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는 외할머니, 엄마, 저 이렇게 셋이서 삽니다.
아빠는 일때문에 지방에 계시고 한달에 한번 정도 집으로 오십니다.
외할머니께서 혼자 사시다가 간병인이 좀 이상한 사람이어서
외가댁 분들 고민 끝에 타인 손에 맡길 순 없다고 결론 짓고 저희 집으로 모시게 됐습니다.
사정상 할머니가 계실 만한 곳이 저희집뿐이었습니다.
오신 지 2년 되어갑니다.
할머니는 아흔이 넘으셨고 걷지 못하십니다.
집에선 바퀴 달린 원형 의자 타고 다니십니다. 그.. 목욕탕 의자? 같은 거요.
치매 증세를 보이시는데, 심한 편은 아니고 하셨던 말씀 또 하시고, 몇 분 전 일 잘 기억 못하시고 그러십니다.
그런데 당신 생각에 인상 깊은 것들은 기억 하시고요.
화장실도 잘 가시고, 밥도 잘 드십니다. 몸이 조금 불편하신 것 빼고는 그래도 정정하신 편입니다.
할머니께선 아직도 제가 어려보이는지 제 나이를 여러번 물어보시는데 대답할 때마다 반응이 늘 같습니다.ㅎㅎ
스무살도 안돼보이는데 하면서 니가 이렇게 커다랗게 될때까지 이 할미가 오래 사는구나.. 하십니다.
그리고 꼭 혀를 한번 내두르십니다.
좀.. 귀여우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께서는 저희 집에 계신게 불편하신 것 같습니다.
전에 혼자 사실 때에는 큰이모댁 근처여서 큰이모께서 많이 챙겨주셨습니다.
또한 큰딸이니 할머니께서도 많이 의지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간병인 문제 터지고, 저희 집으로 오시게 되면서 할머니는 '큰딸이 나를 막내딸집에 떼어다놨다'라고 생각하십니다.
아주 괘씸하다고 누누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시골에 그냥 냅두면 내가 알아서 살 텐데 왜 막내딸 고생을 시키느냐.
큰딸을 내가 그렇게 안키웠는데 마음이 아주 검다.'
이런 말씀 많이 하십니다.
저도 사람인지라 같은 말을 여러번 들으면 정말 기가 빨립니다.
주로 할머니께서 반복하시는 말씀은, 왜 나를 여기에 떼어다 놨느냐, 집으로 돌아갈 거다, 큰딸이 아주 못됐다 등..입니다.
처음에는 그런 할머니 말씀에 다 대답해드리기도 했는데, 자꾸 그러시니까 짜증이 날 때도 있습니다.
너무 힘들땐 말을 돌리거나, 아니면 대답을 안하기도 합니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저번 주말엔 제가 몸살이 나서 하루종일 골골 댔습니다.
엄마께서 저녁 먹으러 나오라고 부르셔서 아무말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땐 의자에 앉아있는 것도 좀 힘들었거든요.
할머니께서도 나오셔서 제 옆에 앉아 계시다가 슬쩍 방으로 다시 들어가시는 겁니다.
엄마께서 왜 들어가시냐 여쭤보시자 할머니 대답이, 제가 할머니를 싫어하니 저녁 같이 안드시겠다 하십니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손주 눈치를 보고 계시다는 게 참.. 마음이 그렇더라고요.
어제 저녁엔 몸이 나아서 제가 기분이 상쾌했습니다.
할머니께서도 어젠 기분이 좋아보이셨고, 저녁에 같이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보단 제가 할머니 말씀을 들은 거지요.)
힘들었던 인생사 말씀하시는데, 그제서야 왜 할머니가 늘 큰이모를 욕하시고 자꾸 집으로 돌아갈거라고 하시는지 이해되었습니다.
저희 엄마를 낳으셨을 때, 할아버지 때문에 집이 많이 힘들어서 저희 엄마에게 해준게 아무것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해준 것도 없는 막내딸 집에서 신세를 지는게 늘 미안하시고 마음이 안좋으셨던 겁니다.
사실 신세를 지는 게 아닌데, 할머니 입장에선 그렇게 생각되시나 봅니다.
그러니 미안한 마음에 자꾸 큰이모를 탓하시고, 이 곳을 벗어나려고 하신 듯 합니다.
그제서야 제가 자꾸 할머니 말씀을 들리는 대로만 들었구나 싶었습니다.
라고 어제까지만 해도 생각하고 기분 좋게 잠들었습니다.
ㅎㅎ;; 서론이 좀 길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요 한 달 사이에 할머니께서 새벽부터 혼잣말을 부쩍 하십니다.
약 6시부터 아침드시는 9시까지 거의 세시간이나 지속됩니다.
새벽에 일찍 깨셔서 감정에 북바쳐서 두세시간을 계속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제가 위에 적은 대로 큰이모 이야기부터 당신 인생까지 계속 설움을 토해내십니다.
잠귀 밝으신 엄마는 아침에 그 소리에 깨시고, 할머니는 그때부터 혼잣말을 엄마에게 쏟으십니다.
엄마는 엄마대로 또 그것을 다 들어줘야 효도고, 자식된 도리라고 생각하셔서 할머니 말씀을 다 들으십니다.
엄마의 고지식한 성품 때문이라도 그런 할머니를 외면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일도 하시고, 살림도 하시고, 할머니도 모시고, 저도 챙기시고.
그 피로와 스트레스는 제가 다 헤아릴 수 없을 겁니다.
오늘 늦잠을 잤는데 평소라면 할머니 목소리부터 들렸을텐데 오늘은 엄마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차마 할머니를 탓할 수도, 이 힘든 상황을 누군가한테 토로할 수도 없으셨던 엄마는
할머니께 제발 그만하시면 안되겠냐며 진 빠진 목소리로 부탁 아닌 부탁을 하고 계셨습니다.
할머니는 난 그런 적 없다 말씀하시고, 망령이 들어서 그런것 같다며 미안하다고 방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엄마는 저 보시고, 내가 할머니 모신게 이렇게까지 힘들 줄은 몰랐다고, 내가 잘못 생각한건가, 하십니다.
요즘 부쩍 할머니께서 새벽부터 하시는 혼잣말이 심해지면서 그렇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홍삼 하나 꺼내서 컵에 따라 드리고, 너무 다 들으려고 하지 마시라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할머니한테 반갑게 아침인사 하고 떠들면서 아침 먹는 게 전부입니다.
안그럼 할머니께서 또 같은 말씀 하실 테니까요.
엄마의 하루를 그런 스트레스로 시작할 수밖에 없나 하는 게 제 고민입니다.
매일 아침 두세시간은 열심히 설움을 토해내시는 할머니를,
그런 할머니를 모시면서 고스란히 스트레스 받는 엄마를,
저는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순간적인 대처뿐이어서.. 더 현명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할머니께 말을 말라 할 수도 없고, 엄마께 듣지 말라 할 수도 없고..
제가 그 사이에서 할 수 있는 건 없을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쓰고나면 좀 개운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도 않네요. ㅎㅎ;
제 고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언 한마디씩 해주시면 정말 감사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