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면서 팟캐스트나 방송을 들으면서 일할 수 있는건
내가 하는 일의 몇안되는 장점중 하나다.
일을 한창 하노라면 차도의 차소리에
방송이 잘 들리지 않아 처음부터 다시 들어도
그 내용이 들었던 내용인지 아닌지 기억 못할 때도 있다.
일에 집중을 해서도 있겠지만
내용을 기억함에 있어 반복되는 사안이 아니면 깊게 생각하지 않고
넘기는 경우는 많다.
요 근례의 가장 커뮤니티들의 큰 화제중 하나는
혐오와 메갈 일베 따위등의 이야기이다.
혐오를 조장하고 퍼트리고 국민들이 담합하여 자신들의 이익에 밝아지지 못하게
막는 방법중 효과적인 방법이 분열이다.
식민지 통치를 하였던 대다수의 국가들이 그러하였 거니와
타국가가 강해지지 못하게끔 지속적으로 내부분열을 야기하는 것도
각국가의 숙명일 수 밖에 없다.
최근은 아니고 근몇달안에 들었던 방송중에 신넘버 쓰리라는 방송에 들었던 내용이 있었는데
당시 강남역 살인사건에 관련하여 여성들의 차별을 이야기 하고,
사회 분열과 혐오등에 대해 다룬적이 있었는데
사회자중 한명인 이용 기자가 말하길
사회가 지독히 시어머니 짓을 하고 있다며 아이를 보행기에 태워서 오르는 시간마저
배려 못해주는 사회에 대해 이야기 하였더랬다
하지만 사회가 어찌 여성들에게만 살기 힘들 세상일까.
차에 오르지 못하는 휠체어탄 장애인들에겐 안그러고
환자에겐 너그러운가?
난 그렇지 않다고 본다.
모든 약자와 수평적 대상에게 가혹한 것이 지금의 우리가 아닌가.
한국 사회는 예전부터 그러하였던 것이
발전하여 배려를 요구하는 사회가 되었기에 성토되고 나에게 자각을 요구하는 것인지
배려와 그 질척한 정으로 이해되었던 것이
각박해져 서로를 배려할 여유가 없어진 것인지 모르겠으나
내가 느끼는 사회는 전자라면 아직멀었고 후자라면 여유를 안가질 수록 본인에게 손해인 경우다.
21세기는 0.1프로의 부자들이 더욱더 편중되게 부를 차지하고
일자리는 줄 것이고, 시스템이 정비되지 않은 틈새에서 99%는 고통을 강요받을 것이다.
국민 대다수가 고통받는 것이 당연시 되는 사회는 지속되지 않는다.
또 그러한 사회가 지속되더라도 없는 사람은 또 없는 대로 그들만의 리그가 진행되지 않게
저항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매번 이사회는 어떠한 카르텔로써 그안에서의 안락함을 느끼고 싶어 실패했을 뿐.
다만, 서로의 이익의 증대만을 놓고 보더라도
대다수의 역할에서의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만을 바라보면 또 어떠한 답도 나오지 않는다.
대다수의 사람이 어떤 경우라도 노동자의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건만
개인의 이익과 집단의 이익을 반드시 반하는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스스로는 그 구렁텅이에서 조금 벗어날지 몰라도 그 자신의 자식의 안위는
다시 그 배려받지 못하는 구렁텅이의 안이다.
최근 성주 싸드와 관련하여서는 처음엔 비소만이 나왔다.
내안의 어떠한 분노와 짜증, 계급이율에 배반적인 모습에
토악질마저 나올듯 했다.
사실 지금도 그 내부의 분노는 그대로다. 80프로가 넘게 1번에 투표하였는데
내 지역에 혐오 시설을 설치하니 나쁘다는 발상이 무슨 발상인가싶다.
하지만 그들에 손을 건내야 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고통받는 소수의 고통을 분담하여 주고,
그 소외감에 다시 그 집단의 이익에 반하고 자신들의 이익에만 골몰하며
먹지도 못해 말라비틀어진 돼지의 시궁창에서 사람의 연대를 찾게 도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성주 싸드 문제가 일단락되면 그들이 또 다시
그래도 내 지역구 인물에 투표해야지 하며 또 1번을 투표할 지언정
그들에게 믿을만한 호구가 되어주는 것도 어찌보면 세상이 바뀌길 기대하는 사람들의 행동이어야 한다.
그것은 늦은 출근 시간 애를 태우며 눈치보는 새댁에게도,
휠체어를 끌며 연신 죄송하다는 장애인에게도 어딘가 아픈 환자에게도
어떠한 약자에게도 당연시 되야할 배려이고, 그들의 권리이다.
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일지언정
그들의 이익이 사회의 이익에 부합된다 판단한다면 그들이 눈을 돌리게끔
다른 이들에게도 배려할 수 있는 여유를 갖도록
우리가 배려하고 여유를 부려줄 수 있는게 어떤가 생각해본다.
다만....
아아... 지역주의 대체 몇십년의 지역주의란 말인지....
세상이 바뀌고 사람의 삶이 풍요롭길 원하지만
이 시대에 희망을 거는 것은 어쩜 이렇게 하루하루 난도질 당하듯 배신감이 드는지....
세상에 대한 기대는 접고 다만 내가 이땅에 태어난 이유로 나름의 티안나는 저항이라도 해본다고..
같이 없는 것들의 연대의 의무가 아니라
그냥 삶을 사는 생명체로써 나를 억압하고 시스템으로써 부당하게 착취하는 것에 대한
살아있고 자아가 있는 생명체로써의 당연한 저항이라고 생각하며
희망이 아닌 당연한 이치로써의 몸짓이라 했건만
스스로 배반감을 느끼고 사람에 희망을 갖다 실망을 반복하는 것은
나의 나약함 때문인지... 믿지 말자며 굳이 집단의 지성을 믿는 미련함 때문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