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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차단 상태
    버럭오바마님의
    개인페이지입니다
    가입 : 08-08-21
    방문 : 191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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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원차단해제
    게시물ID : panic_6572
    작성자 : 버럭오바마
    추천 : 12
    조회수 : 3083
    IP : 211.52.***.236
    댓글 : 3개
    등록시간 : 2010/08/03 10:26:50
    http://todayhumor.com/?panic_6572 모바일
    [펌][존나김][매우 오래됨][그래도조낸재밌음] 흉가이야기...
    2003년즈음해서 웃대에서 읽은 글이구요. 
    그때 봤을 때도 펌이었고 원작자도 모르던 상태였습니다.
    공포 소설을 좋아해서 많이 찾아보지만 이 글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정도로 재밌었습니다.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리겠지만 시간날때 한번 읽어보세요.
    강추합니다.

    -본문-



    1. 불길한 취재(1)

    승용차는 어느덧 비포장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서울을 출발한지 정확히 
    5시간이 지난 후였다. 덜컹거리며 차의 요동이 심해지자 옆좌석에서 자고 
    있던 김한수 기자가 피곤해 보이는 얼굴로 부시시 눈을 뜨곤 주위를 두리
    번 거리며 입을 열었다. 

    "야, 무슨 길이 이렇게 험하냐?"

    "포장이 안되서 그래요. 눈 좀 더 붙이지 그래요? 이런 길로 앞으로 한시
    간은 더 들어가야 할 것 같은데...."

    카메라맨 이창수가 연신 멋대로 돌아가는 핸들을 움켜 잡으며 소리쳤다. 
    그러나 김기자는 그의 말대로 또다시 눈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잠든 동안 내내 께름칙한 악몽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QBS 방송국의 뉴스 보도국 취재기자와 카메라맨이었다. 보도국이
    란 곳은 원래 사람 잡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김기자가 이번주 내내 취한 
    수면의 양은 모두 합해야 10시간도 체 되지 않았다. 

    그것도 대부분은 지금처럼 차안에서 새우잠을 잔 것이었다. 이젠 5년된 
    그의 엑셀 승용차가 그의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면도도 차에서 하고 옷도 
    차에서 갈아 입는다. 

    그는 보도국에서도 악명 높기로 소문난 사회부 기자였다. 온갖 지저분한 
    쓰레기와 잡동사니들을 죄다 끌어다 놓은 곳이 사회부란 곳이었다. 그곳
    에서 버티려면 같이 쓰레기가 되고 잡동사니가 되어야만 했다.

    "젠장, 길 한번 더럽게 험하네"

    눈을 잔뜩 찌푸린 이창수의 말대로 길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몸의 균형조
    차 잡기 어려울만큼 점점 더 험하게 좁아지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 이런 험한 곳까지 들어와 세명씩이나 사람을 죽였
    는지.... 아참 김기자님, 뒤에 카메라 괜찮은지 좀 봐주세요. 또 저번처럼 
    I.C라도 나갔다간 저, 아주 돌아버립니다"

    "걱정하지마. 내가 아주 단단히 고정시켰으니까!"

    "어차피 오늘 마감뉴스에도 내보내긴 어려울 것 같은데 아예 새벽에 출발
    할걸 그랬나 봐요. 그랬으면 한 세시간이면 왔을텐데"

    "괜히 새벽에 있는대로 밟아 달리다 황천길 가면 박기자가 우리 취재하러 
    오는 수가 있어. 차라리 조금 여유있게 오는게 낫지"

    그들이 목촌리라는 낡은 이정표와 함께 약간의 공터가 있는 막다른 길에 
    도달한 시간은 오후 5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이정표의 화살표가 가리키는 
    곳에는 한사람이 겨우 지나갈만한 작은 오솔길이 숲속으로 이어지고 있었
    다. 

    "이건 완전히 오지중에 오지구만!"

    카메라를 챙기며 이창수가 투덜거렸다. 그의 그런 불평과는 대조적으로 
    하루해를 마감하는 붉은 노을은 늦가을의 단풍을 더욱 붉게 물들이고 있
    어 숲은 더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눈부신듯 김기자가 노을을 바라보며 중
    얼거렸다.

    "올해는 이렇게 단풍구경 한번 하는 거지 뭐!"

    "됐습니다. 조금 있으면 끔찍한 시체들을 카메라로 찍어야 할 판인데...."

    오솔길로 접어둔 후 20여분 지나자 숲은 어느새 칠흙같은 어둠으로 변해 
    있었다. 앞장 선 김기자의 조그만 렌턴 불빛이 그들의 앞길을 불안하게 
    비추어 주고 있었고 늦가을의 쌀쌀한 날씨임에도 이미 두사람의 등줄기엔 
    송글송글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하고 있었다.

    "길이 여기 밖에 없나? 이런 산길은 혼자 다니려면 제법 겁나겠는데요? 
    으시시한게 어디서 귀신이라도 나올 것 같은게.... 이 안쪽에도 사람이 산
    대요?"

    "사건 현장에서 한 1킬로 떨어진 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하더라구. 그
    래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냐, 이쪽 강원도 오지엔 이보다 더한 산속에
    도 사는 사람들이 있다구. 대부분 약초 같은 것 케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
    람들이지"

    "김기자님, 천천히 좀 가요. 빈몸이라고 그렇게 빨리 가면 어떡합니까?"

    이창수는 내심 겁이 나는지 김기자의 뒤에 바싹 붙어 따라오고 있었다. 
    겁이 나긴 김기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연상시키며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이름모를 짐승의 
    울음소리와 한치 앞을 보기 어려운 칠흙같은 어둠. 그리고 무엇보다 등산
    객 세명을 잔인하게 살해했다는 그 살인마가 바로 이 숲 어디엔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저절로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어둠을 헤치며 한 40여분을 부지런히 걸어가자 그들의 앞
    에 꽤 넓직한 개울이 하나 나타났다. 그리고 그 개울위에는 낡은 목조다
    리 하나가 위태롭게 놓여 있었고 그 너머 멀리서 마을 인가의 불빛이 가
    늘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둘은 불빛에 겨우 한숨을 내쉬며 삐걱거리는 목조 다리를 건너 서둘러 길
    을 재촉했다.두사람이 현장에 도착하자 그곳엔 의외로 한 10여가구는 됨
    직한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마을은 쥐죽은듯 고요했으며 더우기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마
    을과 현장 사이에는 조그만 고개가 하나 가로막혀 있었고 고개를 넘어서
    자 서너명의 경찰들과 너댓명의 주민들이 현장을 둘러서 있는 모습이 시
    야에 들어왔다.

    "거 사람들 보이니까 엄청 반갑네"

    이창수가 다소 힘이 나는지 너스레를 떨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두사람
    이 주민들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서자 사건 현장이 나타났다. 

    그리고 제일 먼저 그들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믐달을 뒤로 하고 유령처럼 
    버티고 선 음침한 기와집이었다. 그 기와집을 보는 순간 김한수 기자는 
    알 수 없는 공포감을 느꼈다. 

    사람이 살지 않은지 무척 오래된 듯 방문은 하나같이 부서졌고 찢어진 한
    지가 볼상사납게 이리저리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기와
    집 앞마당 무수히 자란 잡초위에 세구의 시체가 가마니로 덮힌채 나란히 
    누워 있었다. 

    김기자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그때 그들의 앞을 가로막으며 한 
    여자가 나타났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QBS 뉴스 보도국의 김한수기잡니다. 사건 취재차 지금 막 서울에서 내
    려왔습니다. 여기 책임자가 어느 분이신지?"

    "제가 책임잡니다. 이번 사건때문에 횡성군에서 파견나온 윤형삽니다"

    그녀의 말에 김기자가 다소 놀랍다는 표정으로 찬찬히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다시 반문해 왔다.

    "왜요? 뭐가 잘못 됐나요?"

    "아... 아닙니다. 시체가 오늘 아침에 발견 되었다구요?"

    김기자가 시신들을 내려다 보며 말했다. 

    "아참, 얘기하는 동안 저희 카메라맨이 취재를 좀 해도 되겠습니까?"

    "예, 그러시죠. 대신 시신 촬영은 안됩니다"

    "가마니에 덮힌채로는 괜찮겠죠?"

    윤형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기자가 이창수에게 소리쳤다.

    "주변 스케치 좀 하고 특히 저 앞에 낡은 기와집 좀 잘 잡아. 시신은 있
    는 그대로 슬쩍 ?뎠어 주고...."

    취재팀 때문인지 주민들이 다소 술렁 거렸지만 이내 잠잠 해졌다. 곧 그
    들은 이창수가 하는 일을 호기심 어린 눈길로 지켜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막연한 공포심이 서려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하긴 그럴만도 했다. 자신들의 집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사람이 
    셋 씩이나 죽었으니.


    1. 불길한 취재(2)

    "신원은 확인 됐나요?"

    "예. 한 사람은 K일보 신문 기자이고 나머지 둘은 모 잡지사 기자들이었
    습니다. 자세한 인적사항은 따로 적어 드리죠"

    "신문 기자와 잡지사 기자요?"

    "취재를 하러 왔다가 변을 당한 것 같은데 무엇을 취재하러 왔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가 없습니다" 

    "피해자들의 사인은 뭡니까? 살해된 것이라고 들었는데 확실한가요?"

    "아직 뭐라고 확실히 단정할 수 없습니다. 부검해 보기 전에는"

    "대충이라도 짐작가는게 있을 것 아닙니까?"

    "글세요"

    "혹시 목격자가 있습니까?"

    "현재로선 없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살해된 것인가요?"

    "아직 살해된 것인지 단정할 수 없다고 아까 말씀 드렸을텐데요?"

    "아, 그래요. 그럼 여기 이곳에서 사망한 건가요?"

    "그것도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쌀살하게 대답하는 윤형사의 표정에서 김기자는 그녀에게 특기할만한 정
    보를 얻기는 어려우리라는 판단을 했다. 

    앞뒤가 뻔한 얘기라해도 촌구석에 말단 형사가, 그것도 임시로 파견 나왔
    을 여형사가 공식화되지 않은 자신의 사견을 함부로 얘기할 리가 없을 것
    이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묻는 것보단 자신이 직접 시신을 보는 편이 빠를 듯 했다. 이젠 
    자신도 웬만한 베테랑 형사 뺨칠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였다.

    "시신을 좀 봐도 될까요?"

    "보시지 않는게 좋을 겁니다"

    그녀의 말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여자에게 그런 말을 들으
    니 적잖이 자존심이 상한 것도 사실이었다. 반발심이었는지 그는 일부러 
    힘주어 말했다.

