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꼬마 시절부터 책덕후였다. 삶에 찌든 지금은 과거형이 됐지만 그땐 그랬다. 새학기 국어 교과서를 받으면 소설부터 찾아내 읽었었다.

아무 생각도 없이 '넌 공부를 잘하니까 이과 가서 의사나 약사를 하라'는 몹쓸 소리 한 마디에 인생을 처박았다. 수학은, 그냥 안 되는 거였다.

전과자 타이틀을 달고 도로 문과가 됐다. 성적은 여유가 넘쳤지만, 어디든 붙어야 한다는 압박감 약간, 책덕의 자부심 약간을 섞어 영문학을 선택했다. 미련하게도.

공부 자체는 나쁘진 않았다. 즐겁기도 했다. 봄 학기에는 셰익스피어의 희극, 가을 학기에는 비극 강의가 열렸는데 지금 생각해 봐도 감탄이 나오는 커리큘럼이었다. 

희극은 못 들었지만 비극 강의는 계절맞춤형이라 해도 손색이 없었다. 해가 짧아지는 계절, 학교를 물들인 은행잎의 노란 물결, 햄릿의 그 유명한 to be or not to be를 읊는 퀴즈. 과에 얼마 안 되는 남학우들은 한껏 힘을 실어 그 장중한 독백을 읊조렸고, 박수가 쏟아졌다.
리어왕을 끝낼 무렵, 집에 돌아가는 길의 보랏빛 하늘에서 코델리어의 보랏빛 입술을 무심결에 떠올리기도 했었다.

정신박약아의 의식에서 자살하는 하버드생의 의식으로, 읽어가면서 나까지 덩달아 미칠 뻔했던 사운드 앤 퓨리. 소설은 벅찼지만, 단어 그대로 책을 떼는 보람이 있었다. 시 수업의 실비아 플라스. 많이 까먹었지만, lady lazarus였었나, 그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재 속에서 붉게 일어나 남자를 잡아 삼키리-하는 구절이 있었던 것 같다. 그 시를 가장 좋아했었다.

가끔씩은 국문과 수업을 들으러 갔다. 심화전공 학점이 필요한데 듣기는 영 부담스런 영어강의만이 남아 있다거나 할 때. 한번쯤 소설쓰기 수업은 듣고 싶었는데 결국은 못 듣고 졸업했다.

학년이 찰수록 강의실엔 시름이 깊어갔다. 선배들도 동기들도, 심지어 꼬꼬마들도 어렴풋이 알 정도였다. 여자, 문과, 게다가 비상경 계열. 복수전공조차 현실적으로 불가능해진 상황. (본전공 필수학점을 대량 늘려놔서, 복전으로 8학기 내에 졸업하는 건 '이론상'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 정도 학교씩이나 되면서도 현실이 그랬다. 문학이라는 낭만 속에서 깨어날 시간이었다. 별 짓을 해도 안 되더라,는 소문이 사실이 될 즈음, 나는 책을 덮고 노량진에 틀어박혔다.

그리고 지금. 전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다. 아마도 '그나마 일할 수 있게 된' 대부분의 우리 부류들이 그러할 것처럼. 

대학에서의 시간이 불행하지는 않았다. 즐거웠던 시간들이었다. 수차례 이삿짐을 풀고 끌러내면서도 무겁고 덩어리 큰 전공책들을 끝까지 매달고 다닐 만큼.

그리고 지금. 일하기 시작한 이후로 책을 읽은 기억이 없다. 살기 바빠서, 혹은, 그 즐거웠던 시간을 이렇게 허무하게 덮어버린 삶이 허무하고,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원망스러워서.

미련한 문학사는 그래서, 문이과 선택을 앞둔 사촌동생들을 붙들고 같잖은 꼰대질을 해댄다. 문과는 미친 짓이야. 먹고 살려면 이과를 가야지. 취업깡패 전화기 몰라?

미련하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