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그녀에게 고백에 대한 답변을 들었다.
"좋은 사람이지만 그 이상은 아니에요. 지금처럼 계속 지내는 것은 욕심일까요?"
내 고백 뒤에 돌아온 답변은 배낀 것 처럼 똑같았다.
그 날 당황스러움에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는 그녀.
지난 3일간의 시간은 내 고백을 받을지 말지에 대한 고민이 아닌,
이 거절을 어떻게 전해야하는지에 대한 고민의 시간들이었던 것 같다.
연애 자존감이 없는 나는 고백하고 나서 이미 거절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실 머리 속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잘 되었을 때가 전혀 그려지지 않는다.
32년 평생동안 서툴고 이기적이었던 내 연애의 시간은 전부 합쳐 고작 4개월 남짓.
그것도 표면적인 기간이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 한 것을 떠올리는 것이 쉽지 않듯, 나에게 연애는 그런 것이었다.
저녁을 일찍 먹어둔 것이 다행이었다.
만약 그 대답을 먼저 들었더라면 아버지의 생신기념 가족식사에서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했던 저녁을 넘기기 어려웠으리라.
답변을 듣는 순간 내가 운전대를 잡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다행이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지진 않았지만, 헝겊에 물이 스며들 듯 천천히 슬픔이 차오르고 있다.
하필이면 이런 날 유감스럽게도 나를 만나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 와중에 갑작스런 현장대응으로 어쩔 수 없이 다녀와 내 방에 앉아 이 글을 이제서야 적고 있다.
나는 참 고지식하게도 운명같은 사랑을 믿는다.
그래서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시간이 몇 년동안이나 계속 되곤 한다.
6년, 4년, 8년의 누군가를 좋아했던 시간들.
내가 연인들을 부러워하는 이유는 애정어린 대화도 과감한 스킨십도 아니다.
만남, 헤어짐, 고백, 승낙, 거절의 시간들 속에서 자신의 인연의 짝을 만났다는 것이 부러운 것이다.
또 다시 나는 지금의 사랑을 잊는 데 많은 시간을 흘려보내며 힘들어 할 것이고, 운명적인 만남을 기다리다 새로운 인연을 만나게 되면 또 긴 시간을 혼자서만 좋아할 것 같다.
그냥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다 사그라들고를 반복하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 같다.
새로운 인연이 나타나 사랑을 하게 되고 행복하게 될 거라는 말.
실연의 상황을 극복하고 새로운 인연으로 행복하게 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기쁨이겠지만, 그러한 기회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주어지진 않는 것 같다.
지금처럼 좋은 오빠 동생사이로 지냈으면 좋겠다는 그녀.
당장 다음 달 있을 신년모임, 단체 여행에서 그녀를 마주할 자신이 없다.
그녀의 얼굴을 본다면 무너질 것이 애뜻한 내 마음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
당분간은 바쁜 상황으로 몰아 나를 채찍질 하며, 언젠가 내가 좋아하는 마음을 들키지 않고서 의연하게 그녀를 볼 수 있을 때 다시 나타나야 겠다.
사실 그녀를 다시 보기 편한 날이 올런지 잘 모르겠다.
어차피 지금 하던 일을 정리하려고 했기에, 1억이 넘는 빚에 대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멀리 떠나볼까 한다.
저 멀리 바다 끝이나 땅 끝에 서서 백사장에 넘실대는 파도에, 머릿결을 흐트리는 바람에 그녀를 두고 올 수 있을지도 모르니.
내일 또 아침 일찍 현장으로 나가야 하는 일 때문에 잠을 청해야 하지만, 아마 잠들기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절대 마셔서는 안되는 술이지만 오늘은, 아니 당분간은 술에 취해서라도 잠들어 보려고 한다.
어느 노래의 가사처럼 "영원히 잠 잘 수 있다면"이라는 생각을 해보지만, 내가 수습해야 될 일들이 많아 이내 그 마음조차 접는다.
오늘 밤은 유독 추운 것 같다.
그것이 꼭 날씨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잠시 후면 신년 카운트와 함께 보신각 타종이 울릴 것이다.
내 아픔은 지울 수 없으니, 종소리가 부디 순수한 미안함이 남아있을 그녀의 마음이라도 날려주었으면 좋겠다.
Happy New Year라는 말이 마음의 벽에 부딛혀 떨어지는 그런 2016년의 마지막 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