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월급을 받았습니다.
시급 5600원. 편의점에서 야간 타임으로 일하고 있는 평범한 알바생 입니다.
다시 한번.
어제 월급을 받았습니다. 110만원. 전역한지 2개월이 좀 넘은 저에게 있어서 110만원은 참 큰돈처럼 보이지요.
한달동안 야간에 오는 취객, 진상 손님들, 쏟아져 오는 졸음과 맞서 싸워 승리한 값진 전리품 같아서 기쁩니다.
그런데, 마음 한켠으로는 참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주변 친구들 에게는 긍정적인 성격, 낙천적인 성격, 강철맨탈의 소유자, 양심에 철판을 깐 대단한 놈, 근자감이 하늘을 뚫고 올라가는 놈
등등등. 참 긍정적이란 소리를 많이 듣고 사는데,
오늘은 좀 긍정적이고 싶지가 않네요.
모든 군인들은 병장 즈음이 되면 전역 후의 인생을 계획 합니다.
사실 계획이라는 거창한 말로 포장되어 있지만, 대부분은 막연히 전역 후의 삶을 꿈꾸는 정도죠.
저도 그런 수없이 많은 병장들 중 한명 이었습니다.
전 고등학교를 자퇴한 자퇴생 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 초. 내 꿈과 맞지 않는 학교에서 내 적성과 맞지 않는 공부를 하고. 그런 삶이 너무나 무의미한것 같아 자퇴한..
어찌 보면 흔한 케이스죠.
때문인지, 군대에 있으면서도 대학 생각이 막연 했습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공부를 못했던것도 아니고, 내가 공부를 좀 하면 인서울 정도는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근거 없는 자신감.
전역을 하면 바로 다음달에 학원을 등록 해야지.. 이번 년도 수능을 대비하기에는 너무나도 늦었으니,
이번년도는 좀 쉬엄 쉬엄 굳었던 뇌도 풀어주고, 내년부터는 재수종합 학원에 다니면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의 그 치열한 삶을 살아봐야겠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전역을 했습니다. 정말 날아갈듯이 기뻤죠.
마치 온 세상이 나를 축복 해주는듯한 그 느낌.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태어나 군대를 다녀온 분들이라면,
이런 제 기분 이해 하실거라 생각 합니다.
이 기세를 그대로 타고 올라가,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나와서 좋은 기업에 취직해
부모님 호강 시켜 드려야지..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희 집이 빈말로도 잘사는 집은 아닙니다.
어린 시절, 집에 보일러를 땔 석유가 떨어져서 형과 함께 집에서 가장 두꺼운, 어머니가 혼수로 장만해 온 색동 솜이불 속에 머리까지 쏙 집어넣고
이불 밖으로 느껴지는 한기, 그리고 이불 속에서 아련하게 느껴오는 온기 속에 잠든 기억.
가스가 떨어져 부탄가스로 버텼던 기억. 집에 밥솥이 없어 압력밥솥으로 취사를 하고, 식은 밥을 가족이 저녁으로 함께 먹었던 기억.
새해로 넘어가는 시간. TV에서 재야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던 거실.
택시일을 하시느라 새해를 택시 안에서 지내고 있을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아빠! 방금 TV에서 재야의 종 쳤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며 새해 인사를 전했던 기억.
남들처럼 비싼 국내산 삼겹살은 못 사먹어도, 3근에 만원 하던 덴마크산 수입 냉동 삼겹살을 사온 아버지와
식탁에 둘러 앉아 맛있게 구워 먹었던 기억.
그조차 없으면 한근에 천원 하는 돼지 껍데기를 두근이나 사들고 와 양배추와 고추장을 양념으로 버무려 맛있게 먹었던 기억.
돼지 껍데기나 한우 꽃등심이나 똑같은 고기니까.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던 그 순간들.
넉넉치 않은 집안 사정으로 인한 작고, 소소한 기억들.
그 많은 순간들이 아직도 제 기억속에 그리도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래도, 전 제 인생이 불행하다고 느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고 자부할 수 있었습니다.
