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0월 10일 국민회의가 발표한 신당추진위원회 영입인사 25명의 명단을 보면 전․현직 관료와 학생운동권 출신의 386 세대 ‘젊은 피’가 뒤섞여 있는데,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영남 출신이 9명이나 들어 있다는 점이었다. DJ의 ‘동진(東進) 의지’를 새삼 확인시켜 준 대목이다. 2000년 국회의원 총선에서 국민회의가 영남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둘지는 두고봐야 하겠지만, 나는 이번에도 그 전망이 그리 밝지는 않다고 본다. 영남 지역의 ‘반DJ정서’가 크게 약화될 조짐이 없기 때문이다.
영남 지역의 ‘반DJ정서’는 일종의 집단적인 정신질환이다. “왠지 싫다.” “때려죽어도 싫다.” “싫은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노.” 이렇게 나오는 데는 어떤 사실관계를 제시해도 소용이 없고 어떤 논리를 내놓아도 통하지 않는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이루어진 외환위기 책임 규명과 공직자 부정부패 척결 과정에서 영남 출신 몇몇 정치인들이 사정의 도마에 오르자 문제의 ‘TK정서’가 또다시 꿈틀대기 시작했다. 다음은 1998년 9월 『뉴스플러스』에 기고했던 글인데, 하도 열 받아서 홧김에 쓴 것이다.
이른바 ‘TK정서’가 또다시 정치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이번엔 선거가 아니라 구 여권 인사들의 개인비리가 쟁점이다. 전두환 시대 이후 20여 년 간 집권 여당의 실력자로서 부귀영화를 누렸던 인물들이 두 주먹 불끈 쥐고 연단에 올라 ‘대중 독재’를 규탄하고 자신이 현 정권의 ‘TK죽이기 음모’의 희생양이라고 외치는 장면은 그야말로 한 편의 ‘블랙 코미디’다.
대구․경북의 유권자들은 내란과 국헌 문란의 주모자이자 5공 독재의 2인자이자 노태우씨를 대통령으로 만들었다. 나라 경제를 말아먹은 김영삼씨에게 몰표를 준 것도 그들이다. 그래 놓고 1997년에는 김영삼 씨를 화끈하게 욕했다는 이유로 ‘고향사람도 아닌’ 이회창 후보에게 70%의 몰표를 던졌다. 그리고 지금 개인비리 혐의로 감옥 문 앞에 선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은 또다시 대구․경북의 지역정서를 흔들어 깨운다. 아무리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도, 아무리 무능한 정치가라도, 전혀 검증받지 않은 정치 초년병이라도, 김대중과 싸우시만 하면 무조건 밀어주는 ‘TK정서’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분명히 말해야 겠다. 나는 대학에 들어간 후에는 주로 수도권에 살았지만,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서 대구에서 자란 ‘토종TK’이고, 그래서 문제의 ‘TK정서’에 대해서는 알 만큼 안다. 오매불망 대구․경북에 기반을 만들려는 국민회의나 혹시라도 벌집을 건드릴까 조심조심 돌려 말하는 지식인들의 처지를 이해는 하지만, 그래 봐야 백년하청이니 차라리 깨놓고 말하자.
‘TK정서’는 허위의식이다. TK는 자기네끼리 모이면 이렇게 말한다. “전라도를 보라. 얼마나 비옥한 땅인가? 비탈 뿐인 경상도에서 단군 이래 찢어지게 없이 살다가 겨우 한 30년 쫌 산다 싶게 살았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냐?” 그런 이유로 대구․경북이 영원토록 권력을 잡아야 한다니, 강원도나 충청도 사람들이 들으면 큰일날 일이다. 그래서 남들 앞에서는 절대로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김대중이는 빨갱이다.” “전두환은 딱 한가지, 김대중 살려놓은 것 빼고는 다 잘했다.” 선거 때마다 대구․경북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진 선동의 핵심 내용이다. 대구․경북 유권자들은 이제 자신들이 독재자와 그 앞잡이들에게 속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솔직하게 인정하고 미안해하기보다는 “김대중이 빨갱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쁜 사람이라는 것은 맞다”면서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더 많다. 좋게 말하면 자존심이지만, 사실은 죽어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특유의 벽창호 기질 때문이다.
“맞은 놈은 뻗고 자도 때린 놈은 오그리고 잔다.” 맞고 들어오는 아이들을 위로하는 말이다. TK정서의 밑바닥에는 ‘때린 놈 콤플렉스’가 깔려있다. 특히 독재 정권에 빌붙어 출세를 했더나, 뇌물과 특혜를 주고 받았거나, 패거리를 지어 남에게 못할 짓을 한 ‘TK성골’과 ‘진골’일수록 이런 콤플렉스가 심하다. 개인적으로 나쁜 짓을 한 적이 없는 대다수의 대구․경북 유권자들도 지역사회에서 이런 사람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기 때문에 이 콤플렉스에 감염되었다.
