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사라져 버린 절은 지(址)를 붙였다.
감은사지라 하면 감은사라는 절터라는 말”
감은사(感恩寺)는 말 그대로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이요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하고 잊지 않기 위해 세운 절이다.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에는 감은사 건립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있다.
“신라 제31대 신문왕의 휘는 정명인데, 김씨다. 개요 원년 신사 7월 7일에 즉위하였고,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동해 바닷가에 감은사를 창건했다. 그러나 감은사는 문무왕이 왜를 진압하려고 이 절을 짓기 시작하다가 마치지 못하고 죽자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인 신문왕이 즉위하던 해 개요 3년에 마쳤다. 금당 섬돌 아래 동해(바닷가 쪽)으로 한 구멍이 뚫려 있으니, 그것은 용이 절에 들어와서 서리고 있을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왕의 유조를 받들어 뼈를 간직한 곳이므로 이름은 대왕암이라 하고 절 이름을 감은사라고 했다. 그 뒤 용이 모습을 나타낸 곳을 이견대라고 했다.”
우리가 절을 말할 때 이미 사라져 버린 절은 “아무 아무 지(址) 터지”를 붙였다. 즉 터만 남았다는 말이다.
따라서 “감은사지 3층 석탑”이라고 하면 “감은사라는 절터에 있는 3층 석탑”이라는 뜻이다. 감은사지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현재는 절이었다는 흔적만 남아있다.
각설하고 감은사를 창건한 그 이듬해 임오 5월 초하루에 해관 파진찬 박숙청이 말했다.
“동해의 작은 산이 감은사 쪽으로 떠내려와서는, 물결을 따라 오가고 있습니다.”
왕은 이상하게 여겨 일관 김춘질에게 점치게 하였다. 점을 치 일관 춘질은 다음과 같이 신문왕에게 고하였다.
“돌아가신 선왕께서 이제 바다의 용이 되시어 삼한을 눌러 지키십니다. 또 김유신 공도 본래 33천의 한 아드님인데 이제 이 땅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의 덕을 같이해 성을 지킬 보물을 내리려고 하시니, 만약 대왕께서 바다로 행차하시면 반드시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국가의 큰 보물을 얻게 될 것입니다.”
왕이 기뻐서 그 달 7일 이견대로 행차했다. 바다에 떠 있는 산을 바라보다가, 군사를 보내 살피게 했다. 바다에 떠있는 산의 형상은 마치 거북의 머리 같고 그 위에 대나무가 있는데, 낮에는 둘이 되었다가 밤에는 합해서 하나가 되었다.
군사가 돌아와 있는 그대로 신문왕에게 아뢰었는데 오앙은 신기하여 하루를 감은사에서 더 묵었다. 이튿날 오시에 대나무가 합해 하나가 되자,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고 비바람이 어둡게 몰아쳤는데 이레 동안 멈추질 않았다. 며칠이 경과하자 바람이 자고 물결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신문왕이 배를 타고 산에 들어가자 용이 검은 옥띠를 가지고 와서 바쳤다. 왕이 용을 맞이하면서 물었다.
“이 산과 대나무가 때로는 갈라졌다가 때로는 합해지니, 무슨 까닭이오?”
용이 왕에게 말하였다.
“굳이 비유하자면,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대나무는 합한 뒤에야 소리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어진 개왕께서 이 소리를 가지고 천하를 다스리게 되실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가져다 피리를 만들어 불어보십시오. 천하가 화평해질 것입니다. 이제 대왕의 아버님께서 바다의 큰 용이 되셨으며, 김유신 공이 다시 천신이 되었습니다. 이 두 성인이 마음을 합하여 값으로 따질 수 없는 큰 보물을 저로 하여금 왕께 바치게 하셨던 것입니다.”
신문왕이 기뻐하며 오색 찬란한 비단과 금과 옥으로 용에게 보답하고, 군사에게 그 대나무를 베어내게 했다.
이윽고 대나무를 베어 바다를 나오자 바다 한가운데 우뚝 선 산과 용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왕은 도성으로 향하기 위해 지림사 서쪽 시냇가에 레를 맞추고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태자가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태자는 검은 옥대를 자세히 살펴보더니 신문왕에게 아뢰었다.
“이 옥띠의 여러 쪽들이 모두 진짜 용들입니다.” 그러자 왕이 물었다. “네가 어떻게 알았느냐?” 태자가 빙그레 웃으며 다시 아뢰었다. “한쪽을 따서 물에 넣어보십시오.” 왼편의 둘째 쪽을 따서 시냇물에 넣었더니, 곧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그 자리는 못이 되었는데 후일 사람들은 이 못을 용연이라고 했다.
신문왕이 도성으로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 천존고에 간직했다. 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물 때엔 비가 내리고, 장마 때에는 개었다. 바람이 그치고 물결이 잠잠해졌으므로, 이름을 만파식적(萬波息笛)이라 하고 국보로 삼았다. 효소왕 때인 천수 4년 계사에 이르러 실례랑이 살아 돌아온 이적이 있어 봉호를 내려 만만파파식적이라고 했다.
<한국무속신문>
[출처] 논단 - 감은사와 만파식적에 관한 전설|작성자 kimssyy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