    "사회부 기자가 어떤 직업인지 잘 모르시나본데 우리도 웬만한 형사들보
    단 험한 꼴 더 많이 보고 다니니까 걱정 말아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언젠가 그는 한꺼번에 30구의 시체를 본 적도 있었
    다. 시외버스가 50미터 절벽 아래로 구른 교통사고였다. 팔이 잘리고 얼굴
    이 뭉개진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운 끔찍한 경험이었다. 

    이제 그에게 시체 따위를 보는 일은 백화점에 진열된 마네킹을 보는 것 
    만큼이나 일상적인 일이었다. 김기자가 렌턴을 아래로 비추며 구둣발로 
    가마니를 슬쩍 걷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끙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발작적으로 두어걸음 뒤
    로 물러났다. 그녀의 말대로 지금까지 많은 시신을 봐 왔지만 지금처럼 
    끔찍한 것은 처음이었다. 

    시신의 이곳 저곳에는 마치 홈이 파인 흉기 같은 것으로 찌른 것처럼 굵
    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구멍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섬뜩하게 만든 것은 시신의 부릅 뜬 눈동자에 아직
    도 남아있는 형언키 어려운 공포의 잔재였다. 그의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자신을 향해 살려달라며 달려들 것 같았다.

    "도..... 도대체 뭘로 죽였길래?"

    "그러게 부검을 해 봐야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머지 둘도 마찬가진가요?"

    김기자가 두려운 눈으로 윤형사를 돌아 보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차가운 
    눈으로 시선을 돌릴 뿐이었다. 사실 나머니 두구의 시신은 보고 싶은 마
    음이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야만 했다. 추정 기사라도 
    쓰기 위해선. 

    그는 이번엔 먼저보다 훨씬 신중하고 조심스런 동작으로 다시 두번째 가
    마니를 들추었다. 그러나 그는 아예 '욱'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틀어 막으
    며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말았다. 

    심한 구토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으며 머리끝이 쭈삣하는 전율이 온 
    몸을 휘감아 왔다. 두번째 시신은 거의 사람이라고 하기에도 어려울만큼 
    심하게 손상되어 있었다. 

    마치 짐승에게 뜯어 먹힌 것처럼 얼굴 한쪽이 거의 없어져 버렸고 오른쪽 
    팔꿈치 아랫 부분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질 않았다. 특히 가슴부분의 
    손상은 차마 말로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것은 마치 초원의 맹수에게 뜯어 먹히다 만 사슴의 내장을 연상케 했
    다. 몇번의 구토와 함께 김기자는 세번째 시신은 볼 엄두도 내질 못했다.

    * * *

    교양 제작국의 정해일PD가 보도국 김한수 기자의 다급한 전화를 받은 것
    은 새벽 3시경이었다. 그들은 대학동창이자 QBS의 입사동기 였다. 

    그는 아직도 잠이 덜 깬 눈으로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아 안간힘을 쓰며 
    밀려오는 졸음을 쫓고 있었다. 방금전 김기자와의 전화 통화 내용이 꿈속
    처럼 어렴풋이 떠올랐다. 

    오늘 살인사건 취재 때문에 강원도 횡성 쪽을 다녀왔는데 그 테잎을 편집
    하면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는 내용이었다. 

    평소의 차분한 성격과는 달리 그의 목소리는 몹시 흥분되어 있었으며 약
    간의 두려움까지 섞인 듯 했다. 그는 한없이 가라앉는 무거운 몸을 가까
    스로 추스리며 방에 불을 밝혔다. 

    방 한쪽 구석에는 멋대로 벗어 제낀 옷가지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시
    계는 언제 밧데리가 떨어졌는지 잠자기 전부터 줄곧 8시 50분만 가리키고 
    있었다. 

    서른 여섯의 나이에도 그가 아직 독신인 이유는 전적으로 그 망할놈의 
    PD라는 직업때문이었다. 청바지위에 셔츠 한장과 가죽잠바를 대충 걸치
    고 현관을 나서려다 그는 뭔가 잊은듯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쇼파 위에 검은 캡모자를 집어 눈썹까지 푹 눌러쓰곤 비로소 아파
    트 현관을 나섰다. 싸늘한 새벽 공기가 겨울처럼 매서웠다. 그는 달리듯 
    자신의 엘란트라 승용차까지 가서 안으로 뛰어 들었다. 

    그리곤 서둘러 시동을 걸고 히터를 틀었다. 추위로 이빨이 아래위로 부딪
    혀 왔지만 다시 올라가 옷을 더 껴입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엔진이 체 
    달기도 전에 그는 깊숙히 악셀을 밟았다. 

    그의 집은 잠실이었다. 올림픽대로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승용차의 속도계
    는 160을 가리켰다. 잠실에서 여의도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4분이었다. 


    1. 불길한 취재(3)

    그가 보도국 편집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때 김한수는 자리에 없었다. 그리
    고 편집실 모니터에는 어느 공포영화에서나 나옴직한 음침한 기와집 한채
    가 을씨년스럽게 버티고 서 있었다. 그가 막 조그셔틀을 만지려는 순간 
    김한수가 커피 한잔을 들고 들어섰다.

    "어? 벌써 왔어? 또 있는대로 밟았구만?"

    "야, 잔말말고 그 손에 들린 커피나 빨랑 주라, 오는데 얼어 죽는줄 알았
    다. 이젠 완전히 겨울이다, 겨울!"

    김한수에게서 건네받은 커피를 한모금 입에 넘긴 해일이 그제야 살겠다는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성질 급한건 여전하구만, 그렇게 벌벌 떨지 말고 옷이나 좀 챙겨 입고 
    나오던지"

    "새벽에 황당하게 사람 불러내 놓고 이젠 잔소리까지 늘어 놓을 려구? 남 
    걱정 하지 말고 그렇게 불 나는 일이 뭔지 어서 용건이나 말해. 나 빨리 
    들어가서 다시 자야 돼! 요즘 귀신들한테 시달려 잠도 제대로 못 잔다구"

    농담같은 그의 말 때문이었는지 김한수의 얼굴엔 금새 웃음기가 가셨다. 
    해일은 그의 진지한 표정이 웬지 마음에 걸렸다. 

    "그래, 본론부터 말할께! 너 요즘 귀신에 대한 특집 다큐 제작중이랬지?"

    "그래서?"

    "그럼, 혹시귀신을 찍거나 본 적은 있어?"

    "자식! 지금 농담하냐? 뻔히 알면서 왜 그래? 정말 귀신이 있어서 프로그
    램 만드냐, 요즘 사람들 워낙 그 쪽으로 호기심이 많으니까 부랴부랴 특
    집 편성한거지. 근데 갑자기 그 얘긴 왜 묻는거야?"

    잠시 망설이던 김한수가 이내 모니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오늘 내가 취재 가서 찍은 테잎인데....."

    "아까 들어오면서 봤어. 근데, 요즘은 보도국에서도 귀신 찾아 다니냐?"

    "그게 아니라.... 저 곳에서 오늘 세명의 등산객이 살해 당했어"

    그리곤 책상위에 종이 몇장을 집어 건네며 계속 말했다.

    "이따 읽어봐, 이건 그 사건에 대해 내가 작성한 내일 아침 뉴스 기사야!"

    "젠장 내일은 시민들이 출근길을 살인사건 뉴스로 시작 하겠구만. 근데 
    그게 어쨌다는거야?"

    "테잎을 잘 보라구"

    말을 마친 그가 테잎을 되감아선 풀레이 했다. 카메라는 폐허가 된 기와
    집의 처마에서 부터 천천히 아래로 앵글을 움직이고 있었다. 

    부서진 문짝들, 찢겨져 너풀거리는 한지, 검게 그을린듯한 처마 기둥, 그
    리고 주위론 온통 어둠뿐이었다. 뭘 보라는건지 영문을 알지 못하고 열심
    히 화면을 보던 해일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잠깐, 거기!"

    화면은 그가 소리친 바로 그 곳에서 멈추었다. 멈추어진 화면에는 카메라
    가 기와집의 창고 내지는 부엌으로 보이는 왼쪽편의 부서진 문짝을 크로
    즈업으로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부서진 문짝 틈새 어둠속에서 뭔가..... 뭔가 번쩍이는 것들이 
    있었다. 푸른 빛을 띠고 있는 그것은 반딧불 같기도 하고, 혹은..... 광채를 
    내뿜는 짐승의 눈 같기도 했다. 

    더우기 그것들은 한두개가 아니었다. 하나, 둘, 셋..... 족히 열두세개는 될 
    듯이 보였다. 정민수는 눈을 더욱 찡그리고 화면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도대체 저게 뭐야? 뭘 찍어 온 거야?"

    김한수는 대답 대신 다시 화면을 플레이 시켰다. 카메라가 이번에는 기와
    집 대신 바로 김한수 자신과 낯선 남자 한 사람을 잡고 있었다. 김한수가 
    빠르게 말했다. 

    "내 옆에 있는 남자는 현장에 있던 형사야!"

    두사람을 크로즈업으로 잡고 있던 카메라가 서서히 줌아웃 되면서 그들의 
    발 아래 가마니로 덮힌 시신들의 모습이 막 화면 안으로 들어 올 때였다.

    "잠깐, 저건 또 뭐지?"

    이번에도 화면은 그가 소리친 바로 그곳에서 정확하게 멈추었다. 김한수
    도 이미 그 곳에서 화면을 정지시키려고 준비한 것 처럼. 해일은 다시 화
    면 앞으로 얼굴을 바싹 갖다 댔다. 

    화면은 김한수와 형사라는 사내가 발 아래 가마니로 덮힌 시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들의 바로 뒤 어둠속에 무
    언가가 있다는 것이었다. 

    형체는 희미해서 뚜렷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마치 화면을 막 오버랩 시킬때와 같이 보일듯 말듯 희미한 모습으로 버티
    고 선 것은 분명한 사람의 형상이었다. 

    그리고 그 형상은 똑바로 카메라의 렌즈를 응시하고 있었다. 뚫어지게 화
    면을 바라보던 해일이 김한수를 돌아보며 말했다.

    "도대체 뭘 찍어 놓은거야? 카메라 포커스를 잘못 잡은 것 같지도 않고"

    "사실은 그게 뭔지 나도 잘 몰라. 물론 카메라맨도 전혀 모르고.... 분명히 
    현장에서 촬영할때 화인더에는 아까 보았던 그런 광채나 지금같이 저런 
    이상한 형상 같은건 전혀 없었다는 거야. 네가 보기엔 어떠냐?"

    "어떠냐니?"

    김한수의 질문에 반문하며 화면에서 눈을 떼어 그를 돌아보던 해일은 그
    제서야 그가 이런 새벽에 자신을 급히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럼..... 넌 저게 카메라에 귀신이 찍힌 것이라고 생각한다는거야?"

    "카메라에도 이상이 없고 현장에선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다면 저 이상한 
    것들을 뭘로 설명하지?"