나를 너무나도 사랑 해주시는 부모님.
비록 가진건 없어도, 그 가진것 안에서라면 무엇이라도 해주시려고 노력하시는 부모님.
돈을 버는 재주는 없으셨지만, 그 누구보다도 아둥 바둥 열심히 살아오신 부모님.
비록 돈이 없어 불편하다는 생각은 많이 해봤지만, 누구보다도 행복한 가정에서 살아 왔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전역하고 나니 지금의 제 상황은. 저희 집의 상황은 너무나 암울하기만 합니다.
이제 몇년 있으면 60줄을 바라보는 부모님. 항상 내 앞에서 든든하게 방패막이가 되어 주셨던 부모님의 그 모습이,
지금은 너무나 초라하게만 느껴져서 가슴이 아픕니다.
노량진에 있는 단과 학원을 등록 해야겠으니 학원비를 달라고 청한 제게, 월급이 들어오면 준다는 말을 하신 부모님.
원래 제가 어렸을 때부터 한달 벌어 한달 먹고 사는 집이라 집에 여윳돗이 없는건 당연한 일이겠지.. 라는 생각.
너무나도 당연한 광경이라 월급날을 기다렸습니다.
월말. 부모님의 월급이 들어오는 주간에도, 부모님은 제게 학원비를 주지 못하셨습니다.
부모님이 학원비를 주지 못하면 어떠랴! 내가 알바해서 벌면 되지.
원래 자퇴한 그 해부터 바로 알바를 시작해온터라, 너무나도 당연하게 알바를 구해 일을 시작했습니다.
'와.. 기본시급 많이 올랐네.. 내가 알바 처음 했을때는 4110원 이었는데..'
라는 일말의 감탄사와 함께, 월급이 나오면 어떻게 사용할지의 계획도 작성 했습니다.
뭐 백원 단위까지 새새하진 않았지만요.
하루 9시간을 일한다고 가정할 시, 내게 들어오는 월급은 약 110 정도.
그곳에서 내 용돈 20만원을 빼고, 학원비 30만원을 빼고, 내년 재수종합반 학원비를 대비하기 위해 40만원 저축 하고,
나머지 20만원은 부모님 생활비에 보태 드려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매일 저녁 11까지 출근해서 아침 8시에 퇴근하는 생활.
어떤때는 부모님이 자주 야근을 하시는 터라 4일 동안 얼굴을 못본적도 있었습니다.
물론 18살 때부터 알바를 해온 저에게는 흔한 광경이긴 했습니다.
그리고, 알바를 시작하고 한달 사이.
제 월급 사용 계획은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 했습니다.
내가 나이가 들어 가면서 집안 사정이 더 나빠진건지.
아니면 그저 내가 어렸을 때부터 집안 사정은 나빴는데, 내가 나이가 어려 생각 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던 건지.
집안 사정이 좋지 않다는 사실이 점점 몸으로 체감되기 시작 하더군요.
아버지에게 사채 빚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에게 카드 빚이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허나, 부모님 두분 모두 일을 하고 있으시고, 잘 벌지는 않지만 굶고 살 정도로 못벌지는 않으시는 분들이라
이자도 갚고, 원금도 차곡 차곡 갚아 나가고 있었습니다.
제가 입대하기 전, 저와 형 전역하기까지 2년만 있으면 빚 다 갚을 수 있다고 말하시던 아버지.
허나, 제가 제대를 한 지금도 집안 사정은 별로 나아진게 없는 것 같습니다.
한달 일한 월급도 제대로 못 받아오시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대신해 각종 세금과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그나마 신용 사정이 좋으신 어머니가 알음 알음 신용카드를 사용하셨던 탓인지.
갑자기 글이 꼬이기 시작하네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대체 뭐가 우리집 발목을 이렇게 잡고 있는지.
왜 내가 학원비와 저축까지 포기해가면서 까지 부모님의 생활비를 충당해야 하는건지.
다만 알고 있는건, 빚이라는게 저희 부모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 것 같습니다.
