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0.<br>시커먼 하늘에 실눈 뜬 달은 눈길을 내리찍으며 껄쩍인다. 간간히 은빛 바람이 콘크리트 건물사이를 내리 앉았으며 사람들은 미동도 않는다.<br>쭉 뻗은 도로에 간간히 박힌 가로등 몇 개가 사람들을 비쳤으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몸도 천때기로 둘둘 감추어 놓았다.<br>어디선가 고양이 우는 소리가 울린다.</div> <div> </div> <div>1.<br>잠은 끝내 오지 않는다.<br>아마 저 너머 침대 위의 구멍난 필통 때문일 것이다.<br>발목째 뽑힌듯 발바닥은 시렸으나 떨리진 않다.<br>눈은 의무감에 사로잡혀 이리저리 굴러 하늘높이 날라가 버린다.<br>하늘은 추웠다. 12월의 마지막 주였다.<br>스위치는 손에 닿았으나 누르지 않는다. 보온병을 하얀색 머그컵에 따른다.<br>피다!<br>동물의 육신을 고아낸, 진하디 진한 물이다!<br>그녀는 속을 게운다. 께림직한 소리가 울린다.<br>손은 보나마나 빨갛다. 컵 사이로 시뻘건 폭포가 떨어진다. <br>떨어트린다.<br>그와 동시에 바닥엔 반듯한 금이 가고 그대로 접히기 시작한다. 그녀는 추하게 사기 유리 덩어리에 엉덩방아를 찧었으며 중력에 의해 싱크대 구석으로 굴러간다.<br>쿵 소리와 함께 경고하는 '삐삐-'소리가 났으며 심장은 진동하기 시작한다.<br>저 멀리서 어떤 늙은 사내가 우는 목소리로 부르 짖는다.<br>그러나 그녀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검은 고양이는 그녀의 귓등에 다가와 "아가야, 저기를 보아라." 라 속삭인다.<br>거기엔 필통안에 있던 갈비뼈 속의 새파란 눈이 나를 노려본다.<br>숨이 안 쉬어진다.<br>다리는 무서워서 도망을 치고 싶어한다.<br>억센 나뭇가지가 끊어지는 소리가 울리며 무릎 연골이 부서진다. 그대로 종아리는 방 밖으로 도망친다.<br>몸이 너무 춥다. 감기인 것 같다.<br>그녀는 넓찍한 침대 위로 올라갔으며 잠을 청하기 위해 벽에 걸려있는 빳빳한 머플러로 목을 베고 칭칭 감아 눈을 감는다.<br>늙은 사내는 기어이 기어와 그녀의 다리를 잡으려 안간힘을 쓴다.<br>잠깐 몸이 덜덜 떨리나 싶더니 이어 그녀의 소원대로 꿈속에 깊히 빠진다.</div> <div> </div> <div>2.<br>그녀는 일어나며 머리를 찧는다.<br>한 번은 모자랐던 것일까?<br>다시 머리를 더욱 힘차게 쿵 박는다.</div> <div> </div> <div>3. <br>그녀는 침대 위에서 일어나며 이번 달 동안 컨디션이 저조했음을 인정한다.<br>보았던 끔찍한 일들이 눈에 아른거린다.<br>이럴 바엔 차라리 죽는 게 낫다.<br>거지 같은 악몽이다.</div> <div> </div> <div>4.<br>의문스럽게도 누워 있던 자리에 필통이 있었다.<br>잠꼬대는 심한 편인 것을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br>그녀는 배에 살이 찐 것을 자각한다. 필통은 배에 눌려 속에 있던 것이 비집어 나와 있다.<br>배로 필통을 터트린 것이다.<br>세상에.</div> <div> </div> <div>5.<br>깜짝이야!<br>배에는 피가 흥건하다.<br>그녀는 눈을 뜨고 처음으로 빨갛게 물든 옷을 인식한다.<br>놀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다.</div> <div> </div> <div>6.<br>그녀는 체리 매니큐어를 닦아낸다.<br>수건으로 박박 문질러 댔으나 지워지진 않는다.<br>짜증이 확 달아오른다. 신경질 적으로 빨간 병을 던진다. 깨지진 않는다.<br>피곤에 모든 것을 미루고 잠을 청한다.<br>될 대로 대라.</div> <div> </div> <div>7.<br>시계를 던지고 문을 쾅 닫는다. <br>시끄러. 짜증나니까 꺼져버려.</div> <div> </div> <div>8.<br>상당히 늦은 시간이다.<br>밖은 칠흑같은 어둠이 끼어 있다.<br>그녀의 아빠는 거실에 앉아 그녀가 문을 열고 오자 무슨 일 있었냐며 온다.</div> <div> </div> <div>9.<br>괜찮아.<br>별일 아니야.<br>그녀는 나지막히 혼잣말 하듯 웅얼거린다.<br>울리는 두통을 참으며 주먹을 꽉 쥔다.</div> <div> </div> <div>10.<br>그녀는 피시방에 가서 선불로 자리를 잡는다.<br>사이트에서 자신의 등급을 계산한다.<br>숫자는 손가락 개수를 넘어간다. 