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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ID : sisa_582866
    작성자 : 갠트
    추천 : 1/3
    조회수 : 402
    IP : 125.178.***.25
    댓글 : 0개
    등록시간 : 2015/03/25 18:13:45
    http://todayhumor.com/?sisa_582866 모바일
    탈당에 대한 소고(小考)... 1편 김대중
    <div><a target="_blank" href="http://www.shinmoongo.net/sub_read.html?uid=75345">http://www.shinmoongo.net/sub_read.html?uid=75345</a></div> <div><br></div> <div><br></div> <div> <table width="100%"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style="font-family:dotum;"><tbody><tr><td class="read_title" style="font-weight:bold;font-size:24px;line-height:normal;font-family:gulim;letter-spacing:-.1em;">탈당에 대한 소고(小考)... 1편 김대중</td></tr><tr><td height="5"></td></tr><tr><td class="read_subtitle" style="font-weight:bold;font-size:13px;line-height:normal;font-family:gulim;letter-spacing:-1px;color:#666666;">[임두만의 정치해설] 탈당이 야권분열? 기존 판이 깨져야 새로움이 있다.</td></tr></tbody></table></div> <div><br></div> <div><br></div> <div><br></div> <div>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지금부터 쓰는 두 편의 글은 작금 정동영, 천정배의 새정연 탈당을 두고 야권분열이라는 둥, 새정연을 죽이면 다 함께 죽는다는 둥으로 두 정치인을 비난하는 사람들, 특히 김대중 노무현을 신(神)급으로 추앙하는 분들에게 헌정하는 글이다. 이 글을 읽은 뒤, 당신들이 추앙하는 두 분이 탈당을 통하여 지금의 야권세력을 다 죽인 것인지, 아니면 한국정치의 판을 바꾸는데 크게 기여했는지는 스스로들 판단하시라. 나는 단지 기록만 전해드릴 뿐이다.</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table border="0" cellspacing="3" align="center" style="font-family:gulim;width:482px;"><tbody><tr><td style="font-size:14px;line-height:1.5;color:#333333;"> <table border="0" cellspacing="1" cellpadding="0" bgcolor="#666666"><tbody><tr><td bgcolor="#ffffff" style="font-size:14px;line-height:1.5;color:#333333;"><img src="http://www.shinmoongo.net/imgdata/shinmoongo_net/201503/2015032547455876.jpg" alt="" width="482" border="0" style="margin:0px;border:0px;"></td></tr></tbody></table><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2" style="width:484px;"><tbody><tr><td bgcolor="#999999" style="font-size:9pt;line-height:12pt;font-family:verdana, '굴림';color:#ffffff;letter-spacing:-1px;">▲     © 임두만</td></tr></tbody></table></td></tr></tbody></table><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1</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1973년 8월 8일,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의 지시를 받은 대한민국 정보요원들은 자국의 대통령 후보를 지낸 김대중을 도쿄에서 강제로 납치, 동교동에 대려다 놓는 ‘김대중 납치사건’을 일으킨 뒤 가택에 연금, 정치를 할 수 없도록 했다. 그랬음에도 김대중은 암암리에 활동하면서 김영삼을 신민당 총재로 만들고, 윤보선, 정일형, 함석헌, 문익환 등 재야 민주지도자들과 '민주회복국민회의'를 결성, 1976년 '3.1 민주 구국선언'도 주도했다.</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하지만 이를 기화로 박정희 정권은 김대중에게 긴급조치 9호 위반이란 죄를 씌워 구속했으며, 1977년 대법원에서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 형을 확정시켜 아예 공민권을 박탈했다. 그러나 1979년, 박정희는 심복 김재규에게 암살당했다. 이른바 10·26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었다. 당연히 김대중도 공민권이 회복되었다. 