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윤은 베란다 문을 활짝 열고 라이터를 치익 하고 한번에 켠 뒤,
담배에 불을 붙이며 쓰디쓴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6월의 초여름은 제법 무더웠는지라, 재윤은 시원한 반팔티에 반바지만 입은 채
주 5일제 근무의 효율성을 곱씹어보며 토요일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잡지사 김 편집장이 부탁해놓은 일거리가 내일 마감이였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어느새 다 타들어가는 담배를 툭툭 재떨이에 털어내며, 베란다 문을 닫은 뒤
재윤은 시원한 냉수를 들이키며 찌푸둥한 몸을 추스렸다. 전화가 걸려온 것도 그때였다.
스마트폰의 밝은 액정화면에 떠 있는 발신인 '김 편집장'.
칼럼니스트인 재윤에겐 여간 불편한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보나마나 월요일까지 처리해야 할 칼럼 때문에 닦달하려는 게 분명했다.
음음 하고 목을 가다듬은 뒤, 재윤은 통화 버튼을 눌러 김 편집장의 전화를 받았다.
"조 작가, 나야."
"네, 편집장님. 웬일이십니까?"
"웬일이기는. 칼럼 작업 잘되고 있나 확인차 전화했지.
이쪽 일 하다 보면 마감에 쫓겨 항상 돌다리 두드리는 게 직업병 아닌가.
그래, 글은 잘 쓰고 있고?"
"초고는 완성됐고 맞춤법 따위를 교정하고 일부분 수정하면 일요일날 이메일로 보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김 편집장의 얕은 안도의 한숨 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들려왔다.
"마감이 코앞이니 너무 여유 부리면 큰코 다칠 거야.
완성도 더 높여서 메일 때리게. 그럼 이만 끊지."
전화가 끊기자마자 재윤은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베개에 던지고는 그대로 머리를 긁적였다.
오늘만큼은 제발 쉬고 싶다고! 재윤은 차마 입 밖에 내지 못했던 외침을 마음 속에 담아둔 채,
바닥에 앉아 TV 리모컨 전원 버튼을 꾸욱 눌렀다. 스트레스와 피곤을 잊기 위한 예능 프로그램 시청.
재윤의 몇 안되는 낙이였다.
한창 TV 시청에 열중하던 재윤을 방해하는 것은 쓸데없는 보험 판매원의 초인종 소리가 아닌 알 수 없는 것이였다.
베란다 문 틈 사이로 희미하게 들려오던 소음은 재윤의 귓가를 조용히 맴돌더니,
마침내는 재윤의 TV 시청을 격렬히 방해할 정도로 커져가고 있었다.
"아, 뭐야... 씨팔."
아파트 소독 작업? 아니다. 소독 약품이나 피이이 하고 뿌리는 게 저따구로 큰 소음을 낼리는 만무.
소음의 정체를 파악하고자 했던 재윤은 베란다 밖을 내다보았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경악하고 있었다.
재윤이 살고 있는 20평짜리 임대 아파트 입구 앞에 있는 주차장은 언제나처럼 차들이 빽빽이 주차되어 있어야 했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군에서나 쓰이는 지프 트럭이 세지 않아도 족히 열 대는 넘게 주차되어 있었고
국방색 옷을 입은 채 딱딱한 표정으로 아파트 주변을 배회하는 군인들만도 수십이였다.
알 수 없는 광경에 놀란 건 재윤 뿐만이 아니였다. 윗층과 아래층 주민들, 그리고 옆집 유씨 아줌마도
베란다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 파악을 시도하고 있는 것 같았다.
꽤나 높은 계급으로 보이는 군인이 뒷짐을 지며 군인들이 적절한 위치에 배치되는 것을 차가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고
명령에 따라 배치되는 군인들은 시커먼 소총을 든 채 그대로 굳어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아파트 주변에는 노란색과 검은색이 섞인 바리케이드가 설치되어 외부의 출입을 철저히 막고 있었고
아예 외부에서는 볼 수도 없게 불투명한 텐트를 치려는 중인 것 같았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이요 이게 도대체 무슨 난리래 하며 베란다 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묻는 주민들의 아우성에도 아랑곳않고
군인들은 한바탕 일을 치를 것 같은 눈빛을 뿜어내며 별 볼일 없는 20층 임대 아파트를 포위하고 있었다.
재윤 역시 한가로운 토요일을 망치는 저들의 존재에 짜증내며, 한편으로는 이러한 상황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이때 장교로 보이는 군인이 거대한 메가폰을 통해 주민들에게 안내 방송을 시작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20층 임대 아파트를 강렬히 때리고 있었다.
"아아- 현재 시각 13시 06분 이후로 가영 아파트를 중심으로 반경 1km는 긴급한 문제로 의하여
잠정 폐쇄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또한, 이곳 가영 아파트 입구와 출구를 비롯한 모든 문을 봉쇄하니
주민 여러분은 그 어떠한 돌발행동도 삼가하여 집 밖 출입을 자제하길 바랍니다!"
장교의 안내 방송이 끝나자마자 주민들은 더 큰 아우성을 내기 시작했다.
아니 이게 뭔 지랄이래 하며 소리치는 유씨 아줌마부터, 3층 사는 골초 아저씨는 씨부럴 놈들 하며 욕지거리를 날리고 있었다.
장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안내 방송을 마저 이어갔다. 그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였다.
"가영 아파트에 알 수 없는 화학 무기가 살포됐고, 방역 요원들이 도착할 때까지
감염의 우려가 있으므로 절대 집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요! 이 시간 이후로, 봉쇄된 아파트 밖을
허가 없이 탈출하시는 민간인은 생물학적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살포할 수 있음을 알려 드립니다!"
장교의 무시무시한 안내 방송을 끝으로, 주민들 사이에서는 음산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평화로운 일상에 닥친 갑작스러운 상황은 그들을 혼란스럽게 하기에 충분했다.
화학 무기 살포.
그 누가 1시까지 늦잠을 자고 일어나다가 이런 봉변을 맞을 수 있겠는가. 재윤의 처지가 딱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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