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120752§ion=sc2 동경 유학생이 중심이 된 ‘2·8 독립선언서’는 ‘3·1 독립선언서’보다 훨씬 강경하게 일제의 침략을 고발하고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투쟁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따라서 2·8 독립선언은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인 3·1 독립선언을 이끌어낸 위대한 실천이며 민족 자주의 초석인 것이다.
1910년 조선은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한일강제병합’을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이로부터 9년 뒤 도쿄에 유학하고 있던 조선청년들은 조국의 아픔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1919년 1월 ‘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를 중심으로 동경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열었다.
그리고 2월8일 선언서와 청원서를 각국 대사관, 공사관과 일본정부, 일본국회 등에 발송한 다음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대회를 열어 독립선언식을 거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을 일본 경찰이 얌전히 봐줄 상황이 아니었다.
유학생들의 행동을 두고 일본경찰은 “내란음모죄”를 씌울 참이었는데 후세 변호사는 “유학생들이 자국의 독립을 위해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게 무슨 내란음모죄냐?”라고 반박하는 변론을 맡아 중죄를 면했다는 이야기는 뜻밖에 한국인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다.
그가 조선유학생의 무료변론을 맡아 주지 않았다면 당시 검거되었던 조선 유학생들의 운명은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120752§ion=sc2 2.8 독립선언문 원문 및 전문
http://blog.daum.net/bonanza123/55 2.8독립 선언문과 3.1독립선언문의 차이점
일본 동경유학생들이 1919년 2월 8일 조선청년독립단의 명의로 발표한 독립선언서. 서두에서 한국은 4,300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진 자주독립국임을 강조하여, 한민족의 독립근거와 그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일제침략과 국권찬탈을 사기와 폭력에 의한 수치스러운 역사였다고 전제하고, 왜 한민족이 그 동안 수 십 만 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여야 했는가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또 일제의 통치정책을 한민족의 모든 자유를 짓밟고 민족차별과 생존권 박탈을 자행한 고대적 노예정책이었다고 비난하고, 자유를 위한 조선민족의 투쟁은 앞으로 끊임없이 계속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끝으로 한민족의 독립운동으로 건립될 국가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신국가임을 명시하고 세계평화와 인류문화의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 약속하고 있다. 말미에는 결의문 4개항이 제시되어 있는데, ①한일병합조약의 폐기와 조선의 독립을 선언하고 ②민족대회의 소집을 요구하며, ③만국평화회의에 민족대표를 파견할 것이며 ④이 목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영원한 혈전을 벌일 것을 선언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3·1독립선언서>와 다른 점이다.
http://blog.daum.net/bonanza123/55 ----------------------------------------------------------------------------------------------------
작년이 90주년이었죠.
갑작스레 생각이나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