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쯤이었나보다. <div>인천에서 근무할 때였는데,</div> <div>오랜만에 고향에 내려갔다가 고등학교 동창녀석의 소식을 듣게 됐다.</div> <div>남들보다 2~3년 늦게 군대를 갔는데, 하필 송내에서 근무한다는 거였다.</div> <div>휴가를 마치고 복귀한 후에 잦은 출동으로 바빠서 까마득히 잊고 있다가</div> <div>어느 화창한 주말 퇴근길에 전철을 타고 송내역을 지나다</div> <div>문득 친구놈을 생각해내곤 충동적으로 내려버렸다.</div> <div>그놈이 근무하는 부대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사전 정보가 없었던 탓에</div> <div>많이 헤맬 것을 걱정했지만 <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마침 그녀석이 근무하는 부대는 송내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span></div> <div><br /></div> <div>근무복을 입은채로 위병소에 도착하니 총을 들고 각을 잡고 있던 일병이 우물쭈물하다 제지를 한다.</div> <div><br /></div> <div>"무슨... 일로 오셨습니까?"</div> <div>"아, 여기 면회 좀 왔습니다?"</div> <div>"네? 면회... 말씀입니까?"</div> <div>"네. 면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div> <div>"... 저기... 위병소에 가서 말씀하시면 됩니다"</div> <div>"네, 고맙습니다"</div> <div><br /></div> <div>해군 근무복을 입은채로 면회를 왔다는 내가 이상했던 건지,</div> <div>아니면 일병인 자신에게 깎듯하게 존댓말을 하는 해군 하사가 당황스러웠던 건지,</div> <div>그 일병 녀석은 우물쭈물하며 위병소를 안내해줬다.</div> <div><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위병소에는 아까부터 병장 한 명이 나를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던 참이었다.</span></div> <div><br /></div> <div>"어떻게 오셨습니까?"</div> <div>"아, 여기 친구 면회 좀 왔어요"</div> <div>"여기 간부 말씀이십니까?"</div> <div>"아니오. 일병입니다"</div> <div>"아, 그래요? 그럼 여기 신청서 작성해 주시고 신분증 좀 주세요"</div> <div><br /></div> <div>병장은 내가 면회를 온 대상이 일병이라고 하자 대번에 말투가 바뀌었다.</div> <div>괘씸한 그 병장을 골려주고 싶었다.</div> <div>나는 지갑 속에서 군인신분증을 꺼내지 않고 '비밀취급인가증'을 꺼내 내밀었다.</div> <div>해군 함정, 그것도 CIC(Combat Information Center. 전투정보실)에 근무하는 사람이라면</div> <div>일병이나 이병도 비취증을 갖고 있을만큼 흔한 것이었지만</div> <div>병원생활을 하면서 다른 부대, 특히 육군에서는 비취증이 특별하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div> <div>게다가 비취증에는 93으로 시작하는 내 군번도 적혀 있었다.</div> <div>아니나 다를까, 비취증을 받아든 병장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div> <div><br /></div> <div>"...저... 여기...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div> <div><br /></div> <div>병장은 비취증을 손에 든 채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div> <div><br /></div> <div>"충성! 통신보안! 위병소 병장 OOO입니다. <span style="font-size: 9pt; line-height: 1.5">여기 잠깐 와보셔야겠습니다"</span></div> <div>"죄송합니다만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div> <div>"아, 네. 뭐 그러지요"</div> <div><br /></div> <div>잠시후 나타난 사람은 소위 계급장을 달고 있었다.</div> <div><br /></div> <div>"무슨 일이냐?"</div> <div>"이분께서 면회를 오셨다는데 말입니다"</div> <div>"그런데 뭐?"</div> <div>"근데, 이 분 신분증이..."</div> <div>"???"</div> <div><br /></div> <div>소위는 말 없이 비취증을 바라보다 내게 말을 걸었다.</div> <div><br /></div> <div>"XXX랑은 무슨 관계십니까?"</div> <div>"고등학교 동창입니다"</div> <div>"네, 그러시군요."</div> <div>"면회는... 안 되는 겁니까?"</div> <div>"아닙니다. 지금 바로 준비시킬테니 저쪽 면회실에 가셔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div> <div>"방문증을 좀..."</div> <div>"아. 방문증은 필요 없고, 이것 받아서 그냥 들어가십시오"</div> <div><br /></div> <div>소위는 약간 긴장한 표정으로 비취증을 돌려줬다.</div> <div><br /></div> <div>멀리서 친구녀석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헐레벌떡 뛰어오더니 위병소에 들렀다.</div> <div>소위와 병장에게 차례대로 무슨 얘긴가를 듣고는 조금 복잡하고 의아한 표정이 되어 면회실로 왔다.</div> <div><br /></div> <div>"야. 네가 면회 온 거였냐?"<br /></div> <div>"응. 퇴근하다가..."