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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윤이상 국제음악제로 출범하려 했지만 이념적 이유로 '윤이상'이란 이름을 삭제하고 윤이상이름을빼고 통영국제음악제 라고 하죠...ㅡ 1995년 유명한 괴테상을 독일 바이마르에서 받고, 그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
'청와대 친서' 거짓말에 속아 고문실에 대롱대롱 매달린 세계적인 음악가
프레시안 : 체포 과정은 어떠했나.
서중석 : 체포가 아주 극적으로 이뤄진 경우도 많고, 당사자를 속여 끌고 온 경우도 적지 않다. 이러한 체포 과정이 크게 논란이 됐다. 6월 20일 이후 해외에서 붙잡혀 온 사람이 서독에서 16명, 프랑스에서 8명, 미국에서 3명, 영국에서 2명, 오스트리아에서 1명 등 무려 30명이나 됐다.
당시 한국 지식인, 문화인 가운데 일류급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동베를린 사건으로 체포됐다고 볼 수 있다.
체포 과정을 보면 최덕신 서독 주재 대사도 모르게 작전이 시작된 것으로 돼 있다.
윤이상의 경우 '박 대통령의 친서를 가져왔다. 8.15 행사에 당신이 초대받았다'고 말한 사람에게 속아서 오게 됐다.
윤이상, 이응로 모두 이런 식이었다.
특정 장소로 오라는 모 기관의 말에 속아서 갔다가, 그곳에서 서독 본 주재 한국 대사관까지 강제로 납치된 경우도 있다. 상당수는 기관원과 같이 가는 것에 응하지 않는다면 여권이나 대한민국 시민권을 뺏길 것이라는 압박을 받고 응했고, 또 한국의 가족이 당할 피해 같은 것 때문에 응하고 그랬다.
천상병 시인, 이 양반은 이 사건으로 몸이 더 나빠져서 기이한 행동을 하게 된다. 그런 기이한 행동이 참 안타까운 모습으로 여러 군데에서 나타나고 그랬다. 이 사람은 중앙정보부에서 '베를린 유학생 친구와 어떤 관계인지 자백하라'는 요구를 받으며 3번이나 전기 고문을 당했다. 몇 번이나 까무러치고 그랬다. 그래서 이 사건으로 잡혀간 지 6개월 만에 나온 후에도 행려병자로 분류돼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있었다. 행려병자 비슷한 취급을 오래 받았다. 내가 <신동아>에 있을 때 <신동아> 부장이던 사람하고 천 시인이 친구였는데, 천 시인이 다리를 비틀며 회사에 찾아와 친구 이름을 부르면서 소리를 지르고 그랬던 게 기억난다. (천상병 시인이 행려병자로 분류돼 병원에 있을 때,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지인들은 천 시인이 어딘가에서 쓰러져 세상을 떠난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을 했다. 시간이 더 지나도 모습을 보이지 않자, 지인들은 천상병 유고 시집을 발간한다. 그런데 얼마 후 천 시인은 병원에서 나와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시인이 살아 있는 동안 유고 시집이 나온 특이한 사례다. 그렇게 해서 첫 번째 시집을 낸 천상병은 고문과 가난으로 고통받았음에도 삶을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으로 표현한 '귀천'을 비롯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준 시를 남기고 1993년 세상을 떠났다. <편집자>)
프레시안 : 천상병 시인뿐만 아니라 이 사건에 휘말린 다른 사람들도 극심한 고통을 겪었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이들은 어떤 고문을 당했나.
서중석 : 잡혀 온 사람들은 고문을 많이 당했다. 대표적으로 음악가 윤이상이 당한 경우를 한 번 보자. 6월 17일 낯선 사람이 윤이상에게 전화를 해서 "저는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 비서입니다. 대통령께서 보낸 친서를 전달해야 하니 이 호텔로 나와주십시오"라고 했다. 그래서 거기에 가니까, '본국 대사관에 같이 가자'고 하면서 윤이상을 끌고 간 것이다.
윤이상은 심한 고문을 당했다. 처음에는 윤이상이 시멘트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는데, 기관원은 윤이상의 허리 쪽을 발로 차고 무릎과 정강이를 밟아 뭉개면서 무릎을 꿇게 하고 그러면서 계속 고문했다. "너는 북조선의 간첩이야. 너는 공산주의자이며 노동당원이야"라며 윤이상한테 이 내용을 쓰라고 강요했다. 모서리가 뾰족하고 두꺼운 각목으로 윤이상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마구 때려 쓰러뜨렸다. 이런 매타작이 계속됐다.
그뿐만 아니라 1미터 정도 되는 높이의 통나무에 윤이상을 매달고, 팔다리를 둥글고 긴 나무에 묶은 다음 얼굴에 젖은 천을 씌웠다. 물이 가득 든 주전자의 물을 천 위에 막 부어대면 천이 입과 코에 달라붙어서 숨쉬기도 어렵고 기절하게 되는데, 이런 물고문으로 윤이상은 몇 번이나 정신을 잃었다. 그런 후에는 다시 결박을 풀어서 바닥에 눕힌 다음 의사가 주사를 놓아 깨어나면 또 매달아서 물고문을 계속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윤이상은 어린 시절 고향 통영의 어른들이 송아지나 돼지를 잡던 모습 그대로 자신이 통나무에 매달린 모습이었다고 했다. 박정희 정권 때 나도 이걸 당했는데, 그때 나 역시 꼭 그런 생각이 들더라. 돼지를 매달듯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으니까. 하여튼 주사를 7번 정도 놓은 뒤 고문자들은 윤이상을 잠시 쉬게 한 후 계속해서 자기들이 쓰라는 대로 진술서를 쓰라고 강요했다.
출처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319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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