    김한수의 표정은 그 어느 때 보다 진지해 보였다. 해일은 다시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여전히 그 이상한 형상은 똑바로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고 마침내는 해
    일 바로 자신을 노려보는 듯한 섬뜩함까지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는 몇 
    번이나 테잎을 돌려가며 두가지 이상한 형상의 수수께끼를 풀어보려고 했
    지만 무엇으로도 그것들을 설명하긴 어려웠다.

    "그리고 이건 현장에 있던 주민한테 얼핏 들은 얘긴데 말야, 그 집엔 귀
    신이 있다는 거야. 그러면서 취재한답시고 설치다 괜히 무서운 화를 당하
    지 말고 어서 돌아가라며 은근히 협박까지 하지 않겠어?"

    "그래서, 설마 그 주민의 얘기를 믿는단 얘긴 아니겠지? 사실 나두 귀신
    의 존재를 전혀 부정하는 편은 아니었는데 이번에 특집 프로 제작하면서 
    오히려 귀신이란 존재가 사람들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허무맹랑한 허상
    이란 확신이 들더란 말야! 대부분의 귀신 목격자들을 취재하러 다녀보면 
    뭔가 앞뒤가 않 맞는 구석이 반드시 한 두개씩은 나오더라구. 자신의 체
    험을 증명할만한 객관적인 증거나 일관성이 없다는 것도 공통점이구. 귀
    신이 나온다는 온갖 음침한 곳과 집들을 다 찾아 다니며 카메라로 찍어댔
    는데 귀신의 모습은 커녕 그 비슷한 것도 한번 찍힌 적이 없어. 그래서 
    나는 이번 프로그램의 결론을 아예 귀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끌
    고 가기로 했어. 사실 처음 기획부터가 좀 우스꽝스럽기도 했구"

    해일은 상당히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의 의견을 얘기했다. 그러나 김한수
    는 그의 얘기에 단 한마디 반박도 없이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평소의 그였다면 결코 그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둘은 만나기만 하면 언
    제나 열띤 논쟁을 벌이곤했으니까.

    "그래, 나 자신도 내가 지금 얼마나 황당한 얘길 하고 있는지 잘 알아. 하
    지만 사람에겐 이성적인 논리나 합리성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예감이나 
    본능같은게 있잖아. 처음 현장에서 그 기와집을 보았을때 내 기분이 어땠
    는지 알아? 그야말로 지옥문 앞에라도 와 있는 기분이더란 말야. 난 그 
    기와집을 그 곳에서 처음 본게 아니었거든. 서울서 내려오는 차안에서.... 
    잠든 동안 내내 나는 꿈속에서 그 기와집을 봤어. 뭔가에 계속해서 쫓겨
    다녔던 것 같은데 자세히 기억이 나질 않아"

    김한수는 지금도 그 당시의 기분이되살아 나는지 양 어깨를 움츠렸다. 
    몇 시간후에 보아야할 이상한 기와집을 미리 꿈속에서 보았다는 김한수의 
    말에 해일은 비로소 쉽게 무시하지 못할 무언가가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
    겠다는 막연한 예감을 가지기에 이르렀다. 그때 다시 김한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뿐이 아냐! 화면속에 그 이상한 형상이 도대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는거야. 마치 나를 잡아 먹을듯 노려보는 것 같더라구! 게다가 그 집앞 
    마당에 있던 참혹하게 살해당한 시신들. 그 시신의 눈. 대체 그들에게 무
    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눈동자에는 지금까지 한번도 상상조차 해본적이 
    없는 무서운 공포가 깃들어 있었어! 자꾸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 창
    피하게..... 하옇튼 하고 싶은 말들은 다 했어. 어차피 판단은 네가 해야 하
    니까. 아까 건네준 자료에 모든걸 자세히 적어 놨어. 집에 가서 읽어봐!"

    김한수는 거기까지 얘기하고 급히 담배를 한대 피워 물었다. 2년전부터 
    완전히 담배를 끊었던 그 였다. 오랫동안 김한수를 봐 왔지만 오늘같은 
    그의 모습을 보긴 처음이었다. 

    얼마 후 해일은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편집실을 나왔다. 그리고 집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그의 승용차 속도계는 한번도 120을 넘지 않았다.


    2. 귀신이 찍힌 테잎(1)

    한국대학 손남의박사는 정민수 PD가 가지고 온 VHS 테잎을 십여 차례
    에 걸쳐 반복해서 보는 동안 연신 몹시 흥미로운 일이라고 감탄하듯 소리
    쳤다. 

    그는 민속학, 특히 무속신앙 분야에서는 거의 국내 최고임을 자부하는 사
    람이었다. 

    이번 다큐멘터리 제작에 있어서도 그의 해박한 지식과 자문들은 해일에게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결국 그는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은 놀라운 결론을 
    내렸다.

    "단정하긴 어렵지만 내가 보기엔 귀신(鬼神) 현상이 맞는 것 같군요. 외국
    에선 몇 번 이런 테잎을 본 적이 있지만 국내에서 이런 테잎을 보기는 처
    음입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딥니까?"

    손박사의 놀랍다는 표정과 그의 말에 해일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는 
    새삼 화면을 쳐다 보았다. 여전히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는 그 미지의 형
    상. 저것이 귀신이라니. 손박사의 얘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처음 어둠속에서 푸른 광을 뿜고 있던 것은 금수(禽獸)의 귀(鬼)인 것으
    로 생각됩니다"

    "금수라면?"

    "짐승이죠. 그리고 두번째 형상은 사람의 귀인 것 같습니다. 물론 화면만 
    보고 확실하게 단정하긴 어렵지만 지금까지 제가 보아온 어떤 증거보다
    귀신현상에 가까운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금수나 벌레, 물
    고기 같은 생물도 귀신이 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경우는 죽
    으면 그 생명이 혼(魂), 귀(鬼), 백(魄) 세가지로 분열됩니다.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가고, 귀는 공중에 존재하게 됩니다. 즉 사후 
    인간은 천(天), 지(地), 인(人) 세곳에 걸쳐 존재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들 삼자중 귀와 백이 인간과 계속 접촉을 하게 되는데 보통 백은 묘속
    에서 3년간의 제사를 받고, 귀는 집안에 존재하면서 자손 4대의 제사를 
    받으면 만족하여 흩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만약 이러한 백과 귀가 정당한 
    조의를 받지 못하거나 질병, 또는 살해당하거나 모함등으로 사형을 당한 
    자등의 경우는 그 원한으로 백과 귀의 기가 응결해서 귀신이 되는 것입니
    다. 그리고 짐승과 벌레등의 생물이 귀신으로 변하는 것은 그 수령이 높
    은 경우와 사람과 접촉이 많은 것, 혹은 이것에 고통을 준 경우 등으로 
    그 정기가 응결해서 일종의 '저주'를 미치는 힘이 있는 귀신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귀신에 대한 이론은 주장하는 사람마다 여러가지로 분분하지만 
    지금 얘기한 부분들은 대체로 일치하는 사항들입니다"

    방송국으로 향하는 내내 해일은 차속에서 야릇한 흥분과 설레임으로 들떠 
    있었다. 어쩌면 의식속에서만 존재하던 귀신이라는 존재를 처음으로 온세
    상 사람들 앞에 드러낼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이 벌어졌을때 사람들이 놀라고 경악하는 모습을 상상하자 엑셀에 
    올려진 그의 발엔 더욱 힘이 들어갔다. 방송국에 도착해서 그가 제일 먼
    저 만난 사람은 이번 다큐의 책임 프로듀서인 양희열 국장이었다. 

    "프로그램을 다시 제작하고 싶다고? 그건 안돼, 3일후면 방송인데 무슨 
    소리야. 그리고 그렇게 되면 예산에서부터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생
    긴다는거 정PD도 잘 알잖아! 만족스럽진 않지만 저번에 시사했을때도 큰 
    문제는 없었는데 갑자기 왜 그래?"

    "부탁입니다, 국장님. 한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요" 

    "나참, 그래, 도대체 이유가 뭔가? 완성된 프로그램을 다시 제작하겠다는 
    이유가. 꼭 그래야만할 이유가 있다면 나도 한번 생각해 보지"

    "진짜 귀신의 존재를 화면에 담을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소 들떠 있는듯한 해일의 말을 들은 양국장의 눈이 커졌다.

    "귀신을 화면에 담을 수 있다고 했나, 방금?"

    "예, 분명히 그렇게 말씀 드렸습니다"

    "이... 이봐, 정PD! 도대체 뭘 믿고 그런 소릴 하는진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이 찍은 것이긴 하지만 이미 귀신의 모습이 담긴 테잎을 확보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그 곳에 가서 취재를 해 보고 싶습니
    다"

    "이미 테잎이 있다고?"

    양국장이 놀라운 표정으로 팔짱을 끼곤 찬찬히 해일을 바라보았다. 평소 
    성격이 좀 급하긴 하지만 결코 허튼 소릴 할 사람은 아니었다. 의자를 뒤
    로 까닥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양국장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좋아, 대신 반드시 귀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야 해. 만약 그렇게만 된
    다면 그야말로 쇼킹한 반응을 일으킬 수 있을거야. 자세한 기획서를 새로 
    올리라구. 필요한 모든 장비와 인원은 적극 지원해 줄테니까. 하지만 만약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자네나 나나 시말서 쓸 각오는 해야할거야"

    * * *

    강원도 횡성 경찰서의 윤혜경 형사가 국립 과학수사 연구소로부터 시신의 
    부검 결과를 통보 받은 것은 오후 3시경이었다. 

    예상대로 시체 두 구의 사인은 늑대과에 속하는 짐승의 습격에 의한 사망
    으로 추정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한 구의 시체 검시 보고서를 
    보면서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보고서에는 직접적인 사인으로 작용한 흉기가 죽창과 같은 긴 구멍이 난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보고서는 계속해서 시신은 모두 열 세번의 가격을 받았으며 범인은 열 세
    번의 가격이 모두 완벽하게 몸을 관통하게 할 만큼 엄청난 힘을 지닌 것
    으로 추정된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녀는 짧은 숏커트 머리를 크게 한번 흔들었다. 아무리 앞뒤를 맞춰 보
    려고 해도 미심쩍은 구석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같은 일행 세명이 한 사람은 죽창에 의해, 나머지 두 사람은 짐승의 습격
    에 의해 거의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사망했다는 것을 어떻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인가? 

    그녀는 다시 처음 시신을 발견 했을때 찍어 놓은 사진들을 들여 다 보았
    다. 짐승의 습격을 받았다는 두 구의 시체는 흉가라고 불리는 기와집의 
    뒤편 언덕에서 약 20여미터 간격으로 발견 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구의 시체는 바로 그 흉가의 앞마당에 마치 처형을 받
    은 것처럼 사지를 벌린채 놓여 있었다. 

