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있는 산업사회의 경우 그 규범은 재산을 취득/유지/증가하는 것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산자이므로 이 무산자들이 재산을 늘리고 불리려는 열정을 어떻게 채워줄 수 있느냐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즉 무산자를 어떻게 스스로 유산자로 느끼게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아무리 가난한 가부장이라도 아내, 자식, 가축을 소유하였다. 출산부담은 여자가 짊어지는 반면 가장은 임신 막바지 동안 성욕을 참기만 하면 되었다. 한편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자식에 대해서 소유주 노릇을 한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악순환이었다. 남편은 아내를 착취하고 아내를 자식을 착취하고 성장한 남자들은 부친의 대열에 가담하여 다시 아내를 착취하는 것이다.
이러한 남성의 우월권은 수천년간 지속되었으나 지금은 무너지는 기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후진국에서는 여성과 아동이 여전히 착취를 당하고 있다) 그렇다면 여성과 아동이 해방된 산업국가들에서는 평균시민은 재산을 축적/유지/증가하려는 열정을 어떻게 달래는가? 그 해답은 소유욕의 대상을 확장시키는 데에 있다. 친구, 애인, 건강, 여행, 예술품, 종교, 자아에 이르기까지 현대자본주의사회는 모든 것을 소유의 대상으로 치환시켰다. 인간은 사물로 변하고 인간관계마저 소유의 대상이 되었다. 지난날 사회로부터 개인이 해방된다는 개인주의individualism는 자아소유self-ownershihp이라는 부정적 의미로 변질되었다.
특히 현대인들은 자아마저도 소유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아가 어떤 내용으로 구성되느냐 보다 우리가 우리의 자아를 소유물로 느끼고 있다. 나의 소유물이 곧 나의 신분, 나의 상징, 나의 힘이 되었다. 새로운 소유물(이를테면 집, 자동차)를 구입함으로써 나는 새로운 부분적 자아를 취득한다. 문제는 이러한 구매를 통한 자극은 금새 싫증나고 무료해지므로 끝없이 새로운 자극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나의 소유가 곧 나의 존재라면, 나의 소유를 잃을 경우 나는 어떤 존재인가?
패배하고 좌절한, 가엾은 인간에 불과하며 그릇된 생활방식의 산 증거물에 불과할 것이다. 소유하고 있는 것이란 잃을 수 있는 것이므로 나는 응당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언제이고 잃을세라 줄곧 조바심내게 된다. 입센은 <페르 귄트>에서 이런 자기 중심적인 인물을 탁월하게 그려냈다. 주인공 페르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으로 꽉 차 있는 인물이다. 극단적인 자기중심주의에 빠져 있어서 "욕망 덩어리"인 자기를 바탕으로 하여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야 그는 자기 실존의 소유적 구조로 인해서 그 자신이 결코 자기 자신이 되지 못했다는 것, 즉 알맹이 없는 양파처럼 한번도 자기 자신이었던 적이 없는 미완의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가진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위험에서 생기는 불안과 걱정은 존재적 실존양식에는 없다. 존재하는 = 나 일뿐 소유하고 있는 것 = 나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나를 앗아가거나 나의 안정과 나의 주체적 느낌을 위협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의 중심은 나 자신의 내부에 있고 존재하면서 나의 고유의 힘을 표현하는 능력은 나의 성격구조의 일부로서 나에게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