대구 두류산 공원 한나라당 집회에 3만 명이 모인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가듯, 아무리 영락한 신세지만 ‘TK성골’과 ‘진골’의 동원력이 아직 그 정도는 된다. 대구․경북의 ‘고향사람’들에게 호소한다. “김대중이 되면 대구 사람 다 죽는다”고들 했는데,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죄 없이 죽은 대구 시민이 하나라도 있는가?
DJ가 하는 일이 다 마음에 들지 않기는 나도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대구․경북이 범죄자의 도피처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정부여당의 실세까지 포함한 철처한 부패척결을 요구하되, 나라야 어찌 되든 ‘TK정서’라는 괴물의 잠을 깨워 일신의 생존을 도모하는 부패 정치인들의 선동에는 휘말리지 말자.
정면 승부해야 할 TK 정서
이 글이 나가고 나서 걱정하는 전화를 많이 받았다. “그러고도 고향에 갈 수 있느냐?” “혹시 테러라도 당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런 소리를 막 하느냐?” 대충 그런 이야기였다. 하지만 걱정 마시라. 이런 걱정하는 분들도 ‘TK정서’를 크게 오해하고 있다. 대구․경북 사람들이라고 ‘무뇌아(無腦兒)’ 일리가 있는가. 그 사람들도 다 나름대로 생각이 있다. 그 놈의 ‘반 DJ 정서’만 빼면 다 정상적인 인간들이다.
집안의 족보에 따르면 나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방문하는 통에 국제적으로도 유명해진 ‘하회마을’을 본향으로 가진 몰락한 유림의 떨거지다. 하지만 나는 안동을 비롯한 영남 지방의 보수적인 유림문화를 싫어하는 ‘반골TK’다. 같은 경상도라도 내 출생지인 경주 사람들은 비교적 유순하지만 청소년기 10년을 산 대구 사람들은 목소리가 크고 성격이 급하며 충동적이고 고집이 세다.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는 극우적 교시가 잘 먹히는 것도 이런 성격 때문이다. 또 비뚤어진 경우가 많지만 적어도 주관적으로는 의협심이 강하다.
대구․경북 사람들도 ‘반DJ 정서’를 자랑삼지 않을 정도의 양식은 있다. 문제는 김대중이 아니라 꼬치꼬치 시시비비를 가리는 사람한테는 승복하기 싫어하는 자신들의 기질에 있다는 것도 알만큼은 안다. 그래서 나 같은 반골이 내놓고 김대중을 옹호해도 별종 취급은 하지만 ‘왕따’를 시키거나 ‘김대중 앞잡이’라고 비난하지는 않는다. 대통령 선거에서 기호 2번 선거운동을 하면, 그 사람이 동네 터줏대감이라도 ‘원래는 전라도 사람’이라고 뒤에서 쑥덕거릴 망정 면전에서 대놓고 그런 소리를 할 만큼 몰지각하지는 않다.
나는 ‘TK정서’가 정면 승부를 할 문제라고 본다. 감추고 구슬러서 마음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눈을 똑바로 보고, 큰 소리로 “김대중이 너한테 잘못한 게 뭐 있는데!” 이렇게 소리를 질러야 그나마 통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말이다. 문제는 오히려 사람들이 지레 겁을 먹고 정면 승부를 피한다는 데 있다. 예컨대 맨날 술 먹고 동네를 어슬렁거리면서 광주에는 실업자가 없다는데, 하는 따위의 흰 소리를 늘어놓는 자가 있으면 이렇게 면박을 줘야 한다. “그라모 퍼뜩 광주 가서 취직하지, 니 와 그리 놀고 있노, 임마!” 이렇게 해야 알아먹지, 그렇게 말하는 근거가 뭐냐고 논리적으로 따져봐야 말짱 헛수고다.
앞의 글에 대한 논평 가운데 제일 말이 안 되는 것이 “용기 있다”는 격려였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용감해서가 아니다. 내 자신이 TK이기 때문이다. TK들은 동향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테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제일 가슴 아픈 논평은 신문 기자로 일하는 호남 출신 친구의 말이었다. “넌 좋겠다. TK라서.” 자신도 나와 같은 생각이지만 호남 출신이라서 그런 말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지역감정 때문에 TK를 욕하는 거라고 남들이 비난할까 무서워서 못한다는 말이다. 서글픈 일이다.
그러나 다시 TK들에게, 특히 그 지역 출신 지식인들에게 요구할 수 밖에 없다. 남들은 욕 못한다니까, 우리가 나서서 그 문제의 TK정서, 부지런히 욕합시다.
출처 : 유시민, Why N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