    "이봐, 윤형사! 내가 지금 자기 생각을 한번 맞춰볼까?"

    낯선 목소리에 그녀가 고개를 들고 뒤를 돌아보았다. 목소리의 주인은 
    역시 구희열 반장이었다. 이제 막 오십대에 접어든 그는 이 곳 H군에서
    만 20년 이상 근무한 토박이였다. 

    하지만 혜경의 판단으로 그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때로는 
    무능한 부패경찰인 것 같기도 하고 또 때로는 전혀 예기치 못한 예리한 
    관찰력과 추리력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러나 혜경의 눈에 비친 대부분의 그의 모습은 전자에 가까웠다. 

    "자기 지금..... 마구 가슴이 뛰고 전에 없던 의욕이 마구 마구 샘 솟지? 
    잔인하고 끔찍한 살인범이 어디선가 당신과의 게임을 기다리며 또다른살
    인을 준비하고 있을 것 같지? 그리고 자기만이 그 살인범을 잡을 수 있는 
    영화속 주인공이라도 된 기분이고 말야. 어때 내 말이 틀렸어?"

    그는 마치 자신이 이미 그녀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 능글맞은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등뒤로 다가왔다. 그리곤 그녀의 어깨위에 한 손을 
    걸치며 말했다.

    "다 이해해! 나도 경찰 초년병 시절엔 말야. 희대의 연쇄 살인범 나타나기
    만 손 꼽아 기다렸다구. 미궁에 빠진 사건, 영원한 미스테리..... 이 얼마나 
    멋지고 스릴 넘치는 일이냔 말야. 모든 경찰들이 다 해결하지 못해도.....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하고 놓쳐버린 그 조그만 단서. 그걸 바로 나 
    만이 찾아서 그 사건을 해결할 수 있다! 어때? 내가 너무 정곡을 찔렀나?
    바뜨, 그러나! 그게 바로 모든 경찰 초년병들이 한번씩 걸리는 자아도취 
    내지는 구제불능이라는 병이라 이거야. 그러니 좋게 말할때 괜히 엉뚱한
    데 신경쓰지 말고 자기 본연의 임무나 열심히 하란 말야"

    "반장님! 이건 우리 관내에서 발생한 사건이예요"

    "알아, 알아! 하지만 어제 서울에서 내놓라 하는 형사분들이 이미 조사해 
    갔잖아. 그런 골치 아픈 강력 사건은 서울에 잘난 분들한테 맡겨두고 우
    린 그저 곁에서 협조나 잘 해주면 되는거야, 알겠어? 막말로 우리가 충분
    한 예산이 있어, 인원이 있어? 그저 대충 수사하는 시늉만 보여주면 그만
    이라구, 알겠어? 그리고 꿈자리 사납게 그런 사진은 뭐하러 자꾸 들여 다 
    봐, 젊은 처녀가? 어서 치워!"

    "반장님!"

    "그래, 알았어. 또 처녀라는 소리 했다고 기분 상한다 이거지? 그래 미안
    해, 미안! 그리고 나 관내 순시 좀 다녀 올테니까 쓸데없이 싸돌아 다니
    지 말고 자리 지켜, 알았지?"

    쳐다보지도 않은채 일사천리로 말을 쏟아붓곤 유유히 사라지는 구반장의 
    뒷모습을 보면서 혜경은 그야말로 가슴에 불이라도 나는 기분이었다. 

    구반장의 말대로 그녀는 올해 초 경찰 학교를 졸업한 스물 넷의 경찰 초
    년병이었다. 우수한 졸업 성적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굳이 이 곳 횡성 경
    찰서를 자원한 이유는 이 곳이 바로 그녀의 고향이기 때문이었다. 

    "윤형사님, 참으세요. 구반장님 원래 그렇잖아요"

    그녀를 위로한 것은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올해 초 고동학교를 졸업한 
    후 경찰에 입문한 박호철 순경이었다. 집안이 어려워 군을 면제받은 대신 
    그가 택한 직업이 경찰이었던 것이다. 그는 윤형사를 누나처럼 따르고 있
    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도 이번 사건은 뭔가 이상한 점이 많은 것 같
    아요. 아무리 서울에서 형사들이 다녀 갔다지만 우리만큼 이 곳 사정에 
    밝겠어요? 열심히 해보세요,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도울 테니까. 우리 관
    내에서 생긴 사건을 우리가 모른 척 할 순 없잖아요"

    그의 따스한 말을 듣고 나니 꽉 막혔던 가슴이 조금 뚫리는 것 같았다.

    "박순경, 고마워. 나도 성질이 워낙 지랄 같아서 오늘처럼 반장님한테 스
    팀받으면 정말 참기 어렵더라구. 나 답답해서 좀 나갔다 올께"

    "현장 다녀 오려구요?"

    혜경은 대답 대신 싱긋 웃어 보였다. 

    2. 귀신이 찍힌 테잎(2)

    사건 현장은 경찰서에서도 1시간이상 떨어져 있었다. 목촌리 321번지에서 
    332번지까지가 사건 현장 부근이었고 332번지가 바로 그 흉가라 불리는 
    기와집이었다. 

    번지수로 보면 총 13가구가 살고 있어야 하지만 그 곳에 실제로 사람이 
    거주하는 가구는 단 세가구 뿐이었다. 이미 사건현장에서 그들을 모두 보
    긴 했지만 그녀가 직접 얘기를 나눠볼 기회는 없었다. 

    그들에 대한 조사는 구반장이 했었다. 그녀는 이미 그 세가구에 사는 주
    민들의 인적사항들을 파악하고 있었다. 

    어느 산골에서나 그렇듯이 그들 중 오십대 이하의 젊은 사람은 단 한 사
    람도 없었다. 그녀가 주민들을 탐문 수사해야 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한가
    지였다. 

    사망자들의 시신이나 정황으로 미루어 상당한 반항의 흔적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불과 500여미터 떨어진 마을에서 목격자나 이상한 소리조차 들
    은 사람이 전혀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사건 현장은 강원도에서도 찾아 보기 힘들만큼 산골이었기 때문에 한번 
    걸음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낮이라 해도 사람 구경조차 할 수 없
    는 울창한 숲을 30여분을 들어가야 마을에 닿을 수 있었다. 

    그녀가 만약 이곳 출신이 아니었다면 결코 엄두조차 못 낼 일이었다. 그
    녀가 마을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를 조금 넘겨서였다. 마을이라곤 하지
    만 사람이 살지 않는 보기 흉한 폐가가 대부분이었다. 

    마을 어느 구석에도 사람이 산다고 믿겨질만한 생기같은 것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죽은 마을. 그 곳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그녀는 생각
    했다. 

    321번지. 김명신(남자, 57세). 그녀는 자신이 적어 온 자료를 다시 읽고서 
    집으로 들어 섰지만 아무도 없었다. 주민 모두가 약초를 캐서 생계를 유
    지하기 때문에 낮엔 집에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325번지. 321번지와는 약 50여미터 떨어져 있었다. 한만수(남자, 65세), 한
    정우(남자, 72세). 그들은 형제였다. 역시 그들도 집에 없었다. 남은 한 집
    은 329번지였다. 

    사건 현장과 가장 가까이 위치한 집이었다. 권향미(여자, 92세), 김운기(남
    자, 69세). 그들은 모자였다. 집의 뒷쪽으론 고개가 있었다. 그 고개만 넘
    으면 기와집이 있는 사건 현장이었다. 

    마당에는 각종 약초를 다듬은 듯 한 흔적과 뗄 나무들이 한켠에 쌓여 있
    었다. 그녀는 마당으로 들어섰다.

    "실례합니다. 계세요? 아무도 안 계세요?"

    마지막 집마저 아무도 없다면 어려운 걸음을 헛탕칠 것 같아 내심 초조하
    던 혜경이었다. 대답이 없어 그녀가 조심스럽게 방문 앞으로 다가가 방문 
    손잡이를 잡으려는 찰나 방문이 왈칵 열렸다. 

    그녀는 얼떨결에 두어걸음 물러섰다. 방에서 고개를 내민 노인이 권향미
    라는 것을 그녀는 금새 짐작할 수 있었다. 

    팔다리가 꼬챙이처럼 앙상한 뼈만 남은 노인. 눈밑에는 이미 죽음의 그림
    자가 완연한 노인이 쿨럭거리며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할머니. 아무도 안 계신줄 알고..... 저 아시죠? 몇 일전 고개 
    넘어 기와집에서 보셨잖아요. 전 횡성에서 온 경찰이예요"

    그러나 노인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무서운 눈으로 그녀를 노려볼 뿐이었
    다. 그녀는 혹시 할머니가 귀가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두어 발자욱 다가가서 좀 더 큰소리로 소리치려할 때였다. 갑자기 
    노인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벽력같은 소리를 질렀다.

    "어딜 다가와!"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두어 발자욱 물러났다. 노인은 더욱 적대적인 
    눈길로 그녀를 노려 보았다.

    "할머니, 뭔가 오해를 하셨나본데 전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 이번 살인사
    건 조사차 나온 경찰이예요.제 말 잘 들리세요?"

    "그럼, 내가 귀머거린줄 알았어?"

    "그런 뜻이 아니구요. 그럼, 제가 그냥 여기 서서 몇가지만 물어 볼께요. 
    아시는대로 대답을 좀 해주세요"

    "난 아무것도 몰라, 아무것도 모른다구!"

    "할머니 그러지 마시고 협조를 좀....."

    그때였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건. 갑자기 노인이 소리를 지르
    면서 방안의 물건들을 닥치는대로 집어 던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모른다고 했잖아, 어서 꺼져버려, 망할 것! 괜히 이 근처에서 얼쩡거리다
    간 너도 무서운 일을 당할 줄 알아. 어서 꺼져!"

    말을 마친 노인은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아 버렸다. 혜경으로선 여간 
    남감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노인을 상대로 더이상 뭔가를 물어 본 
    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녀는 이왕 온 김에 현장을 한번 더 둘러 봐야 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
    녀는 천천히 집 뒷쪽으로 난 고갯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양 옆으로 수 백년은 된 듯한 소나무들이 빽빽히 들어서 있었고 가끔씩 
    들려오는 산새 소리들은 평화롭게만 여겨졌다. 그녀가 고개 정상에 닿았
    을때 아래로 기와집이 눈에 들어왔다. 

    332번지. 그 집의 소유는 김학봉(59세, 남자)이라는 사람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 집을 비운지가 얼마나 되었는진 알 수 없었지만 최소한 수십년 
    이상을 비워둔 것처럼 집은 앙상한 뼈대만 흉물스럽게 남아 있었다. 

