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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의 계획, 빛잔치]
그렇게 17살 겨울 때부터 세운 계획은 달성되기 직전인 25살 봄에 산산이 사라져 버렸다.
우리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버지도 회사가 1차 부도났을 때는 연 매출액이 100억이 넘는 회사가 무슨 부도가 나냐고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넌 걱정 말고 공부나 하라'고 웃으며 말했다. 2차부도가 났고 결국 최종부도 처리가 되었다.
아버지는 내 자취방으로 오셔서 한 달 동안 핸드폰을 꺼두고 TV만 보셨다. 그 사이 어머니는 친구네 집으로 가 계셨다.
한 달이 지나자 아버지가 수원으로 가 엄마를 만나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하고 전화를 할 테니 어떤 결정을 하더라도 내가 그대로 따라주었으면 좋겠다고 부탁을 하시고 올라갔다.
그리고 그날 밤 어머니께 전화가 왔다. 울고 있었다. 미안한데 짐을 싸서 오라 했다. 학교는 어떻게 할까 물어보니 그만두게 될 것이고 우리는 자꾸 사람들이 찾아와서 몰래 짐을 챙겨 도망을 가야 할 것 같다고 말을 했다.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집을 구해 밤에 몰래 이사를 갔다. 이게 바로 '야반도주'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우리 셋만 알고 세상 아무도 모르는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그 사실은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되었기에 난 조용히 내 아버지 어머니와 세상에서 잠시 사라졌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지나 아버지는 빚잔치를 한다 했다. 나는 어렴풋이 들어만 봤어도 빚잔치가 어떤 것인지 잘 몰랐다.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분간은 아들 니가 내 말에 전적으로 좀 따라 줬으면 좋겠어. 너도 힘들겠지만 이것을 또 수습해야 살아나갈 수 있지 않겠어? 미안하다."
"아니야 아빠! 옳고 그름 판단 안 하고 눈만 꿈뻑꿈뻑 할 테니까 하고 싶은 대로 해. 여태까지 아빠도 나 내 마음대로 하게 해줬잖아? 그러니까 나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
"..."
그 말을 하고 우리는 서로를 쳐다볼 수 없었다. 아무 소리도 내면 안 되었다. 눈에 뭐가 맺혀서도 안된다.
지금 세상에서 가장 힘든 사람은 내 앞에 있는 이 사람이다. 이 사람은 어릴 적 나에게 신이었다. 신이 나에게 부탁을 했다. 그리고 미안하다며 사과를 했다. 나는 아버지가 무엇이 되었든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하지 않기로 그렇게 어릴 적 신께 약속했다.
신의 첫 부탁은 의외로 간단했다. 운전기사였다. 회사에 전화를 했고 누군가와 통화를 한 뒤 내가 운전을 해서 같이 갔다.
직원들은 사장이 온다니까 다 모여 있었다. 거기에는 내가 삼촌으로 부르던 주임 형아도 있었고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 외삼촌도 있었다.
"지금부터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리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서지 마."
"응..."
사람들의 눈빛이 어둡고 싸늘했다. 나를 항상 반갑게 '막내야'라고 부르던 마르고 키가 큰 주임 형아도 팔짱을 끼고 아버지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그들에게 들어가서 일하지 왜 다 나왔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 말을 듣고도 들어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형님 이야기 좀 하시죠."
작은아버지가 아버지를 모시고 어디론가 갔다. 작은 아버지가 나는 잠깐 차에서 기다리라고 해서 아버지를 쳐다봤더니 그러라고 고갯짓을 했다.
그래서 잠시 쉬고 있었는데 바깥에 모인 사람들의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렸다. 개X끼, 저 쳐 죽일 x 하는 욕설도 들리고 이럴 줄 알았다는 사람. 저 사람이 문제라는 이야기. 이제 우린 어떡하냐며 못 받은 월급 이야기 등등 일부러 나를 들으라는 듯 그들은 다 들리게 내 아버지를 욕하고,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걱정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버지가 혼자 나오셨다.
주임형아가 아버지랑 이야기 좀 하자고 그 앞을 가로막았다. 아버지가 미안한데 나중에 이야기해도 되겠느냐 하자 아버지 멱살을 잡고 욕을 했다.
"어디가 이 씨X!"
난 부들부들 몸이 떨렸다.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 먼저 생각을 해봤다.
'아버지가 날 여기 왜 데리고 온 걸까? 혹시 이런 사태에 대비해 사고를 막기 위해 나를 같이 가자 한 건가?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그저 위안이 될 아들이라? 아니다! 이건 이런 때를 위해서 인 것 같다. 명령은 없었지만 나가자!'
그리고 운전석에서 내리는 순간
"짝! 야 이 X새끼야!"
