당재건위사건의 유족들이 <a target="_blank" h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202998" target=_blank>서울중앙지법</A>에 재심을 청구하였다. 2005년 12월 재심이 시작되었고 2007년 1월 23일 선고 공판에서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이 집행된 우홍선 등 8명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이 판결로 적법하지 않은 수사와 재판에 희생되었던 피고인들이 늦게나마 명예를 회복하였으며 <a target="_blank" h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07397" target=_blank>사법부</A>도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게 되었다. </P> <DIV style="POSITION: fixed"> <DIV style="BORDER-BOTTOM: medium none; TEXT-ALIGN: left; BORDER-LEFT: medium none; BACKGROUND-COLOR: transparent; COLOR: rgb(0,0,0); OVERFLOW: hidden; BORDER-TOP: medium none; BORDER-RIGHT: medium none; TEXT-DECORATION: none" id=new_selection_block0.9630360911957411> <DIV>[출처] <a target="_blank" href="http://term.naver.com/entry.nhn?docId=1136220" target=_blank><FONT color=#444444>인민혁명당사건</FONT></A> | 두산백과</DIV></DIV></DIV> <P> </P> <P> </P> <P>↓ <유가족 이야기 + 인혁당 사건 사형수들의 최후 진술<STRONG> </STRONG>></P> <P></P> <P style="TEXT-ALIGN: left"><IMG style="FLOAT: none; CLEAR: none" class=txc-image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209/c7aa739ee38b42f29dbe3077e67bf33e.jpg"></P> <P> </P> <P> </P> <P style="TEXT-ALIGN: left"><IMG style="FLOAT: none; CLEAR: none" class=txc-image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209/236246c902c61a87d6a625d9f2bf80ed.jpg"></P> <P></P> <P><인혁당사건 여덟 희생자들의 가족사진 모음></P> <P> </P> <P style="TEXT-ALIGN: left"><IMG style="FLOAT: none; CLEAR: none" class=txc-image src="http://thimg.todayhumor.co.kr/upfile/201209/441698bdfc17d53ca6fcf4c9d41c6b78.jpg"></P> <P> </P> <P> </P> <P>한겨레 신문 기사 내용중 일부입니다. (<a target="_blank" h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1248.html" target=_blank>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1248.html</A>)</P> <P>.</P> <P>.</P> <P>새 벽 4시30분 흰색 죄수복을 입은 첫번째 사형수가 들어왔다. 백열등이 환하게 켜진 방안으로 들어온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여기가 어디야? 도대체 무슨 일이야?” 주위를 둘러본 그가 물었다. 법무관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대신 사형을 집행한다는 판결문을 읽고 유언을 물었다.</P> <P><BR></P> <P>“난 억울해. 하지만 언젠간 모든 일이 밝혀질 거요.” 사형수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집행관은 사형수의 머리에 검은 복면을 씌웠다. 목에 밧줄도 감았다. 잠시 뒤 버튼을 누르자 사형수 발밑의 송판이 열렸다. 군의관이 다가가 숨진 것을 확인하고 주검을 치웠다. “한 사람당 30분씩 걸렸다”고 박 목사는 회고했다.</P> <P><BR></P> <P>뒤이어 들어온 사형수들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마지막 가는 길을 위해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기도를 요청하겠습니까?”라는 질문에도 답하는 사형수는 없었다. 박 목사 역시 사형수들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 “저도 너무 긴장해서…. 마음속으로만 기도했지요.”</P> <P><BR></P> <P>어 느 사형수는 마지막 소원이라며 “아들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법무관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담배 한 개비 피우고 싶다”는 소원도 허락되지 않았다. “새장에 갇힌 새가 날지도 못하고 억울하게 죽는다”, “언젠가 이 더러운 정권은 망한다.” 마지막 소원조차 들어주지 않는 이들에게 남긴 사형수들의 마지막 말을 박 목사는 기억한다.</P> <P><BR></P> <P>그 가운데서도 박 목사는 이수병씨를 잊지 못한다. “나는 유신체제에 반대한 것밖에 없고, 민족과 민주주의를 위해서 투쟁한 것밖에 없는데 왜 억울하게 죽어야 되느냐! 반드시 우리의 이번 억울한 희생은 정의가 밝힐 것이다!” 그렇게 외친 이씨가 교수대에 올라가는 모습을 박 목사는 뇌리에 새겼다.</P> <P><BR></P> <P>8명의 사형집행이 끝난 아침 8시, 밖으로 나온 박 목사는 흰 봉투를 받았다. 특별근무수당으로 3만원이 들어 있었다. “죄책감이랄까…. 이런 일을 하고서 이런 걸 받아야 하는가 갈등을 느꼈죠.” 구치소 정문에서 유가족들이 거칠게 항의하고 있었다. 박 목사를 태운 지프차는 흐느끼는 유가족을 지나 구치소를 빠져나왔다. “그 뒤로 저는 사형제 반대론자가 됐지요.” 박 목사가 말했다.</P> <P> </P> <P> </P> <P><EMBED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src=http://pds21.egloos.com/pds/201202/24/99/Sad.swf wmode="transparent"></P> <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