    마을에서 현장까지 그녀가 재어본 시간으로는 느린 걸음으로도 6, 7분이
    면 충분이 닿을만한 거리였다. 집앞 마당엔 무수한 이름모를 들꽃과 잡초
    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몇일이 지나긴 했지만 아직도 시체가 놓여 있던 자리엔 핏빛이 남아 있어 
    당시의 참혹하던 광경이 되살아 나는 듯 해서 그녀는 약간의 섬뜩함을 느
    꼈다. 

    그녀는 천천히 집 주위를 돌면서 사망자들의 시신이 놓여 있던 곳을 둘러 
    보았다. 국과수에서 보내온 피해자들의 사망 추정 시간은 새벽 5시경. 그
    녀는 다시 집의 앞마당으로 돌아와 집앞에 주저앉듯 앉았다. 

    그리곤 집을 올려 다 보았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바로 그 집이 그녀
    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바람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정적. 순간 그녀는 등
    골이 서늘해지는 냉기를 느꼈다. 

    집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그녀를 노려 보고 있었다. 왼편 
    부엌의 반쯤 떨어져 나간 문짝이 이따금씩 기분나쁜 소리를 내고 있었다. 
    도대체 그날밤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녀가 눈을 감자 참혹하게 죽은 시신들의 끔직한 모습들이 떠올랐다. 그 
    공포에 질린 눈동자들. 그들이 질러대던 끔찍한 비명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올 것 같았다. 

    살려 달라는 그들의 찢어지는듯한 비명소리가. 그때 누군가가 그녀의 어
    깨를 꽉 잡았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악'하는 비명을 지르며 손을 뿌리
    쳤다. 

    그녀가 눈을 뜨고 올려다 본 곳엔 어디선가 본 듯한 한 사내가 서 있었
    다. 왼쪽 뺨엔 칼자욱이 선명하고 눈자위는 움푹하게 들어가 마치 유령을 
    보는 듯한 느낌. 한만수. 325번지에 사는 형제중 동생되는 자였다. 

    그는 어깨에 망을 메고 있었고 그 망 사이로 삐죽 삐죽 약초처럼 보이는 
    풀뿌리들이 삐져 나와 있었다. 그의 입에서 쇳소리가 나왔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그리고 그의 눈동자는 시종 불안한듯 좌우로 굴러 다녔다.

    "한만수씨, 맞죠?"

    그녀는 아직도 떨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간신히 물었다. 그는 
    대꾸없이 여전히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저 알아 보시겠죠? 이번 살인사건 때문에 수사차 나왔습니다. 댁에 들렸
    는데 안 계시더군요"

    자신의 집에 들렸다는 혜경의 말에 사내는 다소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 날밤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하셨다고 했는데 사실인가요?"

    "그 일이라면 난 더이상 할 말이 없어. 여긴 너같은 계집이 올 데가 못 
    돼. 쓸데없는 짓 말고 어서 돌아가!"

    사내는 마치 그녀를 동네 여자애 다루듯 거칠게 말했다. 

    "이봐요, 한만수씨! 전 지금 공무를 수행하는 형삽니다. 당신은 제게 협조
    를 해야 할 의무가 있어요"

    "의무? 난 그런거 모르니까 잡아가던지 말던지 마음대로 해! 그리고 경고
    하지만 이곳에 함부로 오지 않는게 좋을거야"

    사내는 마치 위협하듯 재빠르게 말하곤 무엇에 쫓기듯 동을 돌려 고개를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봐요, 한만수씨!"

    그녀가 소리쳐 불러 보았지만 그는 더이상 뒤돌아 보지 않았다. 사내의 
    표정은 뭔가에 잔뜩 겁을 먹고 있는듯한 모습이었다. 

    아까 그녀가 만났던 권향미 할머니, 그리고 이번엔 한만수라는 사내. 그녀
    는 그들이 분명 뭔가를 알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이 쥐죽은듯 고요한 산골에서 그 끔찍한 비명소리를 한 사람도 듣
    지 못했다는 것은 그녀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한가지, 그녀가 만난 두사람 모두에게서 그녀는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두사람과 얘기하는 동안 그녀의 뇌리에는 이상하게도 줄곧 죽음
    이라는 단어가 맴돌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들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죽음의 냄새를 맡은 것은 이 기와집을 
    비롯한 마을 전체로 부터 였다. 그녀는 다시 한번 서늘한 냉기에 몸을 떨
    어야만 했다.

    2. 귀신이 찍힌 테잎(3)

    비디오 테잎을 보고난후 김익재 촬영감독과 조연출 안영우는 몹시 놀란 
    표정이 역력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김익재 촬영 감독이었다. 

    "그.... 그러니까 저것들이 정말 귀신이다, 이거야?"

    "한국대학 손남의 박사 얘기니까 상당히 신빙성이 있어요"

    그러자 김감독이 갑자기 자신의 소매를 걷어 걷고선 안영우에게 말했다.

    "야, 영우야, 내 팔 좀 만져봐라. 소름 돋은거 보이지?"

    김감독의 말에 이영우도 양팔을 어루만지며 맞장구를 쳤다.

    "저도 웬지 오싹 오싹해지는게 기분이 이상한데요?"

    김감독 또한 테잎을 보며 카메라 이상이 아니라는 것에는 동의했다.

    "그래서..... 정PD 얘기는 프로그램을 다시 만들자 이거요?"

    "아닙니다. 전체를 모두 다시 만들잔 얘기는 아니고 후반부만 다시 만들
    어서 결론을 바꾸자 이거죠. 우리가 과연 저곳에 가서 똑같이 귀신을 찍
    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설사 못 찍어도 저 테잎이 있으니까 후반부는 
    수정할 수 있다는 거죠"

    김감독이 다시 화면을 한번 바라보곤 이영우에게 말했다.

    "야, 미치겠네! 올해는 완전히 귀신 붙은 해라더니, 그 점쟁이 얘기가 꼭 
    맞네, 꼭 맞아! 영우야, 담배 있으면 한대만 주라!"

    "또요? 오늘 벌서 몇 개핀줄 알아요? 좀 사서 피세요. 사서!"

    이영우가 마지못해 주머니를 뒤적거려 담배 한개피를 건네자 김감독이 또 
    다시 너스레를 떨었다.

    "임마, 내가 뭐 담배 살 돈이 아까워서 그러냐? 담배 좀 줄여 보겠다는 
    내 마지막 몸부림을 넌 그렇게 이해 못하겠냐? 내가 담배 사 봐라. 하루
    에 두갑은 필거다. 근데 너한테 맨날 이런 구박 받으며 빌려 피니까 하루
    에 열개피는 안 넘잖냐? 그리고 얼마후면 어느 귀신한테 잡혀갈지 모르는 
    판국에 동지끼리 너무 그렇게 야박하게 굴지마라"

    "아이구, 됐어요, 됐어!"

    둘은 언제나 앙숙이었다. 촬영장에 가서도 토닥거리긴 마찬가지였다. 촬영
    때는 술 한잔 안 걸치면 작품이 안 나온다며 틈만 나면 술 먹자는 김감독
    과 절대 음주촬영은 묵과할 수 없다며 술이라면 입에도 못대는 이영우. 

    그들은 정민수와 벌써 2년째 같이 작품을 하는 호흡이 잘 맞는 스텝들이
    었다. 정민수와 함께 그들은 올 가을 내내 귀신만을 찾아 다녔다. 나중에
    는 스텝들이 모두 악몽에 시달린다며 비명을 지르곤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야말로 정말 귀신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들은 내심 
    흥분되기 시작했다. 촬영일은 4일후로 잡았다. 대략적인 스텝회의를 마치
    고 해일이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온 것은 새벽 1시경이었다. 

    그가 아파트를 들어서기가 무섭게 전화벨이 울렸다. 심야에 걸려오는 전
    화는 두가지중 하나였다. 몹시 급한 일이거나 불길한 일이거나. 들고 있던 
    서류뭉치를 던지듯 쇼파에 내려놓고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해.... 해일이냐? 나.... 한수야, 김한수!"

    "어? 웬일이냐, 이 야심한 시간에? 어디야, 편집실?"

    "아.... 아니, 집!"

    "집? 제수씨가 좋아 하겠군, 근데 무슨 일로?"

    "뭐.... 특별히 일이 있어서가 아니고, 그냥....."

    "이 자식이.... 지금 노총각 약 올리는거야, 뭐야? 집에 들어 갔으면 제수
    씨 껴안고 얌전히 잠이나 잘 것이지, 웬 전화질이야. 왜, 오랜만에 집에 
    들어 가니까 남의 집 온거 같아 잠이 안와?"

    "그게.... 아니고..... 너..... 그 흉가 촬영 하기로 했냐?"

    "그래, 덕분에, 잘 하면 한방 터뜨릴지도 모르겠다. 일 잘 되면 내가 한 
    잔 살께"

    "그.... 그래, 그랬구나"

    "근데 너 목소리가 좀 이상하다. 어디 아프냐?"

    그제서야 해일은 김한수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
    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초조
    해 보였으며 어찌 들으면 떨고 있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아... 아니야, 감기 기운이 좀 있는 것 같애. 근데, 저기 말이야...."

    "그래, 얘기해"

    "아.... 아니야, 됐어"

    "임마, 너 답지 않게 왜 그래? 나한테 무슨 할 말 있어?"

    "아니야, 그냥 술 생각 나서 전화 했는데 그만 두는게 좋겠어"

    "짜식 싱겁긴, 그래, 괜히 감기 걸려서 술 먹었다가 더 고생하지 말고 일 
    찍 자라. 제수씨 걱정 하겠다"

    "그래.... 너도 몸조심 하고.... 이만 끊을께"

    전화는 거기서 끊겼다. 해일이 다소 싱거운 그의 전화에 한번 피식 웃곤 
    막 웃옷을 벗으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그의 뇌리에 그의 마지막 말 한마
    디가 낯설게 다가섰다. 

    그래, 너도 몸조심 하고. 뭔가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인삿말이 아닐 수 없
    었다. 그리곤 잠시 후 그는 피식 웃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짜식, 감기에 걸리더니 정신까지 오락 가락하나?"

    * * *

    전화를 끊은 김한수는 거실 쇼파에 넋나간 사람처럼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두운 정적속에서 불규칙한 숨소리가 규칙적인 시계초침 소리에 묻혀 가
    늘게 들려오고 있었다. 

    한참을 꼼짝 않고 앉아 있던 김한수가 갑자기 일어섰다. 그리곤 발작적으
    로 거실의 불을 있는대로 밝히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어둠이 조각나고 거
    실은 대낮처럼 밝아졌다. 

    그러나 불빛에 드러난 김한수의 모습은 더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얼
    굴엔 식은 땀이 번질거렸고 몇 일째 잠을 못 잔 사람마냥 두 눈엔 핏발이 
    서 있었다. 

