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style="margin:0px 0px 6px;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color:#1d2129;font-size:14px;line-height:19.32px;">내게는 ‘아빠’라는 단어가 없다. ‘아빠’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있었던 시기에 내게는 ‘아빠’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아버지를 가까이서 뵐 수 있었던 시기는, 더는 내가 ‘아빠’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을 만큼 성장한 이후였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곧 긴급조치 위반으로 다시 투옥되셨고, 1974년 12월, 내가 고등학생 나이가 되었던 때가 되어서야 아버지께서는 내 곁에 계실 수 있으셨다. 하지만 그것도 불과 팔 개월뿐, 아버지께서는 결국 내 곁을 떠나버리시고 말았다. 그로 인해 내게는 ‘아빠’라는 단어가 없을뿐더러, ‘아버지’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었던 시기도 극히 제한적이었다. 어려서는, 물론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왜? 내 아버지께서는 다른 아버지들처럼 자식 곁에 계시지 않는가?” 하는 불평 아닌 불평을 했었다.</p> <p style="margin:6px 0px 0px;display:inline;font-family:helvetica, arial, sans-serif;color:#1d2129;font-size:14px;line-height:19.32px;">지난 20대 국회의원 선거기간 동안 나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재외국민 선거법 위반이라는 족쇄가 채워졌고 그로 인해 여권을 빼앗겼다. 또한 검찰에 고발도 당했고, 소환장을 받았으며 체포영장이 곧 발부될 것이라는 소리가 들린다. 그 결과 미국을 떠날 수 없는 영어(囹圄) 아닌 영어의 몸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야 조금, 아주 조금 내 곁에 계시지 않았던 아니 막내아들 곁에 계실 수 없었던 아버지의 심정을 느낄 수 있게 되는 듯하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으셨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으셨던 아버지의 심정을 말이다.<br>이제 곧, 41년 전 아버지께서 박정희 정권에게 살해당하신 날이 돌아온다. 아버님 묘소를 찾아 뵐 수 있는, 갈 수 있고 볼 수 있는 세상이 반드시 오리라 믿는다.</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