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같이 더운 날엔 가끔 하교길이 두렵다. 난 자전거로 통학하기 때문이다.
버스를 타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을 수 있겠지만, 우리 집 까지의 버스 노선은 하필이면 동네를 한바퀴 빙 돌았다.
차라리 자전거를 타는 게 훨씬 빠르다는 것과, 땀을 쭉 빼고 샤워를 하는 게 에어컨 바람에 땀이 말라 찝찝한 것보다 훨씬 낫다는 걸
몸소 체험한 뒤로 비가 오는 날이 아니면 되도록 자전거를 이용한다.
등교길에 땀이 나면 학교에서 찝찝하지 않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집이 산 근처에 있다보니 학교까지 가는 10분 동안은 계속 내리막길이다.
하지만 그 말은 반대로 하교길은 계속 오르막이라는 뜻이다. 내가 하교길을 특히 두려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래서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자리를 지킨다. 해가 떨어진 후에 집에 가는 게 그나마 버틸만 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선생님들께 눈도장을 찍으며 성실한 학생으로 자리매김했지만 차마 나는 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 3시간 반 동안 머리를 휘청이며 리듬을 타는 거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며칠 전 그 날도 굉장히 더운 날이었다. 신호등에 걸려 잠시 멈춰서 있었다. 건너편 횟집 수조 속 물고기는 배를 뒤집어놓고 있었다.
저 아이는 더워서 저러는 것일까 아니면 곧 뼈와 살이 분리될 자신의 운명을 알기에 주인 말 잘 듣는 강아지로서의 인격을 구현시켜 그를 방패삼아 암담한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해리성 성격장애를 앓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으나 역시 가장 강하게 나를 사로잡은 생각은
이렇게 더울 바에야 차라리 저 수조 속의 물고기가 되고 싶다는 망상이었다.
그러나 곧 횟집 주인의 뜰채에 건져져 제대로 퍼덕거려보지도 못한 채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녀석을 보며 역시 배부른, 아니 시원한 물고기보단 땀흘리는 소크라테스가 낫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 신호등이 푸르게 빛났고 나는 다시 페달을 밟았다.
집까지 남은 5분 정도의 길을 올라가며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물이었다.
슬픈 그 아이가 몸을 맡겼던 수조 속 물 부터 이슬이 송골송골 맺힌 유리잔과 몇 년 전 놀러갔던 바다와 계곡까지.
물에 대한 여러 이미지가 구글 이미지 검색처럼 머리를 가득 채웠다. 정작 구글 이미지 검색에서 검색했던 결과는 농익은 살구빛이 제일 많았겠지만.
어쨌든, 그 물들의 이미지 중 단연 으뜸은 폭포였다. 폭포는 나에게 조금 특별한 존재이기도 했다.
아주 어릴 적 제주도에서 천지연 폭포를 보았다는 말을 듣고 기억이 안난다고 했더니 자식새끼 좋은 데 데려가봤자 득될 거 하나 없다는 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었던, 과연 어머니는 변도 못가리는 12개월짜리에게 폰 노이만의 기억력을 기대하셨던건지 의문을 품게 했던 게 폭포다.
초등학교 시절 티비 광고를 보고 세계 3대 폭포가 빅토리아 폭포, 나이아가라 폭포, 이과수 공기청정기라는 발표를 해 어린 마음에도 상업주의의 끝없는 소비 강요와 그 속에 나타나는 인간성 상실에 깊은 회의감을 느끼며 눈이 풀릴 때까지 야구르트를 들이붓게 했던 것도 폭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윗옷이 소금기를 머금고 턱 끝에서 물방울이 아롱져 떨어지는 지금 폭포는 더할 나위 없는 시원함의 극치였다.
그 때 였다. 옆에서 폭포 소리가 들렸다. 쏴아- 하고 떨어지는, 청명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12개월 때 들었던 천지연의 웅장함을 떠올리게 했다. 결국 내가 틀렸던 거다. 인간은 유아기의 정보도 기억해낼 수 있었다.
역시 엄마 말은 틀린 게 없다는 교훈을 가슴에 새기며 나는 소리의 근원과 마주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그 근원은 호스였다. 호스는 호스였으나, 평범한 호스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의 호스, 그러니까... 남자라면 하나씩 휴대하고 다니는 그 호스였다.
그것은 한 마리의 어린 짐승. 술에 취한 중년 아저씨의 서느런 바짓자락에서 나온 그것은 열로 상기한 물을 말없이 쏟아내는 것이었다.
트럭 그림자 뒤에서 몰래 해결하시려 하셨던 듯 하지만, 복분자주라도 드셨는지 힘차게 솟아오른 물줄기는
그림자 바깥까지 날아갔고 가로등 불빛을 받아 환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그 물줄기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상쾌함은 사라지고 찝찝함은 오래 갈 거야.
말없이 고개를 돌려 페달에 박차를 가했다. 그것은 더 이상 쏴아-가 아닌 쪼르르... 소리를 내며 멀어져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