    그는 밝은 빛이 가득한 거실을 좌우로 서성이기 시작했고 그의 입에선 알 
    수 없는 얘기가 흘러 나왔다.

    "빌어먹을 그럴리 없어, 현실이 아냐. 절대로"

    한참을 그렇게 서성이던그가 이번엔 갑자기 주방으로 다가가 장식장을 
    열곤 위스키를 꺼내 들었다. 그리곤 거칠게 병마개를 따서 컵에 술을 가
    득 부었다. 술을 따르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그는 또다시 컵에 술을 채웠다. 역시 이번에
    도 순식간에 술잔을 비웠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손은 안정감을 잃은 채 
    떨리고 있었다. 그가 탁자에 팔꿈치를 괴고 머리를 감쌀 때 였다. 

    "여보!"

    낯선 소리에 그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아내 지윤이었다. 그는 얼
    른 다시 고개를 돌렸다.

    "거실 불을 뭐 하러 있는대로 켰어요?"

    지윤이 막 거실불들을 끄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김한수가 날카롭게 소리
    쳤다.

    "끄지마!"

    그의 뜻하지 않은 행동에 지윤이 흠칫 놀라며 얼어붙듯 그 자리에 섰다.

    "여.... 여보!"

    "거실 불.... 끄지 말라구!"

    한동안 남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며 
    말했다.

    "당신 왜 그래요?"

    그러나 그는 대답이 없었다.

    "당신, 어디.... 아파요?"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와 함께 남편의 고개를 들어 올리던 그녀의 표정
    이 일순 하얗게 변했다. 

    핏발 선 두 눈. 신경질적이고 창백한 얼굴. 섬뜩한 광기. 지윤은 지금까지 
    한번도 남편의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남편은 언제나 정력적이고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여보... 당신?"

    그러자 김한수가 그녀의 손을 훽 뿌리치며 거칠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곤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날 보지마!"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고개 돌린 김한수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그의 머
    리와 얼굴은 온통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여보, 도대체 무슨 일이예요, 왜 그래요?"

    그녀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 고개를 묻은채 김한수는 
    말이 없었다. 그러자 조금씩 흐느낌이 새어 나왔고 남편의 어깨가 약간씩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편의 옆에 주저앉아 남편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남편의 얼굴을 
    본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가엾게도 남편은 울고 있었다. 
    그녀는 너무 놀라 울먹이듯 말했다.

    "당신 왜 그래요? 무슨 일인지 말을 해봐요. 제발, 여보!"

    남편이 두려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남편의 입에서 나온 다
    음 얘기는 그녀로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얘기였다.

    "여.... 여보, 나.... 너무.... 무서워"

    "네?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요?"

    "제기랄! 여보. 나... 무서워 죽겠어!"

    마침내 남편이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애
    원하듯 소리쳤다.

    "잠을.... 잠을 잘 수가 없어. 너무 무서워서 잠을 잘 수가 없어, 여보!"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남편의 온 몸은 그녀가 부둥켜 안기에도 벅찰
    만큼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섭다니. 아득
    한 현기증이 그녀에게 찾아 들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불이 환히 밝혀진 거실을 둘러 보았다. 거실은 조
    금도 달라 진 것이 없었다.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안간힘을 쓰면서 눈물을 삼켰다. 그리곤 스스로에게 맹세
    했다. 남편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를 지키겠다고.



    3. 몇 가지 의문들(1)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할 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마을 사
    람들의 석연치 않은 태도는 그녀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을 뿐 아직까
    지 뚜렷한 실마리 하나 잡지 못한 혜경이었다. 

    단서를 못 잡고 헤매긴 서울에서 내려왔던 시경 수사팀들도 마찬가진 것 
    같았다. 

    가끔씩 전화를 해선 이미 보내준 사진 자료들을 다시 한번 보내 달라거나 
    사건 현장 부근에 늑대과에 속하는 짐승의 서식 여부에 대한 자료 조사 
    요청 정도였다. 

    그들은 아무래도 피살자 세명의 원한 관계에 의한 계획된 살인으로 촛점
    을 맞추고 그들 주변 인물들을 상대로 탐문수사를 벌이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분명히 달랐다. 그녀가 조사해본 바 로는 최근 5년
    간 목촌리 부근에서 야생 늑대가 발견 되었다는 보고는 전혀 없었다. 

    그리고 설혹 원한 관계에 의한 살인이라 하더라도 흉기가 죽창이라는 점
    이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금방 남의 눈에 띌 수도 있고 소지하기도 불편할 뿐만 아니라 누군가를 
    죽이기에도 그것은 적당한 무기가 아니었다. 분명 거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맴돌았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가 어떤 식으로든 마을 사람들과 관계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일단 한가지 생각에 빠지면 
    헤어나질 못하는 그녀였다. 

    그녀는 식사도 하는둥 마는둥 하며 숟가락을 놓았다. 그러자 그녀의 앞에
    서 식사를 하던 구반장이 놀란 토끼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윤형사가 밥을 다 마다 하고? 최근에 무슨 충격 받은 
    일 있어?"

    "네?"

    "아니, 내 말은 식사때 마다 꼬박 꼬박 두 그릇은 싹싹 비우던 자기가 밥
    을 남기길래 혹시 누구한테 충격받고 그 뭐냐, 남들이 하는 다이어트라도 
    하나 해서?"

    "나참, 기가 막혀서.... 반장님은 왜 저만 보면 그렇게 못 잡아 먹어서 안
    달이세요?"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라니? 내가 언제 자기 못 잡아 먹어서 안달 했다
    고 그래? 사실 솔직히 말해서 자기가 결코 날씬한 편은 아니잖아. 그래서 
    밥을 안 먹길래 다이어트 하냐고 물은건데.... 그게 뭐 그렇게 잘못 한 건
    가? 이봐 박순경, 뭐라고 말 좀 해봐! 내가 실수한 거야?"

    구반장은 짐짓 정색을 하며 옆에 있던 박순경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걸 왜 저한테 물어 보세요? 전 아무 소리도 못 들었습니다"

    "됐어요, 제가 참죠. 하지만 반장님, 그러시는거 아니예요"

    "내가 뭘 어쨌다고 자꾸 그래? 자기 정말 성격 이상하네?"

    그때 그들 사이에 식당 아줌마가 끼어 들었다.

    "오늘 또 사워요? 하옇튼 어떻게 반장님 하고 윤형사는 하루도 안 빼고 
    그렇게 튀격 태격이예요, 그래? 그건, 그렇고 그 뭐냐.... 목촌리 살인사건
    은 어떻게 범인은 잡았어요?"

    그러자 구반장이 갑자기 탁하고 숟가락을 내려 놓곤 인상을 찌푸리며 말
    했다.

    "아줌마! 경찰도 사람이요, 사람! 남 식사하는데 꼭 그런걸 물어야 겠수? 
    아줌마는 밥 먹는데 똥 얘기하면 기분 좋아요? 그게 그렇게 궁금하면 우
    리 윤형사한테 물어봐요. 살인사건 아니면 상대 안 하는 형사니까"

    구반장의 가시박힌 말에 혜경은 가슴이 뜨끔했다. 사실 그것 때문에 요 
    몇 일 관내의 다른 일들을 소홀히 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그
    녀의 행동을 구반장이 모를 리 없었다. 

    다만 모른 척 하고 넘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별로 좋지도 않은 상
    황에서 주책맞은 아줌마가 일부러 그 얘길 꺼내니 여간 난처한게 아니었
    다.

    "아이구, 반장님두, 별것 다 갖고 토라지실까? 에게 식사도 벌써 다 하셨
    네, 뭐. 근데, 이번 사건 정말 윤형사 담당이야?"

    "아.... 아니예요. 아줌마! 제가 무슨....."

    "하긴, 서울에서 형사들이 내려 왔었다며? 어떤 미친놈이 그런 끔찍한 일
    을 저질렀을까? 하긴 옛날부터 목촌리 그 곳이 터가 센 곳이었지. 반장님
    도 잘 아실걸요? 해방전엔 그 곳이 왜 전염병 환자들 격리하던 곳이었다 
    잖아요. 그러더니 6. 25땐 빨갱이들 내려와서 반동분자들 공개 처형한다면
    서 죄 없는 마을 사람들 수 없이 끌어내선 죽창인가 뭔가로 마구 찔러 죽
    이는 바람에 얼마나 사람이 많이 죽었어요?"

    그때 혜경의 의식 속을 번개처럼 파고 드는 단어가 있었다. 그녀가 반사
    적으로 소리쳤다.

    "아줌마! 방금 죽창이라고 하셨어요?"

    "아이구, 깜짝이야. 갑자기 왜 그래, 윤형사?"

    6.25, 공비, 죽창. 그녀는 갑자기 눈앞이 트이는 것 같았다. 자신이 왜 바
    보같이 한번도 그 생각을 못 했는지 이상하기까지 했다. 

    죽창이란 것이 지금은 몹시 낯설지만 불과 40여년전에는 한때 그것이 가
    장 무섭고 두려운 무기였던 적이 있었다. 갑자기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
    다. 그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장님, 저 먼저 일어설께요"

    "밥 먹다 말고 갑자기 어디 가는 거야? 만약 오후에 또 자리 비우면 그땐 
    정말 가만 안 있을거야! 알았지?"

    구반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녀의 귀엔 더이상 구반
    장의 목소리가 들려 오지 않았다. 그녀의 머릿속엔 이미 목촌리, 6. 25, 죽
    창, 공비, 공개 처형..... 그런 단어들로 가득 차 있었다. 

    * * *

    해일이 김한수의 아내인 지윤으로부터 급히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그는 김한수가 그녀와 결혼하기 전부터 지윤과는 
    아는 사이였다. 

    그녀는 김한수의 학과 후배였고, 따라서 해일의 후배이기도 했다. 하지만 
    집들이나 동문회 같은 특별한 행사때 김한수와 같이 그녀를 몇 번 만난 
    적은 있지만 이렇게 따로 만나는 것은 결혼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는 남편에겐 둘이 만나는 것을 비밀로 해 달라는 당부를 따로 남겼었
    다. 도대체 무슨 일 일까? 

    뭔가 좋지 않은 일일 것 이라는 예감만이 막연하게 그의 머리를 떠돌 뿐 
    특별히 추측될만한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이틀전 새벽에 걸
    려온 그의 전화가 조금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감기에 걸렸다고 해서 당시엔 별 신경 않 쓰고 그냥 넘겼지만 아침에 그
    녀의 전화를 받고 나선 자꾸만 그때의 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점
    심시간이 지나서인지 커피숍은 한산한 편이었다. 

    그는 일부러 20분 정도 일찍 나와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정
    확히 약속시간에 맞추어 나타났다. 

    해일은 그녀를 보는 순간 자신이 생각한 이상으로 그들 부부 사이에 뭔가 
    불길한 일이 있다는 것을 그는 직감할 수 있었다. 