그리고 그해 12월 8일 드디어 가택연금에서도 해제되었다. 김대중은 이제 정치활동이 가능해졌다. 그래서 자신과 함께 민주회복 투쟁을 한 재야인사들과 함께 신민당 재입당의사를 밝혔다.</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그러나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이 이를 방해했다. 연금 중에도 김대중이 자신의 부탁을 받고 자파 대의원들의 숙소인 중국집 아서원에 잠입, 김영삼을 찍으라고 종용한 때문에 이길 수 없었던 선거를 이겨 당권을 잡은 김영삼이 암묵적 대권 경쟁자인데다 이미 전국적 거물인 김대중이 공민권을 회복하자 버거워 했다.</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그래서 치졸한 방법으로 정치활동을 방해했다. 자당의 대통령 후보를 지낸 김대중의 재입당을 심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는 김대중을 사실상 당에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김대중은 신민당의 재입당을 포기했다. 김대중 김영삼의 첫 번째 이별이었다. 1980년 서울의 봄이 한창이던 때의 일이다. 그리고 그 이별의 이유는 김영삼의 치졸한 방해공작이었다. 그랬음에도 당시 언론들은 이를 깊이 분석하거나 하지 않았다. 입당하지 않고 장외에서만 활동한다고 ‘다른 뜻’이 있는 것으로 몰아갔다.</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2</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1980년 5월 17일, 5.17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이 모든 정당을 해산시켜버렸다. 이후 1980년대는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김대중에게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한 고난의 시간이었다. 김영삼도 물론 고난의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영삼이 당한 고난은 정치규제와 가택연금 정도였지만 김대중은 사형수가 되었다가 망명객이 되는 등 인간으로서 상상하기 힘든 갖은 고난을 겪었다.</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전두환은 미국 조야의 끈질긴 요구에 굴복 김대중을 사형시키지 못하고 사형수의 몸으로 형집행정지자로 만들어 미국으로 추방(?)했다. 그리고 3년, 미국에서 조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활동하던 김대중은 목숨을 담보할 수 없다는 전두환 군부정권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1985년 2.12 총선을 앞두고 귀국했다.</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후세의 역사가들은 어떻게 기록할지 모르나 1985년 2.12 총선에서 신한민주당의 승리, 이어진 1987년 6월 항쟁의 민중 승리에는 김대중의 귀국 후 활동도 대대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나는 본다. 그리고 김대중은 6월 항쟁 승리 후 사면복권이 되므로 공민권이 회복되었다.</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공민권이 회복된 김대중은 그해 8월 8일 통일민주당사에서 입당식을 갖고 통일민주당 고문에 취임했다. 1977년 대법원의 형 확정판결 후 잃어버린 공민권 때문에 함께 잃었던 당원 자격을 무려 10년 만에 찾은 당적 회복이었다. 그랬음에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입당 후 2개월 만인 1987년 10월 18일 통일민주당을 탈당했다. 김영삼과 두 번째 이별이었다.</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왜 그랬을까? 이유는 지금도 분명하다. 그때도 김영삼이 탈당의 근거를 제공했다. 다시 말하면 김영삼이 김대중에게 자기 밑으로 오던지 탈당하던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부추겼다.</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6월 항쟁 성공 후 김대중을 따르던 재야 활동가들은 김대중의 통일민주당 조기 입당에 대해 반대했다. 아무 대책없이 들어가면 이미 당 대의원을 완전 장악하고 있는 김영삼의 거수기가 된다는 이유였다. 따라서 들어가더라도 일정한 세력균형이 될 수 있는 세력과의 동반입당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복권되면 통일민주당에 입당하겠다”고 약속했으므로 일단 입당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8월, 그 약속대로 입당했다.</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이후 김대중은 김영삼 등 통일민주당 당권파에게 “재야에서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고생한 사람들에게 통일민주당이 응분의 댓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요구했다.