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터지는 한국축구] 3. 나사풀린 선수들
[경향신문 2005-08-10 19:48]
태극전사들이 나약해졌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무서운 것없이 강호에게 달려들던 기백, “동료 대신 내가 한발 더 뛰겠다”는 희생정신이 없어진 지 오래다.
진정한 사냥꾼은 토끼 한마리를 잡아도 사력을 다 하는 법. 그러나 더운 날씨 속에서 펼친 약체와의 원정경기에서 유독 부진했던 태극전사들은 더 이상 죽을 힘을 다해 끝까지 먹이를 쫓는 맹수가 아니었다. 태극전사들이 패전병으로 전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번 주전은 영원한 주전=본프레레호에는 붙박이 주전들이 많다. 이운재(GK), 이동국(FW), 김동진(MF)이 대표적인 케이스. 그러나 요즘 이들의 플레이를 보면 예전보다 많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대번에 받는다.
2002년 월드컵에서 야신상까지 노렸던 이운재의 기량은 예전만 훨씬 못하다. 물론 2002년 월드컵 이후 3년이나 흘렀기에 그도 벌써 32살의 노장. 예전 같은 순발력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끊임없는 훈련으로 흐르는 세월을 극복하려는 의지로 노화를 늦출 뿐.
그런데 이운재는 동아시아대회에 앞서 몸무게가 5㎏ 늘어난 상태로 소집됐다. 훈련이 부족한 탓이었다. 킥거리는 짧아졌고, 2차 동작이 느려졌으며, 상대를 압도하는 파워풀한 움직임도 없어졌다. 이운재의 기량을 끌어올리기 위해 김용대, 김영광 등 백업을 적극 활용하지 못한 본프레레 감독, 소집전 이운재의 컨디션을 살펴 감독에게 보고하지 못한 국내 코치들의 잘못도 그의 부진에 한몫했다.
‘본프레레의 황태자’ 이동국도 부진하기는 마찬가지. 미드필더와 윙포워드의 유기적인 협력 플레이 부족으로 고립된 것도 부진의 한 이유. 그러나 본프레레 부임 이후 전경기에 출전하면서 부동의 주전이 되자 정신적으로 느슨해진 것 같다는 게 대표팀 내부 평가. 2002년 월드컵 엔트리에서 탈락하는 쓴맛을 본 만큼 스스로를 다그치길 바랄 뿐이다.
김동진 또한 최근 부진을 거듭하고 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과 지난해 12월 독일전에서 맹활약한 뒤 프로에서나 대표팀에서나 그의 플레이는 평균 이하.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공수를 넘나들던 옛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부동의 왼쪽 윙백’ 이영표가 오른쪽으로 이동하면서 김동진과 주전경쟁을 벌일 왼쪽 윙백이 없다는 게 아쉽다.
◇개인 플레이만 고집하는 공격수=본프레레호 스리톱 이동국, 이천수, 정경호는 이번 동아시아대회에서 개인 플레이의 극치만 보여줬다. 공을 잡고 더 좋은 위치에 있는 선수들에게 패스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무리한 드리블 돌파와 어이없는 슈팅을 남발했다. 한 프로 감독은 “반드시 자기가 골을 넣어 이기겠다는 욕심을 과도하게 부렸다”고 말했다.
물론 이들은 개인 플레이를 많이 하는 스타일, 그리고 전술훈련 부족으로 공을 받을 만한 동료가 주위에 없었다는 점도 이들이 개인 플레이를 고집한 원인 중 하나였다.
정경호는 약속된 플레이를 하기보다는 자기만의 플레이를 고집한다. 전체적인 팀 플레이가 나쁠 경우 돌연 불거진 그의 개인 플레이는 선수단 사기를 떨어뜨리게 마련이다. 이천수는 스페인리그에서 2년간 부진한 뒤 자신의 건재함을 보여주기 위해 나름대로 애를 썼다. 그러나 그의 기량은 예전만 훨씬 못했다. 정경호 이천수 모두 개인 스타일이나 사사로운 상황에 휩쓸리기보다 팀 전체를 위한 플레이를 했어야 했다.
◇컨디션이 나쁜데도 뽑아야 하나=오른쪽 윙백 박규선은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다. 24세의 나이라면 부쩍부쩍 성장해야 하는데 자신의 장점인 빠른 스피드만 고집할 뿐 발전이 없다.
동아시아대회에서 그의 플레이를 유심히 지켜본 한 프로 감독은 “박규선은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모른 채 우두커니 서 있는 경우가 많았다”면서 “상대 수비 안에 박혀 공을 잡으면 자꾸 1대 1만 고집하니 움직임이나 패스가 좋을 리 없다”고 평가했다. 박규선은 결국 사우디아라비아전(17일) 대표팀 명단에서 빠졌다.
박주영의 경우는 이번 동아시아대회 대표팀에 포함되지 말았어야 했다. 지간신경종으로 축구화도 못신는 그를 대표팀에 뽑았다는 것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 대표팀은 부상한 선수를 데려다가 치료하는 곳이 아니라 컨디션이 가장 좋은 선수가 들어와 명예를 걸고 뛰는 곳. 선발부터 문제였고 그의 일본전 출전 또한 이해할 수 없다.
본프레레 감독 등 코칭스태프, 기술위원 모두 최소한 이번 동아시아대회만은 박주영, 이운재의 무리한 선발과 예견된 부진에 대해 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감독에게 쏟아지는 불만=외국인 감독들이 한국 선수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영표가 최근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시쳇말로 시키면 시키는대로 할 정도로 말을 잘 듣기 때문이다. 지도자에게 복종하는 것은 옳고 그름을 떠나 우리 사회의 오랜 정서다.
이천수는 동아시아대회 중국전이 끝난 뒤 “사이드 MF는 내가 처음으로 맡은 포지션이라 제기량을 보여줄 수 없었다”고 불평했다. 물론 선수들이 자기 의견을 당당히 밝히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다만 한국의 정서상 선수가 공개적으로 감독에 대해 불평한다는 것은 그만큼 대표팀 내부적으로 감독이 선수들에게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임에 틀림없다.
2002년 1월 대표팀은 미국전지훈련에서 극심한 부진을 거듭했고, 당시 히딩크 감독은 여론의 강한 사퇴압력을 받았다. 그런데 그 와중에 감독을 비판하는 선수의 목소리는 전혀 없었다는 점은 곰곰이 되새겨볼 대목이다.
〈김세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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