아버지는 따귀를 맞고 땅으로 꼬꾸라졌다. 난 움직이지 않았다. 주먹을 너무 꽉 쥐고 있어 부들부들 거릴 지경이었지만 그대로 뛰어갔다가는 안될 것 같았다. 그럼 분명 큰 사고가 날 것 같았다. 주임형아가 빨갛게 보였다. 넘어졌던 아버지는
"이 새X가 어디 손을 놀려!"
하면서 허공에 빈 스윙을 했다. 나이도 있으시고 그 당시 살도 찌셨어서 예전 복근이 선명하던 아버지가 아니었다. ‘뒤뚱...‘
지금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살면서 이 때 가장 빨리 뛴 것 같다. 가서 주임형아의 머리를 잡아 돌려 팔꿈치로 얼굴을 그었다.
"어디 이 씨X놈이 으른한테!!!"
넘어진 주임형을 온 힘을 다해 발로 차자 아버지는 나를 잡았다. 순간 정신이 없어 말리는 줄도 모르고 더 때려주러 가는데
"신일!!!"
하고 소리 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잠깐 나갔었다. '내가 뭘 한 거지?'하고 보니 하얀 셔츠가 피로 물든 주임형아가 쓰러져 얼굴을 부여잡고 있었고 그 주변에 아주머니들이 둘러싸 '아이고 어떡해 아이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 주임형아는 까맣게 탄 것처럼 혼자만 어두워 보였다.
"가자"
아버지께서는 가자고 하셨다.
"아빠 미안."
"..."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리고 아버지와 그렇게 몇 날 며칠을 돌아다녔다. 돈을 받아야 하는 아는 지인이 운영하는 경북의 공장도 가고 안산이며 원주며 전국에 흩어져 있는 거래처 공장들을 몇 날 며칠을 돌아다녔다. 그 운전을 하면서 아버지가 날 의지의 대상이나 그런 게 아니라 단순히 본인이 직접 운전하기가 힘들어 며칠 좀 해달라고 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할 만큼 많은 곳을 돌아다녔다.
아버지는 그 와중에도 항상 단정하려고 애쓰셨다. 옷매무새를 바로 하시고 항상 차분하게 갔다가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오셨다. 아버지가 아무리 단정하고 침착하려고 애써도 뿌연 연탄재를 맞은 것처럼 뿌옇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게 분명 안 좋은 일인데도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다 보니 서로 대화를 많이 하게 되었다.
"그랬더니 그때 있잖아? 담임이 나한테 막 욕을 하는 거야!!! 우리 담임 모르지? 학주 다음으로 무서워! 아버지 옛날 모습이랑 비슷한데 키가 175쯤 된다고 생각하면 돼! 엄마가 돈 봉투든 책을 깜빡해 가지고..."
이런 옛날이야기도 하고 아버지 어릴 때 이야기도 듣고 차 안에서 둘이 심심하니까 주무실 때랑 휴게소에서 뭐 먹을 때 빼고는 그렇게 떠들면서 받을 돈들을 부탁하거나 조그만 공장에서는 물건으로 받아오기도 했다.
그리고 한 달 정도 후 빚잔치를 하게 되었다.
관련된 사람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금전거래를 정리하는 자리였다. 나는 긴장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 했다. 그래서 아버지께 물어봤다.
"아빠 지난번 같은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 이번에는 나 그냥 가만히 있어?"
"응. 넌 그냥 차에 있어!"
하고 밝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우리는 회사로 갔다.
'웬 돼지?'
건물 앞에 돼지 반 마리가 드럼통 잘라 놓은 곳에 걸려 있었다. 거기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뭐야 빚잔치가 진짜 잔치였어?'
나는 빚잔치를 들었을 때 나 돈 이거 밖에 없으니 배 째! 하고 펑 터지는 폭죽을 생각했다. 그 폭죽이 터지며 내려오는 돈을 급하게 줍는 사람들의 모습. 그런데 이것들이 진짜 잔치를 하려고 하고 있네?
신기했다. 아버지께 물었다.
"빚잔치가 진짜 잔치였어?"
"일이 잘 안됐으니 한 분 한 분께 진심으로 사과하면서 용서를 빌어야지.
다 다들 가정이 있고 한데... 은행권이나 다른 회사 사람들도 그렇고..."
"아..."
"아빠 갔다 올게!"
"응. 차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전화해!"
하고 아버지는 사무실로 갔다. 한참 후 나오셔서 사람들에게 술을 따라주셨다. 받는 사람들의 표정은 못 받을 술을 받는 얼굴이었다. 종종 아주머니들의 삿대질 하는 모습과 고성이 들렸다. 그러다 결국 또 사고가 터졌다.
"야 이 개X끼야 뉘가 나 이 회솨로 오라뭬~"
한참 시간이 흘렀음에도 코에 반창고를 붙이고 있는 주임 형아였다. 술에 취해 아버지께 비틀비틀 다가왔다. 그리고 손가락질을 하며 소리 질렀다.