</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당시 통일민주당은 전국의 37개 사고지구당이 있었다. 이 지구당 위원장 자리를 재야활동가로 민주화 투쟁을 했던 인사들에게 할애 하라는 요구였다. 하지만 김영삼은 “헌법을 개정하고 대통령 선거를 치러야 하는데 당이 사고지구당 위원장을 선정하는 조강특위를 가동하면 분란만 생겨서 대선에 도움이 안 된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이유는 이렇지만 단일후보를 위해 당에서 대선후보 경선을 하자고 하면서도 상도동계가 현격하게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지구당 위원장 세력을 깨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즉 김대중에게 우호적인 재야인사들이 37명씩이나 지구당 위원장이 되면 대의원 분포도가 동교동계와 비슷해지므로 경선승리가 어렵기 때문에 자신이 우위인 판을 깨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결국 김대중계는 이런 김영삼과 상도동계의 계파 우월주의에 승복할 수 없었다. 거기다 김대중 곁에 있던 동국대 황태연 교수 같은 이는 4자필승론을 주장하면서 김대중 측근들을 탈당 쪽으로 유도했다. 결과는 입당 2달 후 탈당이었다. 그러나....이런 내막과 상관없이 당시 김대중이 받았던 숱한 비난세례는 끝내 그가 대선에서 3등을 해야만 하는 굴레가 되었다.</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왜일까? 거제 어선재벌(?)의 아들인 김영삼은 외적으로 서울대 출신이다. 또 국내에 있었다. 그리고 때마다 기자들을 촌지나 심지어 멸치선물로 관리하는 등 ‘김영삼 장학생’도 키웠다. 반면 김대중은 1973년 납치당하여 연금된 뒤, 모든 활동을 금지 당했고 끝내 감옥을 갔다. 전두환 정권에선 사형수로 청주 교도소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미국에 추방되어 망명객 생활을 했다. 거기다 근본적으로 호남, 특히 목포출신의 상고 졸업이었다. 이런 김대중을 SKY를 졸업하고 이른바 ‘언론고시’ 통과했다는 엘리트 의식이 강한 기자들은 은연 중 무시했다.</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그래서 이 이별에 대해 모든 미디어는 김대중을 비난했다. 사실상 이 두 번째 이별도 김영삼이 근거를 제공했으나 그에 대한 메스컴의 분석이나 비판은 없었다. 단시 탈당하고 신당을 창당한다는 김대중을 ‘분열의 아이콘’으로 만드는데 혈안이 되었다.</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3</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1992년 12월 18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또 실패했다. 실패한 김대중은 다음 날인 19일에 정계 은퇴 성명을 발표하고 정계를 은퇴했다. 그리고 1993년 1월 영국으로 출국하여 케임브리지 대학교 객원교수로 활동하다가 1993년 7월 귀국했다. 귀국 후 곧바로 아태재단을 설립하고, 상임공동의장에 취임했다. 언론은 다시 김대중의 정치재개를 조심스럽게 점치기 시작했으며 끝내 김대중의 정계 복귀가 가시화 되었다.</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하지만, 1995년 6월 27일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서울시장선거의 승리 등 일정한 성과를 내자 당권을 쥐고 있던 이기택 등 당권파가 김대중의 정계복귀에 대해 극렬 반발했다. 결국 여기서 김대중의 두 번째 탈당이 이뤄졌다. 이는 또 엄격히 하면 영남세력과 세 번째 이별이었다. 그런데 이 이별도 따지고 보면 사실상 당시 민주당 당권파였던 당 대표 이기택을 비롯한 야권 내 영남세력이 근거를 제공했다.</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1990년 1월 22일, 김영삼은 전격적으로 노태우 김종필과 야합, 3당 합당이라는 정당 쿠데타를 감행했다. 그런데 이 쿠데타에 초선의원 노무현과 2선의원 김정길 등 부산출신 의원들은 가담하지 않았다. 또 4.19의 주역으로 김영삼 김대중 이후를 넘보던 부산출신 6선의원 이기택 통일민주당 원내총무도 장고 후 가담하지 않았다. 이후 이들 3인은 장석화, 이철, 박찬종, 홍사덕 등과 통일민주당 재건을 외치며 민주당을 창당, 활동했다. 이른바 지금도 꼬마민주당으로 부르는 정당이다. 이들 중 비영남 출신은 충남 홍성 출신인 장석화 뿐이다.</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1992년 대선 출마를 노리던 김대중은 거대 민자당을 두고 왜소한 야권으로 대항이 불가하다는 것을 인정, 이 꼬마민주당과의 합당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리고는 결국 의석 8석의 꼬마 민주당과 71석의 신민주연합당이 50:50지분으로 당대당 통합을 하는 양보를 했다. 공동대표가 된 이기택은 김대중을 대권주자로 인정, 당권이란 결실을 얻어냈다. 하지만 결국 김대중은 1992년에도 대권에 실패했다. 이기택은 김대중이 없는 야당의 1인자가 되었다.</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1993년 김대중이 정계를 은퇴하고 영국으로 출국한 뒤 김영삼 대통령의 마이웨이가 시작되었다. 