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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https://unsplash.com/
BGM 출처 : https://youtu.be/Vaq7rZxJW-k
정용주, 밥
뼈가 굳어가는 병에 걸린 그녀는
무허가 지압집 3층 계단을 오르며
자꾸만 나를 쳐다봤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신발을 신고
한 칸씩 계단을 오르는 그녀는
어디 가서 밥 먹고 오라고
숟가락을 입에 대는 시늉을 했다
정호승, 달팽이
내 마음은 연약하나 껍질은 단단하다
내 껍질은 연약하나 마음은 단단하다
사람들이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듯이
달팽이도 외롭지 않으면 길을 떠나지 않는다
이제 막 기울기 시작한 달은 차돌같이 차다
나의 길은 어느새 풀잎에 젖어 있다
손에 주전자를 들고 아침이슬을 밟으며
내가 가야 할 길 앞에서 누가 오고 있다
죄 없는 소년이다
소년이 무심코 나를 밟고 간다
아마 아침이슬인 줄 알았나 보다
노향림, 종이학
우리 아파트 바로 위층엔 신혼부부가 세들어 삽니다
원양어선을 타고 결혼식 다음날 떠난 신랑을 기다리는
그녀는 매일 종이학을 날립니다
한두 마리 날아오르다가 수십 마리가 우리집 베란다에
떨어져 죽습니다. 그 중 몇 마리는 아직
허공을 날고 있습니다
날개 없는 학을 무엇이 날려주는지 모른 채
나도 마주 손 흔들어 줍니다
어느덧 그녀의 하늘에서 나는 흔들립니다
종이학이 날아올 때마다 덜컹대는 창문
새로 돋는 아이비 덩굴손도 흔들립니다
허물린 담장 위엔 이승의 보이지 않는
새파란 손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매캐한 하늘 속 홀로 있어도
그리움 깊으면 흔들린다는 사실이
황홀해져 또다시 흔들립니다
불현듯 그대에게 날려 보낸 학 한 마리는
기다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나희덕, 초승달
오스트리아 마을에서
그곳 시인들과 저녁을 먹고
보리수 곁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어떤 손이 내 어깨를 감싸쥐었다
나는 그 말을 알아들었다
그가 몸을 돌려준 방향으로 하늘을 보니
산맥 위에 초승달이 떠 있었다
달 저편에 내가 두고 온 세계가 환히 보였다
그 후로 초승달을 볼 때마다
어깨에 가만히 와 얹히는 손 있다
저 맑고 여윈 빛을 보라고
달 저편에서 말을 건네는 손
다시 잡을 수 없음으로 아직 따뜻한 손
굽은 손등 말고는 제 몸을 보여주지 않는 초승달처럼
정희성, 난초
오십 줄 내 나이 맑은 어둠을 둘러
어제는 난초잎 한 줄기가 새로 올라왔다
그 해맑은 수묵색(水墨色) 차분한 그늘을 데불고
나의 잠 속엔 한밤 내 벌레가 쑤런거린다
난초잎 한 줄기를 바라보고 있으면
아닌 밤잠마저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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