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쿠데타? 우리는 맨손이고 든 것은 촛불밖에 없다!!
장마의 막바지라서일까. 무겁게 내리누르는 공기와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지열에 머리가 멍해진다. 언제인가 부터 서울에 도착하면 이명과 코막힘, 그리고 따가워지는 눈 때문에 곧잘 기분을 잡치곤 한다. 매번 느끼지만 서울은 참 큰 도시다. 차로 이동할 때는 스쳐지나가지만 걸어보면 실감이 절로 난다. 서울 시청에 들러 잠시 회한에 잠겼다가 청계광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찍 서둔 탓에 시간도 남았지만 스치는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보고 싶어서다. 아니 묻고 싶은 게 있어서다.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이 사회는 정상인가" 라고...
잰 걸음으로 청계광장에 도착했을 때 처음 눈에 들어 온 것은 민주당 깃발과 어깨에 두른 넙적한 띠 였다. 브라운관을 통해 눈에 익은 분들도 계시고,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았던 분들도 눈에 들어온다. 그동안 서운했던 감정이 남아서일까. 선뜻 다가서서 반가움을 표하기가 못내 망설여진다. 그도 그럴 것이 단상에 올라 목청을 돋우는 저 분들의 레퍼토리가 내 예측과 별반 다름이 없을 것이란 미리 짐작 때문일 것이다. 실망이 아니라 절망을 받아드릴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아서 일 것이다...
서글픔...
멀찌기 떨어져 그 분들의 말을 경청해 보기로 했다. 단상에 오른 이가 말끝마다 박수를 유도하지만 내 손바닥은 맞닿을 수 없다. 아니 오히려 주먹이 쥐어진다. 한 여름에 오한을 느낀다. 권력 악(惡)에 맞서 맨몸으로 싸우다가 순교하는 의로운 투사들의 성스러운 투쟁이란 개념은 고사하고, 비장한 각오 조차 보이질 않는다. 불의가 심판되지 않고 지나온 세월이 너무 길었고 그 때문에 많은 이들은 무기력에 빠졌기 때문일까? 하지만 이렇게 누군가 건드려주기만 하면 터질 초강도의 울분이 우리 속에 있지 않은가. 그 조차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국민과 민주당의 생각에 엄청난 괴리가 있다면 이 또한 심각한 일이지만, 민의를 반영하지 않는, 현장의 문제를 풀지 못하는 민주당이 바뀌어야만 한다는 문제의식, 민주당은 지금 왜 국민들이 민주당에 대해 실망하고 있는지를 좀 더 엄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흥분...
커피 생각이 간절했다. 담배 한대 생각도 간절하다. 땡감 씹은 기분을 가라앉히는 데에는 그만한 것도 흔치 않다.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나 사방을 둘러 보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커피전문점이 있다. 한 잔으로는 성에 찰 것 같지 않아 두 잔을 주문하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어둡다. 서울에서 담배피기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곳 저곳 기웃대다 마땅한 장소를 발견하고 마치 신들린 듯이 담배와 커피를 연신 입으로 가져간다. 좀처럼 끓어 올랐던 울분이 가시질 않는다. 뒷처리를 하고 막 골목을 빠져나와 광장을 보다 그만 깜작 놀라고 말았다. 그 잠깐 사이에 광장은 인산인해다. 물론 기대는 하고 올라온 터라 그리 놀라울 것도 없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다. 각양각색의 피켓들만큼이나 그들의 표정도 천차만별이다. 비장함과 결의에 찬 모습이 보이는가 하면 마치 소풍나 온 것 처럼 마냥 뜰떠있는 모습도 보인다. 한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들의 표정 어디에서도 어두움은 볼 수 없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대통령하야를 촉구하며 웃을 수 있는 국민, 그저 대단하다 할 밖에...
그리고 희망...
좋다!!..이 분들과 같이 함성지르는 이 시간이 좋다. 좀 전에 우울했던 기분에는 커피도 담배도 아닌 이들과의 어울림이 명약이었나 싶다. 국민 요구대로 국정조사는 시작됐지만, 집권당과 국정원은 출석조차 안 하고 있다. 국회와 경찰, 집권자 그리고 국가를 지키라고 만들어 놓은 국정원이 법을 거스르며 민주주의를 모독하고 파괴하는 상황에서 공권력도 이 과오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면, 그들을 심판할 수 있는 이는 거리에서 촛불을 든 시민들뿐이다. 26년 전에 그랬듯이, 이제 다시 근본부터 허물어져가는 이 사회의 민주주의를 시민들의 맨손으로 일궈야 할 때가 왔다. 그 대의명제를 알고 있기에 오늘 이들은 서로가 생면부지임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다독이며 한 곳을 향해 소리치고 있다. 헌정질서 파괴범을 내놓으라고, 국가의 근간을 흔든 내란사범을 비호하지 말라고, 부정한 선거의 수혜자인 박근혜는 책임을 통감하고 입장을 밝히라고, 민의를 묵살하고 태연자약하는 정권은 인정할 수 없다고...
"해방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민중은 자력으로 해방된다" 는 체 게바라의 주장이 새삼 가슴에 와닿는다. "특권을 누리는 자는 정신과 마음이 타락한다" 는 미하일 바쿠닌의 말도 현 시국과 어울리는 듯 하다.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 정치적 통치자는 어떤 권력을 가져야 하며, 그가 가지는 권력의 정당성에 대한 주장은 무엇에 근거를 두어야 하는가? 자기 성찰에 인색하고 자만심만 가득한 어리석은 지도자의 패착으로 인해 우리 사회가 혼란을 겪고 있다면 그 정치는 과연 국민으로 부터 정통성을 부여받을 수 있겠는가? 위임된 유한한 권력으로 무한한 권한만을 주장한다면 국민이 납득할 수 있겠는가?...이 오만방자하고 파렴치한 정권에 묻고싶다!!...
토요일...청계광장에서 작은 빵 하나 나눠주시던 고마운 손, 잊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광장에 나와 주셨던 모든 분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