</div> <div>"너 이새끼, 도대체 뭔 짓을 했길래 부대가 발칵 뒤집혔냐?"</div> <div>"어, 그거... ㅋㅋㅋㅋ 내가 이걸 내밀었거든 ㅋㅋㅋㅋ"</div> <div><br /></div> <div>나는 친구녀석에게 비취증을 꺼내 보여줬다.</div> <div><br /></div> <div>"너 기무대 근무하냐?"</div> <div>"아니"</div> <div>"그럼 무슨 정보부대나 특수부대 같은데 있냐?"</div> <div>"아니"</div> <div>"근데 이건 어디서 났냐?"</div> <div>"이거 우리 배에 가면 이병들도 갖고 있어"</div> <div>"엥???"</div> <div>"해군에는 발에 채이는게 비취증이야. ㅋㅋㅋㅋㅋㅋ"</div> <div>"얌마. 그러니까 부대가 난리가 나지"</div> <div>"왜? 뭐라는데?"</div> <div>"나 보고 친구가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묻더니 면회 가서 딴소리 하지 말라더라"</div> <div><br /></div> <div>내가 위병소에서 만난 소위와 병장은 마침 내 친구의 소대장과 분대장이었다.</div> <div>소위는 소위 나름대로 비취증을 들고 나타난 정체 모를 내게</div> <div>혹시나 책 잡힐 일이 생기지 않을까 노심초사하여 친구에게 단단히 주의를 줬고,</div> <div>병장은 병장 나름대로 내게 실수한 일 때문에 혹시나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걱정되어</div> <div>친구더러 자기 얘기를 잘 해주라고 부탁했다고 한다.</div> <div><br /></div> <div>"야. 너 외박 나가고 싶지 않냐?"</div> <div>"나 휴가 갔다 온 지 얼마 안 돼서 외박 안될 거야"</div> <div>"그래? ... 잠깐 기다려봐"</div> <div><br /></div> <div>나는 친구녀석을 면회실에 남겨둔 채 위병소로 향했다.</div> <div><br /></div> <div>"저기... 실례 좀 하겠습니다."</div> <div>"아 네. 무슨 일이십니까?"</div> <div><br /></div> <div>아까 그 병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깎듯하게 나를 맞았다.</div> <div><br /></div> <div>"저... 아까 그 소위님을 뵙고 싶은데요"</div> <div>"네, 저 여깄습니다"</div> <div>"아. 다행입니다."<br />"안으로 들어오시죠."</div> <div><br /></div> <div>"제가 저 친구를 데리고 밖에 나가서 뭘 좀 먹이고 싶어서 그러는데요..."</div> <div>"뭐, 어려울 거 없습니다. 야 OOO병장, 쟤 외출증 끊어줘라"</div> <div>"아. 감사합니다. 근데... 이왕이면 외박으로 해주시면..."</div> <div>"아. 그럼 외박으로 해드리겠습니다. O병장 외박증 하나 끊어"</div> <div><br /></div> <div>"소대장님... XX는 휴가 갔다 온지 얼마 안 됐는데 말입니다"</div> <div>"어, 그래? 그럼 어떡하지?"</div> <div><br /></div> <div>"저...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저희가 고등학교 졸업하고 거의 5년 만에 처음 만나는 거라..."</div> <div>"아... 그러시구나... 음... 그럼... 원래는 안 되는 건데, 이번만 특별히 해드리겠습니다"</div> <div>"아이구, 이거 고맙습니다."</div> <div>"아, 뭘요. 오랜만에 만나셨다는데 이정도는 해 드려야죠. 외박증 준비해놓을테니까 좀 있다가 여기로 오십시오"</div> <div>"네, 감사합니다"</div> <div><br /></div> <div>나는 PX에서 이것저것 먹을 것을 잔뜩 사서 위병소에 건네줬다.</div> <div><br /></div> <div>"고마워서 제가 좀 준비했습니다. 이거 부대원들끼리 좀 나눠 드십시오"</div> <div>"이런거 안 주셔도 되는데...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div> <div>"소대장님, O병장님. 앞으로 제 친구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div> <div>"아... 아닙니다"</div> <div>"O병장님... 잘 좀 부탁드릴게요"</div> <div>"... 네. 알겠습니다"</div> <div>"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div> <div><br /></div> <div>나는 그렇게 친구녀석을 데리고 나와 함께 하루를 보냈다.</div> <div>전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입사한 회사 엘리베이터에서 녀석을 만났다.</div> <div>알고보니 같은 건물에 근무하고 있었다.</div> <div><br /></div> <div>"어...XXX 잘 지냈냐?"</div> <div>"그래. 덕분에 군생활도 잘 하고 잘 지냈다"</div> <div>"아 그래? ㅋㅋㅋㅋ"</div> <div>"너 왔다 가고 나서 대우가 달라지더라"</div> <div>"뭐 어떻게?"</div> <div>"소대장이랑 분대장이 내 눈치를 보더라 ㅋㅋㅋㅋㅋㅋ"</div> <div>"편하고 좋았겠네"</div> <div>"뭐, 몸은 편하고 좋았지 ㅋㅋㅋㅋㅋ"</div> <div><br /></div> <div>가끔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던 우리는 녀석과 내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서로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나면서 헤어지고</div> <div>이후 10년이 넘도록 두 번인가 만나고 소식이 끊겼다.</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