    화장기 하나 없는 그녀의 얼굴은 몹시 초췌했으며 서둘러 나왔는지 옷차
    림 역시 예전의 그녀와 달리 별로 신경을 쓴 기색이 보이질 않았던 것이
    다. 

    해일의 앞에 마주 앉은 그녀의 모습은불안한 모습이 역력했다. 그녀는 
    몹시 망설이며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제수씨!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돕겠습니
    다. 편하게 얘기하세요"

    그러자 마침내 그녀는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바쁘신데 이렇게 만나자고 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긴 
    해야 겠는데 마땅한 사람이 떠오르질 않더군요. 만나자고 한 건 다름이 
    아니라.... 요즘.... 그 이한테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요"

    "이... 상 한 일이라니요?"
    "글쎄, 어디서 부터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할지 모르겠지만 요즘 그 사람, 
    뭔가에 홀렸는지 예전의 그 이가 아니예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 때부터예요. 강원도에 살인사건인가, 취재를 갔다 온 그 다음부터...."

    그녀는 감정이 복 받치는지 거기서 말을 끊곤 다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음부터 이어진 그녀의 얘기들은 김한수를 잘 알고 있는 해일로
    선 도저히 받아 들이기 어려운 이상한 얘기들이었다. 

    3. 몇가지 의문들(2)

    그녀의 얘기는 다음과 같았다. 김한수가 강원도 H군의 취재를 갔다 와서 
    밤을 세워 기사를 쓰고 집으로 들어 온 것은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서였다
    고 한다. 

    그녀가 보기에 김한수는 그날따라 유독 지치고 피곤해 보였으며 집에 들
    어 오기가 무섭게 쓰러져 깊이 잠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잠든 김한수가 
    헛소리를 하기 시작한 것은 새벽녘이었다. 

    그는 결혼 후 한번도 헛소리나 잠꼬대를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힘든 일때문에 몸이 약해져 그런 줄만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김한
    수의 잠꼬대는 매일 계속 되었고 그 정도도 심해졌다. 

    그리고 그 잠꼬대의 대부분은 살려 달라는 비명에 가까운 것이었고 급히 
    잠을 깨우면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서 뭔가를 두려워 하는 기색이 완
    연했다. 잠꼬대만이 아니었다. 

    잠을 자지 않을때도 그는 이상하게 불안해 하고 초조해 했다. 그러다 바
    로 이틀전 해일과 통화를 한 바로 그 날밤엔 절망과 두려움에 사로잡힌 
    얼굴로 무섭다는 말과 함께 그녀의 앞에서 울음까지 터뜨렸다는 것이다. 

    해일은 참담한 기분으로 그녀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토록 활동적이고 
    자신감에 넘치던 김한수가 그랬다는 것이 그로선 도통 믿기지가 않았다.

    "기가 막히더라구요.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그렇게 되니까. 하두 답답해
    서 방송국에 연락해 봤더니 갑자기 휴가를 내겠다고 했다더군요. 무슨 일
    이냐고 물어도 대답도 하지 않고. 할 수 없이 전문의의 진단을 한번 받아 
    보자고 했죠. 정PD님도 아시죠? 그 이 친구중에 정신과 전문의로 있는 
    민병기박사라고......"

    "민박사요? 예, 압니다"

    "그랬더니 펄쩍 뛰면서 자기를 무슨 정신병자 취급하냐며 갑자기 집안의 
    물건을 닥치는대로 부수고..... 마치 딴사람처럼, 너무 무서웠어요. 그 이의 
    그런 모습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 했었거든요" 

    그녀는 더이상 말을 잊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가 자신에게 테잎을 넘겨줄때만 해도 해일은 그에게
    서 별다른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 못 했었다. 

    그러고 보니 이틀전 그의 전화는 예사로운 전화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확
    신이 그의 생각을 지배했다. 그는 분명 그에게 뭔가 말하려고 했던 것 같
    은데. 한참을 흐느끼던 그녀가 간신히 울음을 삭키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죄송해요, 이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괜찮습니다.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제가 놀라는 것이야 뭐 큰일인가요? 다만 그 이가 너무 걱정이 되서....."

    "그래서, 그 다음엔 어떻게 됐나요?"

    "그리곤 바로 어제 아침에 방송국으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전화를 받은 
    그 이의 표정이 심상치 않더라구요. 그래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 
    이와 함께 H군에 취재 갔던 카메라맨이 갑자기 죽었다는 거예요. 그때 
    그 이의 표정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지..... 마치 세상이 끝나기라
    도 한 것 처럼 절망하고 좌절하던 그 표정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한 것 같
    아요. 온 몸을 부들 부들 떨면서 알아 들을 수도 없는 헛소리를 지껄이기 
    시작더니 갑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가 안에서 문을 잠근채 꼼짝도 하지 않
    는 거예요. 도대체 사람을 그토록 무섭게 만들 수 있는게 무엇인지 궁금
    할 정도였어요. 아무리 문을 열라고 해도 그이는 제 목소리를 듣지도 못
    하는 양 대답조차 하지 않았어요. 무섭고 두렵긴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우
    선 방문을 열어야 겠다는 생각에 창고에서 비상키를 찾아서 다시 돌아왔
    을땐 남편은 이미 나가고 없더군요. 남편에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날 
    저녁이었어요. 어떤 사람들이 자신을 찾으러 올 것이라고 했어요. 그들에
    게 자신은 미친것이 아니라고 말해달라고 하면서.... 저 보고..... 그동안 고
    마웠다면서..... 그이의 전화가 끊기고 얼마후 과연 경찰이라는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와 그 이를 찾았어요. 그리곤 그 이가 집에 없다는 사실을 확
    인하곤 돌아가더군요. 그 후로 지금까지 그 이한테선 아무런 연락도 없는 
    거예요. 도대체 그 이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금방이라도 무
    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아 불안하고 조마 조마해서 그냥 집에 있을 수가 없
    었어요. 이제 전 어쩌면 좋죠? 어떡해야 돼죠?"

    그녀는 거의 절망적인눈빛으로 해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해일이라고 
    해서 무슨 뾰족한 묘안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도무지 갈피를 잡기 어려
    운 김한수의 기이한 행동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까? 

    그를 찾아 왔다는 경찰들은 누구일까? 그는 지금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리를 맴돌았다. 그는 일
    단 그녀를 최대한 위로하여 돌려 보냈다. 

    자신이 어떻게든 원인을 알아 볼테니 참고 기다려 보라는 말과 함께. 하
    지만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긴 그녀와 마찬가지인데. 

    그러나 한가지 그의 마음속에서 내내 떠나지 않는 생각이 한가지 있었다. 
    그것은 김한수의 기이한 행동과 그가 취재를 갔던 H군의 살인사건이 어
    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는 우선 김한수와 함께 취재를 갔다가 갑자기 죽었다는 카메라맨에 대
    해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보도국에 전화를 걸어 본 결과 그의 이름이 이창수라는 것을 알아냈고 그
    는 김익재 촬영감독에게 도움을 청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같은 
    방송국의 카메라맨이니까 서로 알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때문이었다. 

    "뭐? 이창수가 죽었다구?"

    예상대로 김감독은 이창수를 잘 알고 있는 듯 했으며 그의 갑작스런 죽음
    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사람과 잘 아세요?"

    "잘 알 다 뿐이요? 옛날에 내 밑에서 카메라 배워서 입봉한 녀석인데... 
    이제 갓 서른밖에 안됐는데 도대체 어쩌다 그렇게 죽었답디까?"

    "저도 확실한건 잘 모르겠어요. 자신의 집에서 죽어 있는 것을 우연히 그
    의 집에 들른 친척이 보고 경찰에 신고했다고 하더군요"

    "참, 사람 목숨 별거 아니구만. 한 보름전에 만났을때만 해도 멀쩡하던 놈
    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해일과 김감독이 이창수의 집 앞에 도착했을때는 이미 경찰들이 '수사중'
    이라고 쓴 팻말이 달린 노란 띠를 집 주위에 둘루곤 사람들의 집안 출입
    을 통제한채 삼엄한 경계를 피고 있었다. 차에서 내리며 김감독이 말했다.

    "이거, 그냥 죽은게 아닌 모양인데? 웬 분위기가 이렇게 살벌해?"

    김감독과 해일이 다가가자 근무를 서던 경찰이 앞을 막았다.

    "무슨 일입니까? 여긴 현재 일반인 출입이 금지 된 곳입니다"

    그러자 그 경찰에게 김감독이 앞으로 나서서 말했다.

    "이보슈, 난 죽은 이창수완 아주 막연한 사인데 도대체 왜 죽었습니까? 
    죽은 이유나 좀 압시다"

    "수사상 비밀이라 현재로선 아무것도 말씀 드릴 수 없습니다"

    "아니, 어떻게 죽었는지도 말해 줄 수 없단 말이오?"

    "그만 물러나세요, 상부에 지십니다"

    경찰이 김감독과 해일을 밀치듯 제지하자 김감독이 화가 난 듯 그의 손을 
    뿌리치며 거칠게 항의했다.

    "나원 참, 분통 터져서. 무슨 놈의 민주 경찰이 이 따위야. 아끼던 후배가 
    죽었는데 어떻게, 왜 죽었는지도 알 수 가 없단 말야?"

    삿대질까지 해대며 분통을 터뜨리는 김감독을 가까스로 말린 것은 해일이
    었다. 공연희 소란을 피워봤자 아무것도 얻어질건 없을 것 같았다. 난감한 
    심정으로 이창수의 집만 먼 발치에서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해일을 
    알아보고 달려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김한수와 보도국에 함께 있는 강상준 기자였다. 잘 알진 못하지만 
    해일이 김한수와 함께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정PD님, 아니세요?"

    "아예, 강기자님이시죠?"

    "근데, 여긴 어쩐 일로......"

    "예, 뭣 좀 알아볼게 있어서요. 강기자님은 어떻게?"

    "예, 저는 취재차 조문차, 겸사 겸사 나왔습니다. 저희 보도국에 있던 카
    메라맨 한 명이 죽었거든요"

    "사실 저도 이창수라는 사람의 죽음이 궁금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혹시 
    아는게 있으시면 좀....."

    "그 사람과 아시는 사이 셨던가요?"

    그때 김감독이 나섰다.

    "창수와는 제가 잘 압니다. 대체 어떻게 죽었습니까?"

    그러자 강기자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잠시 난색을 표명했다. 이윽고 입을 
    연 그의 얘기는 뜻밖이었다.

