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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의 서울, 그날도 가을이었다. 공기는 선선했고, 하늘은 여느 평범 한 날 처럼 유난히도 맑았다. 어쩌면 나에게도 수많은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익숙함에 기억조차 나지 않을 날 중 하나였을지 모른다. 볕이 쏟아지는 대학 캠퍼스에서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 시간, 늘 푸르렀던 나무에서 생명을 잃어가며 떨어져 내리는 것은 어쩌면 빨간 단풍 뿐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내 옆에는 눈물을 참으려 애쓰는 그녀, 지은이 있었다.
"현수야, 우리 이제 그만하자."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슴이 무겁게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이건, 이제 돌려줄게.” 그녀는 손목에 차고 있던 팔찌를 풀어 내게 건넸다. 팔찌는 바스라지는 단풍의 붉은 빛을 반사하며 빛바래고 있었다.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들이 짙게 담긴 물건이었다.
이해가 안 된다는 투로, 아니 이해 하지 않겠다는 어투로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거야?" 하고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이해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은 일이 되는 것 처럼, 나의 흐려진 눈이 분명 소리없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으리라.
"매일 이걸 보면서, 첫 생일에 건네주던 너를 생각했어. 이제 이걸 볼 때마다 날 잊지 않도록…” 끝 맺지 못한 말을 이어가 듯,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나를 한 번 더 바라보더니, 천천히 일어나 걸어갔다.
한참 동안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았다.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지은의 뒷 모습을 쫓듯 손에 쥔 팔찌를 바라보며, 행복 하기만 했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여전히 그 시간들은 짙은 추억을 되 비추며 가슴 속에 여전히 뛰고 있었다. 우리는, 헤어졌다. 그날 이후로 나는 매일 팔찌를 차고 다녔다. 빛 바랜 낙엽을 코팅하여 스크랩 북에 갈무리 하듯, 식어버린 시간들 이라도 지은이와의 추억을 잊지 않기 위해서.
헤어진 후, 술에 의지하며 지냈다. 팔찌가 온기를 잃지 않도록 내 손목에서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부던히 애를 썼고, 매일 밤 보면 그녀가 돌아 올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것 처럼 바라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녀의 첫 생일을 잊지 못할 추억으로 만들기 위해, 신문과 우유를 배달하던 날들의 새벽의 공기를 모아, 파티를 기어코 열어냈던 스카이 바에서, 화가 에게 그리는 동안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이라도 받은 것 처럼 추억에 취해 멍하니 팔찌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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