하나회 해체, 금융실명제 전격실시로 부패한 정치자영업자들 퇴출, 전두환 노태우 구속 및 사형선고 등 우리 역사에서 누구도 해내기 힘든 엄청난 거사들을 해치우면서 지지율 90%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거의 당연하게(?) 야당은 있으되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잘 나가던 김영삼의 질주를 제어할 수 없었다.</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김영삼은 하나회 해체, 금융실명제 전격실시로 부패한 정치자영업자들 퇴출, 전두환 노태우 구속 및 사형선고 같은 역사의 선순환 작업만 이끈 것이 아니었다. 박정희 전두환과 같은 1인 통치의 제왕적 대통령에 군림하는 역사의 악순환을 재개했다. 또 당시 세계사적 조류였던 동구공산권 퇴조로 인한 소비에트연방 해체 등 국제정세 급변에 편승, 노태우가 이룩한 북방외교의 선순환을 ‘북핵’이란 고리로 남북관계를 단절로 몰아간 악순환도 가져왔다. 내치도 시간이 가면서 장학로 홍인길 등 청와대 핵심들이 연관된 권력형 부정비리가 드러나기 시작했으며 급기야 ‘소통령’이 회자되었다.</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당연히 야당과의 관계는 매끄러울 수가 없었으나 야당은 무기력하기만 했다. 야당 대표가 여야 영수회담을 요구하자 대통령이 “기택이 갸가?”라고 반응했다는 설은 설이 아니라 공공연한 진실이었다. 이때 김대중은 귀국 후 아태재단 이사장으로 정계복귀가 자주 거론되었으며 급기야 1995년 1회 전국 지방선거를 앞두고 현실적으로 점쳐지기 시작했다.</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실제로 김대중은 이기택 총재에게 사울-조순, 경기-이종찬을 천거하면서 자신이 단식으로 얻어 낸 지방선거의 승리를 꿈꿨다. 그러나 이기택은 이런 김대중의 개입이 자신의 당권을 무시하는 것이라며 반발, 서울은 승리가 확실하여 이견의 여지가 없는 조순을 받아들였으나 경기는 끝까지 자신의 고집을 관통, 자기계보의 장경우를 공천했다.</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결론부터 말하면 이 선거는 민주당의 압승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기택의 고집으로 경기지사를 빼앗기면서 민주당은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등에서 승리했으나 광역 단체장을 호남권 3석과 서울을 포함 4석에 그쳐, 압승이란 표현을 받아내지 못했다. 당시 여당이 영남권 3석(경남북 울산...대구는 무소속 문희갑 후보 당선)과 경기 인천 등 5석을 얻은 때문이었다.</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이때 김대중과 이기택의 갈등은 봉합할 수 없는 수준까지 갔다. 언론은 김대중이 다른 지역 유세는 다 다니며 매우 적극적이었는데 정작 경기도 유세에는 다소 소극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니 이런 보도에 이기택이나 그 계보가 섭섭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1995년 7월 18일, 김대중은 정계복귀를 선언했다. 이어서 민주당 사수를 주장한 야당 내 영남주류 세력을 제외한 의원들이 탈당, 김대중 신당에 가입했다. 김대중은 이 탈당파들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이때 김대중 반대파(사실상 영남 개혁세력이라고 스스로들 주장하는)들이 김대중에게 했던 악담들은 지금 다시 거론하기에도 부적절하다.</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그들의 내심을 솔직하게 표현하면 “만약 총이 있으면 쏴 죽이고 싶은 마음이 선연히 보이는 악의에 찬” 그런 비난들이었다. 정작 제1야당에 자리를 내줄 수 없다고 강경한 방어막을 친 쪽은 이기택을 비롯한 당권파( 야권 내 영남주류)였음에도 탈당하고 신당을 차린 김대중은 ‘분열주의자’로 낙인을 찍으며 광분했다.</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 </p> <p style="margin:0px;padding:0px;font-size:14px;line-height:25.2000007629395px;font-family:gulim;color:#333333;text-align:justify;">그러나 김대중은 이런 비난들을 다 감수하고 정면승부를 택했다. 그리고 끝내 대한민국 건국 이후 최초로 투표를 통한 전권교체를 이뤄 낸 역사를 썼다. 임기 중 남북간 정상이 만나 평화를 노래하고,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탈당’이라는 정치행위를 하면서 숨도 쉴 수 없을 정도로 갖은 비난을 받아야 했던 김대중이 일궈낸 결과물이다. 이뿐인가 후계자 노무현에게 정권이 이어지도록 정권재창출에도 성공했다. 김대중이 단행한 두 번의 탈당은 야당 정치권의 변혁은 물론 정치지형의 변화도 불렀다. 그리고 역사의 물줄기도 바꿨다. 이게 팩트다.</p></div> <div><br></div>

    이 게시물을 추천한 분들의 목록입니다.
    [1] 2015/03/25 22:09:30  182.172.***.39  미스터부기  158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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