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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는 거대한 영토와 수많은 인구를 가졌으나, 자국보다 훨씬 작은 나라인 영국에게 약 200년 동안 식민 지배를 받았습니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인데, 첫 번째는 인도가 여러 개의 작은 나라들로 분열되어 서로 싸우고 견제하느라 하나로 뭉쳐 영국에 저항하지 못했으며, 두 번째는 영국군이 인도의 군대들보다 훨씬 용감하고 강력했던 탓이었습니다.
그러한 사건을 보여준 사례가 하나 있는데, 바로 1803년 9월 23일에 벌어진 아싸예(Assaye)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9,500명의 영국군은 무려 7만 명이 넘는 인도의 마라타족 군대와 정면 대결을 벌여 기적처럼 승리하였습니다.
인도 남부, 데칸 고원의 토착민인 마라타족들은 1674년 마라타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이들은 당시 인도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던 무굴제국과도 싸워서 이길 만큼 강력했는데, 18세기 말부터 마라타 제국 안에서는 권력을 놓고 신디아와 홀카르의 파벌 싸움이 치열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인 1802년, 마라타 제국의 중요한 도시인 푸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홀카르의 군대가 신디아와 그를 편든 마라타 제국의 재상인 바지 라오 2세의 군대와 싸워 크게 이겼습니다.
그러자 바지 라오 2세는 대략 18세기부터 남쪽의 바다를 통해 인도의 해안 지대를 서서히 차지하고 있던 영국의 동인도 회사가 지배하고 있던 영토인 바세인으로 달아나서, 자신을 보호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영국 측은 그 요청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바지 라오 2세를 상대로 마라타 제국의 영토인 마하라슈트라에 6천 명의 영국군이 주둔하고 마라타 제국의 외교 업무는 전부 영국의 감독을 받도록 하는 바세인 조약을 맺었습니다. 이 바세인 조약의 체결 소식을 듣고 신디아와 홀카르는 격렬하게 반대하였고, 영국과 맞서 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한편 인도에 주둔한 영국군의 사령관인 아서 웰즐리 장군은 9,500명의 영국군을 이끌고 마라타 제국의 영토로 진격하였습니다. 아서 웰즐리는 훗날 1815년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워털루 전투에서 격파한 그 웰링턴 공작이었습니다.
그리고 1803년 9월 23일에 벌어진 아싸예 전투에서 웰즐리가 지휘하는 9,500명의 영국군은 2만 명의 보병(마라타족의 전통 방식대로 싸웠던 부대)과 4만 명의 기병 그리고 1만 800명의 유럽식으로 훈련받은 새로운 보병들로 이루어진 7만 800명의 마라타 군대와 정면 대결을 벌여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믿기지 않는 결과의 원인은 웰즐리의 뛰어난 지휘력과 영국군 보병들의 우수한 규율과 집단 전술, 그리고 마라타족들 사이의 심각한 내분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마라타 군대는 두 명의 장군인 본슬레와 신디아가 지휘하고 있었는데, 신디아와 사이가 나빴던 본슬레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도망치는 바람에 마라타족은 혼란에 휩싸여 정면으로 돌격해오는 영국군의 공세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훗날 웰즐리는 자신이 거둔 수많은 승리들 중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을 물리친 워털루 전투보다 아싸예 전투가 더욱 위대한 승리였다고 회고했습니다.
반면 아싸예 전투에서 자신들보다 훨씬 적은 영국군한테 6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 참패한 마라타 제국은 지휘관들 사이의 내분이 더욱 심해지고 국가의 위신과 군대의 사기가 크게 떨어져 사실상 붕괴 직전의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리고 15년 후인 1818년, 마라타 제국 전체의 영토는 마침내 영국에게 빼앗기고 마라타 제국 자체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출처 | 지도에서 사라진 나라들/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222~22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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