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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에 일본도 자국이 남은 버마에 연행됐던 정송명(鄭松明,1924년생)씨
조선인 여성 400명 중 절반이 싱가포르에서 하선하고 나머지는 랑군으로 갔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한달이나 걸려 타이까지 걸어왔습니다.위안부 45명과 남성 15명의 조선인이 2척의 배를 타고 귀국했습니다.
너무 피로해 더이상 상대 못하겠다고 하자 마에다 중위가 일본도를 뽑아 내리쳤습니다.
심한 상처인데도 약 한번 발라주지 않아 2년간이나 상처가 아물지 않았습니다....
유선옥씨(1923년 함경북도 경흥 출생)
배에는 배꼽 위쪽에서 아래쪽까지 크고 오래된 상처가 있었다.군의관이 자궁째 태아를 들어낸 수술의 흔적이다.
기장밥을 끼니로 할 정도의 빈농이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미야모토가 공장 일자리 이야기를 해주었고,그는 따라나섰다. 다른 여성 2명과 함께 끌려간 곳은 중국 동북지방의 목단강.따라온 걸 후회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다케코라는 이름이 붙여진 그는 처음에 하루 5∼6명 정도,많을 때는 15명의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 기절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면 다시 군인들이 덮쳐왔다.
불행히도 임신하게 되자 낙태 겸 재임신 방지를 위해 태아가 있는 자궁을 들어냈다.....
<반항하면 죽여버립니다. 미쓰코라고 불리던 소녀는 목을 쳐 죽였습니다.
여기에 있었던 15명 정도의 여성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5∼6명 정도...
조국이 해방된 뒤에도 거지 같은 유랑생활을 하다가 1948년 10월에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1981년에 사망한 남편에게도 제 체험을 끝까지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몸서리치는 증오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한 일본에 대해 복수하는 일에만 골몰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때의 군인을 찾아낸다면 찔러죽이고 싶어요......>
기사에 사진들 있는데 도저히 못 올리겠어요........
출처 | http://www.amn.kr/sub_read.html?uid=228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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