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 게시판 |
베스트 |
|
유머 |
|
이야기 |
|
이슈 |
|
생활 |
|
취미 |
|
학술 |
|
방송연예 |
|
방송프로그램 |
|
디지털 |
|
스포츠 |
|
야구팀 |
|
게임1 |
|
게임2 |
|
기타 |
|
운영 |
|
임시게시판 |
|
명의 쇠락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우선, 1572년 황위에 올라 1620년에 사망한 만력제(신종)의 통치 시대로 돌아가 보자. 일반적으로 말하는 것과 달리, 명의 쇠락이 만력제의 결함 때문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만력 연간에 발생한 두 차례의 환경 위기가 그러한 큰 그림에 해당한다.1586~1588년에 발생한 첫 번째 ‘만력의 늪’은 정권 자체를 마비시켰다. 그 늪은 사회 재난의 새로운 기준이 될 정도로 엄청난 환경 차원의 ‘붕괴’였다. 그러나 명나라 조정은 이 재난을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는데 이는 1580년대 초반부터 장거정이 시행했던 국가재정에 관한 개혁 덕분이었다. …… 그리하여 장거정이 1582년 사망할 때 국고에는 은이 넘쳐났다. 이렇게 보유한 자금 덕분에 만력제의 조정은 1587년 폭풍처럼 밀어닥친 자연재해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었다.......20년이 지난 1615년, 두 번째 '만력의 늪'이 발생했다. 이번 늪이 있기 2년 전부터 북부 중국 전역에서 홍수가 지속되었고, 2년째 되던 해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면서 추워졌다. …… 1616년 후반기에 기근은 북부중국에서 양쯔강 유역으로 파급되었고, 이어서 광동성을 덮쳤다. 최악의 사태는 1618년 이전에 종결되었지만, 이후에도 만력제의 마지막 2년 동안 가뭄과 메뚜기 떼의 약탈이 끊이지 않았다.......만력 연간의 기근으로 고통 받은 이들은 명나라 뿐만이 아니었다. 이 시기 북부 중국을 강타한 가뭄은 요동으로도 확산되었다. 요동은 이후에 만주로 알려진 만리장성의 동쪽 끝 부분에 해당한다. 바로 이곳에서 여진족의 지도자 누르하치가 여진족과 몽골족 사이에 전례없이 폭넓은 동맹관계를 형성해냈고, 이 동맹은 1636년 마침내 '만주'라는 새로운 민족의 칭호를 탄생시켰다.
죄송합니다. 댓글 작성은 회원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