    "사실 저도 같은 직장 동료의 죽음을 취재한다는게 여간 찝찝한게 아닙니
    다. 근데 이상하게도 취재를 할 수가 없었어요. 경찰 측에서 전혀 접근을 
    안 시켜 주는 겁니다. 웬만해서 그런 일이 없는데...... 현재로선 그의 죽음
    에 대한 어떠한 정보나 사실도 철저히 차단되고 있어요. 다만 제 정보원
    을 통해 어렵게 얻은 정보에 의하면 그의 시체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
    을 정도로 손상되었다는 거예요"

    "손상이 됐다구요?"

    해일이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한마디로 무슨 맹수에게 뜯어 먹힌 것 같았대요. 방안이 온통 핏자욱 이
    었는데 거세게 저항한 흔적도 역력하고..... 하옇튼 너무나 끔찍한 모습이
    었대요"

    그러자 이번엔 김감독이 큰소리로 말했다.

    "맹수한테 뜯어 먹혀요? 여기 자기 집에서?"

    "네. 경찰도 그 점을 수상히 여기나 보더라구요. 다른 곳도 아닌 바로 자
    신의 집에서.... 때 아닌 맹수라니. 그리고 더욱 이상한 점은 살해된 모습
    이 이창수가 죽기 전 김한수 기자와 함께 취재를 다녀온 강원도 H군에서 
    일어난 살인사건 피살자들의 모습과 너무나 유사했다는 겁니다"

    강기자의 얘기에 해일은 심한 혼란을 느꼈다. 강기자의 얘기를 들으면서 
    해일 역시 자연스럽게 그 H군 살인사건을 떠올렸던 것이다. 

    김한수가 너무나 끔찍했다며 치를 떨며 넘겨준 그의 자료들에도 그 피살
    자들의 시신에 대한 여러 의문점과 묘사들이 자세히 적혀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그 H군에서 일어난 살인사건과 이창수라는 카메라맨과 무슨 관련
    이 있길래. 그리고 김한수와는 또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의문점은 점
    점 더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번져 가고 있었다. 

    "정PD님, 어제, 오늘 사이 혹시 김한수 기자 보지 못 했어요?"

    "김기자요? 아니요, 왜요?"

    "뭐, 별건 아니고 경찰에서 김기자를 좀 만났으면 하더라구요. 아무래도 
    H군에 이창수와 함께 다녀 왔으니까 혹시 짚이는게 있을지도 모르니까. 
    근데 그 사람 몇일전 휴가 내곤 전혀 연락이 안 되더라구요. 집에 전화해
    도 전화도 않 받고"

    "글세요, 저도 최근에 김기자를 만나지 못해서. 만약 만나면 그렇게 전하
    죠"

    강기자가 가고 나자 김감독이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이봐요, 정PD. 이거 뭔가 좀 이상하지 않소? H군 살인사건은 나도 뉴스
    에서 봤는데 이창수가 그 사람들과 같은 모습으로 죽었다니, 이게 말이 
    되요? 정말 거기 귀신이라도 있는거 아닐까?"

    "그거야 뭐, 직접 가보면 알겠죠"

    "난 어째 이번엔 웬지 기분이 뒤숭숭한게.... 아무래도 보험이라도 하나 들
    어 놓고 가야 할 건가봐?"

    "김감독님 답지 않게 왜 이러세요? 분명 무슨 곡절이 있을 겁니다"

    말은 쉽게 했지만 해일의 머릿속도 개운치 못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의 마음속엔 내내 김한수가 마음에 걸렸다. 이창수의 죽음이 김한수에
    게도 어떤 영향을 미친 것이 틀림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3. 몇가지 의문들(3)

    H군 도서관 한쪽 구석에서 십여권의 책더미를 쌓아놓고 뭔가를 열심히 
    들여다 보고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윤혜경 형사와 박호철 순경이었다. 
    한참을 자료들을 살피던 박호철이 몸을 뒤로 젖혀 크게 기지개를 펴 면서 
    말했다.

    "윤형사님, 오늘은 이만 하죠. 전 눈이 아파서 더이상 못 하겠어요. 그리
    고 지금쯤 반장님이 돌아오실 때도 됐고. 반장님이 알면 또 난리날 텐데"

    "미안해, 박순경까지 고생하게 해서....그래, 오늘은 이쯤 하자구"

    "그런 소리 마세요. 근데 목촌리 마을과 주민들에 대해 이렇게 조사하는 
    이유가 뭐죠? 이것들이 살인사건과 어떤 관련이라도 있는 건가요?"

    "그건 나도 아직 잘 모르겠어. 일단 찾은 자료들 복사하고 경찰서로 가지
    고 가서 좀 더 분석을 해 봐야 할 것 같아"

    혜경과 박호철이 가슴에 하나 가득 자료들을 안고서 도서관을 나온 것은 
    이미 날이 어둑해질 무렵이었다. 

    구회열 반장이 오늘 집안 일때문에 오후 늦게나 잠깐 경찰서에 들린다는 
    소릴 듣고 그녀가 박순경에게 부탁하여 함께 도서관을 찾은 것이었다. 그
    러나 그들이 서둘러 경찰서로 돌아 갔을때는 벌써 구회열 반장이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잠깐 나 좀 보자구!"

    구반장은 손에 잔뜩 서류더미들을 들고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얼굴
    을 해선 회의실로 그들을 불렀다. 혜경은 오늘은 아무래도 쉽게 넘어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곤혹스런 표정으로 구반장을 따라 갔다. 

    회의실에 앉은 세 사람 사이에는 숨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구반장은 손에 
    든 볼펜으로 책상을 딱딱 두드리며 두 사람을 노려만 보고 있었다. 참다 
    못한 혜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기 반장님.... 오늘 근무 시간에 자리 지키지 않은 건 정말 죄송해요"

    "죄송한게 그게 다야?"

    "박순경 데리고 나간 것도....."

    "그리고 또?"

    "........."

    그녀가 말문이 막혀 고개를 숙이자 구반장이 자신이 들고 들어온 종이 뭉
    치들을 탁자위에 팽개치듯 던지곤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것들이 다 뭐야?"

    구반장의 말에 혜경은 의아한 표정으로 종이뭉치를 집어 들었다. 모두가
    팩스들이었다. 혜경이 서울 시경 자료실에 있는 경찰학교 선배에게 부탁
    하여 받은 목촌리 출신 주민들에 대한 신상 기록들이었다.

    "이것들 때문에 오늘 경찰서 팩스가 완전히 마비됐어, 알아? 다른 급한 
    팩스가 하나도 못 들어와서 난리가 났었단 말야! 너, 나 아주 목 짤리게 
    만들려고 작정햇냐, 작성했어?"

    구반장의 벽력같은 소리에 박호철의 얼굴은 완전히 사색으로 변했다. 가
    슴이 철렁한 것으로 말하자면 혜경쪽이 훨씬 더 했다. 선배가 보내 주기
    로 했던 자료가 이렇게 많을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이었다.

    "어디 한번 내가 납득하게 설명을 해 봐, 이것들이 다 뭔지"

    구반장은 오늘이야말로 결판을 내고야 말겠다는 듯 이글거리는 눈으로 그
    녀를 쏘아보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생각들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
    올랐다 사라졌다. 그녀가 마침내 결심한 듯 번쩍 고개를 들었다.

    "반장님, 이번 사건을 제가 정식으로 수사 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요. 그리
    고 반장님께서도 절 좀 도와 주십시요. 이번 사건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우리 일입니다"

    갑작스런 그녀의 태도 변화에 구반장이 기가 막히는 표정으로 그녀를 잠
    시 바라보곤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는가 싶더니 갑자기 책상을 쾅하고 내
    리치며 소릴 질렀다.

    "그건 안될 말이야. 안된다구, 절대! 안돼!"

    혜경 또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선 더 세게 책상을 내리치며 소리쳤다.

    "왜 안 된다는 거죠? 상부에서도 계속 시경팀을 도와 수사에 협조하라는 
    지시가 있었고 분명히 우리 관할내에서 일어난 우리 일인데 왜 안되요, 
    왜요? 겁나세요? 무서우세요?"

    그러자 이번엔 구반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리곤 붉게 상기된 얼
    굴을 실룩거리며 혜경을 향해 다가왔다. 박호철이 말릴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상황은 더욱 험악한 분위기로 번지고 있었다.

    "너! 지금 나한테 반항하는 거야? 쬐끄만게 이쁘다 이쁘다 하니깐 정말 
    끝도 없이 기어올라!"

    구반장이 금방이라도 한 대 후려칠 듯 한 기세로 노려보자 혜경도 질세라 
    두 눈을 똑바로 뜨며 대들 듯 가슴을 내밀었다.

    "저도 더이상은 못 참겠어요. 상관이면 다 예요? 근무 태만에다, 유흥업소 
    단속은 커녕 돈 받고 봐주기나 하고.... 제가 다 모를 줄 알아요? 경찰 옷
    만 입으면 다 경찰이예요?"

    그녀의 말에 구반장이 부들 부들 떨면서 박호철을 향해 더듬거렸다.

    "야, 바.... 박순경아, 지... 지금 윤형사가 무슨 소리..... 하는 거냐?"

    더듬거리며 말 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구반장을 향해 혜경은 조금도 물
    러서지 않았다.

    "아마, 상관만 아니었더라면 벌써 예전에 제 주먹이 가만 있지 않았을 거
    예요"

    "유.... 윤형사님!"

    박호철이 참다 못해 소리쳤다. 그러나 뜻밖에도 구반장은 현기증이 나는
    지 비틀거리며 이마를 짚곤 무너지듯 자리에 앉았다.

    "왜요? 양심에 찔리시나요? 더 얘기해 드릴까요?"

    혜경이 여전히 소릴 지르면서 험악한 기세로 노려보자 구반장이 손을 내
    저으며 힘없이 말했다.

    "그래, 알았어, 알았다구. 너 잘 났다, 너 잘 난거 아니깐 제발 살살 좀 얘
    기해라. 귀창 터지겠다. 애가 무슨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야, 박순경
    아, 문 열고 이 여자 얘기 혹시 들은 사람 없나 한번 봐라. 아이구 어지러
    워, 아이구 머리야"

    어리둥절한 눈으로 박호철이 구반장의 말대로 회의실 문을 살짝 열고 밖
    을 살피곤 자리로 돌아오며 말했다.

    "아무도 없는데요?"

    "확실하냐?"

    "네"

    "제....제..... 갑자기 왜 저 여자 이름이 생각이 않 나냐?"

    박호철이 얼른 대답했다.

    "윤형사님요, 윤형사"

    "그래.... 윤형사, 박순경아, 나 오늘 제 때문에 여러 번 숨넘어갈 뻔 한다. 
    도대체 윤형사가 뭘 믿고 내가 돈 받고 봐주기 했다는건지 난 도....저히 
    이해가 안간다. 박순경아, 넌 이해가냐?"

    "그럼, 제가 직접 증거를 들어 보일까요? 아니면 증인이 필요 하세요?"



    /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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