"야 입이 이쑤면 말울 해애!!!"
"아이고 아까부터 술을 계속 마시더니... 사장님 대리님은 저희가 데리고 갈께요!"
'어라? 저 새X 언제 대리됐지? 주임 형아인데...
아 내가 주임형아를 처음 본 게 벌써 6년 전이구나...‘
내가 운전면허 따고 나서 공장 포터 운전해 보고 싶어서 갔을 때 주임 형아가 차라리 자기랑 한번 거래처들 갔다 오자고 아버지께 허락을 구해서 운전 연수를 시켜주던 일이 생각이 났다. 회사 갈 때마다 '막내야~'하고 반갑게 불러주던 형이었다.
"아닙니다! 할 말 있나 본 데 놔두시죠?"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다. 차 안에서 밖을 보던 나는 놀랐다.
'아빠가 왜 저러지...? 아 또 비상인데? 이번엔 얼굴은 절대 안 된다. '
이런 생각을 하며 슬슬 차에서 내렸다. 둘의 대화가 시작됐다.
"야 이 새X야! 뉘가 오라 그럴 땐 언제고 이제 와서 토껴?"
"내가 널 언제 오라 했어? 니가 원서 내고 와서 월급 이야기했을 때 20만 원만 올려달라 해서 올려준 건 내가 기억이 난다!"
"구게 오라구 항거 아뉘야?"
"어쨌든 미안하다! 월급은 꼭 챙겨줄게... 퇴직금은 사람들하고 이야...."
와장창.
테이블에 있던 사이다 캔을 바로 앞에 있던 아버지께 던졌다. 또 아주머니들의 '아이고...오오오..' 하는 탄식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옷을 툭툭 털며 괜찮다고 하더니 주임형아에게 다가갔다.
"너도 한대 맞아라 이새X야! 짜~악!"
콰당탕...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어디 어린노무 새X가 으른한테 버릇없이..."
웃으면 안 되는데 웃겼다. 내 아버지는 꼰대였다. 작은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를 밀쳤다. 그리고 나를 부르며 아버지 모시고 들어가라 했다. 난 작은 아버지와 외삼촌에게 인사를 하고 아버지 회사였던 그곳을 떠나왔다. 차에 타서 아버지께 물어봤다.
"아빠도 사람 때릴 줄 알아? 처음 봤네?"
"지난번에 한대 맞았잖아. 줄 건 주고 갚을 건 갚아야지!"
"하하하하"
우리는 그 와중에도 하하 호호 웃으며 아버지의 옛날 무용담들을 들으며 비밀 아파트로 갔다.
그렇게 얼마 후 나는 다시 남은 대학 4학년을 마치고 얼른 취업을 하는 게 낫겠다 하셔서 돌아와 대학을 다니고 아버지가 연구원으로 계셨던 S전자에 들어갔다.
망한 집이 힘든 것이 무엇이냐면 그동안의 습관들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어머니는 돈을 쓰던 습관이 있는데 그걸 하루아침에 바꾸기 힘들었다. 비상금으로 챙겨놓은 돈이 있으니 그걸 최소한으로 사용하면서도 예전 습관을 끊지를 못했다.
"아들 돈 좀."
"뭐야? 내가 월급에서 빠져나갈 거 다 나가고 남은거 다 줬잖아? 월급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다 썼어?"
"미자이모 안 있나? 그 이모가..."
"알았어! 우리 망했어 정신 차려! 이제 웬만한 모임도 끊고... 내가 지금 낼 거 다 내고 준 돈도 150넘는데 며칠 만에 이러면 안 돼 엄마!"
"알아따! 내도 아는데... "
"카드 줄 테니까 한도까지 다 쓰지 말고 비상금처럼 써야 돼 급할 때만"
"알았다 아들 사랑해~!"
그리고 처음에는 야금야금 빠져나가던 돈이 나중에는 뭉텅 빠져나가길래 전화했더니 집에 가서 이야기하자 했다. 돌아와서 울며 어쩔 수 없었다 했다. 그 사람은 우리 집 망한 거 모르는데 거절할 수가 없었다나...
결국 한도 초과 메시지가 오자 나는 카드를 빼았았다. 앞날이 너무 깜깜하고 어둡게 느껴졌다. 그 기간이 길지는 않았지만 뒤로도 몇 달간은 적응을 하지 못해 힘들어하셨고 나도 힘들었다.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어느날부터 나는 사람에게 색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릴 때 어쩌다가 한번씩 본게 착각이 아니였고, 지금은 계속 선명하게 뚜렷하게 보였다.
'이게 갑자기 또 무슨 증상이야? 이제 환청에 이어 환각까지 생기나? 근데 왜 사람한테 만이지?' 정말 환장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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