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너는 지금 온 집안을 헤쳐놓은 짐 더미 사이를 비집고
배를 깔고 누워 이른바 식빵을 굽고 있다.
혼자 커서 아직도 네 식빵굽기는 무언가 어설프고
늘 한쪽 앞발이 툭 튀어나와 있어서 귀엽기도 하고 또 웃프기도 하고 그렇다.
나는 사실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무서워하고 되려 피했었다는 표현이 옳지.
어릴적, 집 뒷 마당에 잠시 살다간
아주 작디 작은 새끼 세 마리가 내 인생 고양이의 다였다.
그 이후 십수년간 아파트에 산다는 이유로
기관지가 나쁘다는 이유로
부모님이 허락하지 않았던 고양이라는 존재가 결국 어렴풋 그만큼 더 멀어진게 아닐까 한다.
나조차도 가늠할 수 없었던 우울의 무게가
나를 덮치려 들던 때,
지치고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가 만난 사람이, 아주 가볍게 한마디 했다. 고양이 한 마리 길러볼래요?
몇날 몇일...네가 네 어미의 배 안에 있던 몇 개월여간 고민 참 많이 했다.
비가 오던 날이었다. 너가 태어난 지 한달하고 고작 일주일 남짓. 약속했던 기간보다 앞서 눈치로 채근하던 사람으로부터 받은 너는 작은 내 손에도 못 미치는 너무 작은 밤송이였다.
그들은 이내, 몇 번을 물어도 되려 거절하던 사례랄까, 기대하던 분양비가 아니라며 잠시 억지를 부렸다.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은 채, 비오는 날, 가방 안에서 울던 너의 울음이 아직도 나는 사무치곤 한다.
아직도 가끔, 그 길을 운전하다 멍해지곤 한다. 그러다 생각한다. 네게 맛난 간식을 줘야 하는데. 늦으면 또 얼마나 잔소리를 할까. 먼 발소리를 듣고 차가운 현관 앞을 서성이진 않을까. 아직도 옆구리에 파묻혀 쭙쭙이를 하는 네가 얼마나 심심할까. 손바닥만하던 때엔, 퇴근 후 돌아오기 전까지 하루종일 굶은 채로 구석에 숨어있다가 내가 불러야 뛰쳐나오던 너인데,
그래. 내가 살아야지.
너가 깨물면 아프다. 너가 울면 아프다.
그리고 나는 네가 아프면 더 아플 것 같다.
생각해보면 내가 너로 인해 살 수 있는 것 같다.
나는 내가 널 키운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샌가
네가 날 살게하고 있다.
잘자 나의 고양이.
내일은 더 잘 할게.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