전부 글러먹었다.</div> <div> </div> <div>11.<br>다 그놈때문이다.<br>자신과 같은 반인 그는 항상 자신을 이따금씩 보는 것 같았다.<br>얼굴은 반반하고 어깨가 넓직한게 참 다부졌다.<br>이번 3학년때 처음으로 같은 반이 되어 알게 됬고, 항상 웃으며 다가와서 바로 친해졌으나 꼴랑 낚인 꼴이 되었다.<br>너 때문에.<br>그녀는 이를 박박 간다.<br>이대로는 대학 진학도, 앞으로 미래도 힘들거야.<br>스스로 자책하며 주저 앉으나 이내 다시 벌떡 일어나 달려 간다.</div> <div> </div> <div>12.<br>그녀는 공터로 간다.<br>공터에서 마냥 뺑뺑 다섯바퀴 넘게 돌았으나 누구도 오지 않는다.<br>그네를 타며 찬 바람을 느낀다.<br>맑은 콧물이 질질 흐르지만 닦지 않는다.</div> <div> </div> <div>13.<br>가던 도중에 친구한테 늦게 메일이 온다. <br>누군가 시험 중에 나갔다고 하는데 학교에서는 애들이 난리도 아니었다 한다.<br>참 웃지기도 않는 일이다.<br>그 사람이 누군지도 본인이 모르면서 나한테 한단 말인가.</div> <div> </div> <div>14.<br>앉아있던 자세를 고치고, 그녀는 일어서서 빨리 자리를 뜬다.<br>또 두통이 도질 것만 같다.</div> <div> </div> <div>15.<br>두통은 느닷없이 영어 듣기 시간에 왔다.<br>첫 번째 문제부터 명랑한 여자의 목소리에 구토감이 밀려왔다.<br>입 밖으로 새나오는 욱 소리에 주변 애들이 힐끔 쳐다 보았다.<br>목을 감싸고 머리를 찬찬히 뉘었으나 소용 없는 짓 같다.<br>기분은 엉망이다.<br> <br>16.<br>그는 바로 옆 반이다.<br>그는 점심 시간이 되자 와서 무슨 일 있냐며 물어 본다.<br>그녀는 저절로 배시시 웃는다.<br>아니? 없는데?<br>말이없다.<br>되려 이리저리 말을 하니 멋쩍은듯 웃지를 않는다.<br>그의 팔을 툭 치며 준 커피 잘 먹었다 하니 그렇냐며 슥 가버린다.<br>그녀의 볼이 발그랗다.<br>새끼. 쑥쓰러워 하긴.</div> <div> </div> <div>17.<br>그녀는 아직도 떨리는 마음으로 국어 문제를 교실에서 풀어 나간다.<br>얼풋히 그의 눈매가 참 날카롭다고 생각한다.<br>사람의 감정이란 참 묘하고 애매한 것이다.<br>문제를 다 풀고 시계를 보니 10분이 남아 그의 반반한 얼굴을 어루만지는 생각을 한다.<br> <br>18.<br>학교 교문 앞에 사람들이 북적인다. 학생들이 미꾸라지 마냥 슥슥 지나가는 사이로 그녀는 같이 끼어 들어간다.<br>그때 그는 그녀를 붙잡는다.<br>그는 커피를 들고 마시라며 건네 주고 간다.<br>그녀는 그가 주는 커피라면 언제든 받아 마실 것이다.<br>커피가 따뜻하다.<br>그녀는 손을 둘러 녹인다.</div> <div> </div> <div>19. <br>집 안에서는 그녀가 사랑하는 고양이 새끼 한 마리가 있다.<br>태어난지 몇달도 안되어 주먹만하며, 눈을 뜬지 몇 일도 안 됬다.<br>그녀는 작은 고양이 새끼를 길거리에서 주웠으며 강한 애착심을 느낀다.<br>아마 제 애미에게서 버림을 받은 모양이다.<br>이 생각에 그녀는 새끼에게서 동질감을 느끼고 엄마 처럼 애를 아꼈다. <br>그녀의 아빠는 요 근래 다리를 다쳐서 걷지도 못하여 누워 있는 통에 고양이를 신경 쓰지 않는다.<br>단 아빠는 내일이 수능인 딸이 고양이에게 정신이 팔려서 시험을 망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든다.<br>그녀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br>이 고양이는 그녀 스스로에게 복을 물어다 줄 고양이라고 생각하며 수능 전날의 운 좋은 네잎클로버 같은 기분이 든다<br>둥글둥글한 외관에 시험 성적이 오르라는 뜻에서 그녀는 고양이에게 '필통'이라는 이름을 붙인다.</div> <div> </div> <div>20.<br>그녀는 고질적인 조울증을 겪었다.<br>감정기복이 매우 컸는데 그녀의 선천적인 정신 질병이 한 몫을 했다.<br>몇 년간 살아오며 그로인해 어려움이 많았고, 마찬가지로 수능 전날인 그녀는 매우 떨린다.<br>허나 그녀는 좋아하는 그와 '필통'이 있기 때문에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장담한다.</div> <div> </div> <div>21.<br>거꾸로 읽으라.  </di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