3일 전, 조금 일찍 집에 들어와 오늘도 똑같이 야구 중계를 보시며,
퇴근 하시면서 사오신 소주 한병을 식탁에 올려놓고 소주 한잔을 기울이시는 아버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제 미래에 대해서. 집안 사정에 대해서. 등 등 등...
저도 이야기를 하면서, 공부는 조금 뒤로 미루고 월급 받는거 용돈 빼고 생활비에 보태겠다는 말을 드렸습니다.
저희 아버진 원래 술을 드시면 주사가 좀 있는데, 그게 좀 감정이 격해지시는 편이십니다.
뭐 때린다거나 분노를 표출 한다거나 그러는건 아닙니다.
단지 뭐랄까.... 웃고, 울고 하는 감정에 좀 후해 지신다고 하셔야 하나..
술을 드시면 잘 웃고, 자주 하시던 이야기를 또 합니다.
시골 고향 이야기, 어렸을 적 학창시절 이야기. 하고 하고 또 하시던 이야기. 10번은 더 들어서 무슨 이야기인지 다 아는 이야기.
뭐 그런 식입니다. 이야기가 많아지시고, 아~~주 가끔. 1년에 한두번 꼴로 우시고.
그날도 우시더라구요. 보통 우시면 이유가 돌아가신 할머니, 할아버지 생각.
아니면 시집 와서 고생만 시키는 어머니 생각이 주 레파토리 신데..
그날은 달랐습니다.
아버지가 우시면서 저한테 그러시더라구요.
"아빠가 많이 못해줘서 미안해."
라구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저도 가슴이 울컥 했습니다.
왜 내가 아버지한테 저런 말을 하게 만들었을까...
어떤 자식이 부모 입에서 저런 말을 나오게 만들까...
내가 진작에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을 들어갔으면 아버지가 저런 말씀 안하셨을까..
내가 자퇴 안했으면 아버지가 저런 말씀 안하셨을까..
인터넷에 보면 20대 초반부터 사업 성공해서 억대를 넘게 버는 성공한 청춘들도 많던데,
내가 돈을 많이 벌었으면 아버지가 저런 말씀 안하셨을까...
제가 어떻게 저희 아버지더러 돈을 많이 못벌어오고, 나 공부도 못시켜주고, 나 용돈도 많이 못주는 못난 아버지라고.
어떻게 제가 감히 저희 아버지를 욕하겠습니까.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시고, 항상 퇴근하시면 땀에 절어서 오시는 분인데.
누구보다 나와 가족을 사랑하시고,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아오신 분인데.
내가 그걸 아는데..
하아.............
어제가 월급날이였습니다.
전역하고 두달만에. 금새 길게 자란 머리를 자르고, 어머니 좋아하시는 포도를 한상자 사고,
이제는 부모님이 내주시지 못할거라 알고 있는 핸드폰 요금을 내고,
부모님께 생활비를 드린 지금 제게 남은 돈은 10만원 가량.
9월달부터 개강하는 단과 학원을 알아볼 예정이였는데, 지금은 잠시 미뤄둬야 할 것 같네요.
머리를 깎고, 포도를 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길가에 있는 가판에서 로또를 샀습니다.
뭐, 당첨 안되는거 뻔히 알고 있지만, 그래도 당첨만 된다면 지금 상황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
고생하시는 부모님 일 그만 하시고, 어머니 평생 소원이신 비행기 좀 태워 드릴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오늘은 금요일 이네요.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 쉬고, 또 일요일 저녁부터 저는 일하러 나갑니다.
오늘만 우울하고, 내일부터는 또 열심히 살겠습니다.
암울하지만, 우울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아둥바둥 거리면서 살다 보면,
언젠가 우리 부모님 호강 시켜 드리는 날이 오겠지요.
그리고, 내가 어렸을 적에는 그랬었는데.. 그땐 참 힘들었는데..
하며 오늘을 추억하는 날이 오겠지요.
그렇게 믿습니다. 그렇게 믿고 살아야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