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소매의 검은 도복을 입은 청년이 아랫입술을 꾹 물며 주위를 둘러본다.
충격으로 짖눌린 땅과 불타버린 나무들.
참담한 현장을 보다가 이내 비참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생존자는 없는건가..."
거대한 죽음의 현장
그라운드 제로
훗날 대전이라 불리게 되는 공국의 주요 시가지들을 폐허로 만든 재앙의 시작점이다.
십수일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불타고 있는 숲이 새까맣게 타버린 회색빛 잿더미를 흩날리며 살아있는 존재가 있음을 부정한다.
"크... 맛나다... 이런곳에서 살아있는걸 찾는거야? 여기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를 만큼 순식간에 증발해버렸을껄?"
같은 종류의 검은 도복, 하지만 좀 더 몸에 달라 붙는듯한 느낌으로 차려입은 여자가 옆에 다가와 술이 담긴 호리병을 찰랑거리며 경박하게 입을 놀린다.
특이한 점이라면 이마에 달린 불그스레한 뿔 정도일까?
"피어스, 아무리 너라도 죽은 이들에 대한 애도 정도는 했으면 좋겠군 아니면 용족은 모두 그렇게 인정이 없나?"
청년은 매섭게 내려다보며 불쾌함을 표현하자 피어스라 불린 여자는 피식 웃으며 손사래를 치며 말한다.
"설마~ 내가 지금 술이 들어가서 표현이 이렇지... 용족들은 모두 박애주의자라고? 나 또한 그렇고.."
얄밉게도 자신이 용족임을 어필하듯이 이마의 뿔을 톡톡톡 쳐본다.
그리곤 병을 입에 가져가보지만 술이 다 떨어졌는지 몇번 흔들어보고는 '칫' 하고 혀를 치며 호리병을 어깨넘어로 던지고 말을 잇는다.
"헨돈마이어에서는 산체로 불타 죽은 사람도 있었을텐데... 오히려 이 숲에 있던 사람들은 행복한거야."
이야기하면서 오른쪽으로 눈을 힐긋거린다.
뿔을 세번.
세명이 미행하고 있다는 신호다.
그리고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살짝 보니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보이는게 필시 환영마법의 종류중 하나이리라.
"그보다 조사는 이정도로 하고 어서 빨리 돌아가자. 난 술이 떨어지면 이런 곳은 버티기 힘들다고."
능청스레 이야기하며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청년은 마치 탄환 같은 속도로 뼈대만 겨우 남은 나무들 뒤에 숨어있던 세 명에게 달려갔다.
바람소리가 뒤에 들려올만한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는 표현에 더 가까운 도약이다.
짙은 로브를 입은 사내들은 경악스럽다는 표정이 언듯 보이지만 그 표정조차도 오래 가지 않는다.
양 손으로 각각 후두부에 한번씩. 탁,탁.
청년의 수도는 가볍게 두 명의 정신을 잃게 만들어 쓰러트리곤 남은 한명에게 외친다.
"흑진단 거신 묵호다! 왜 우릴 따라온게냐!!"
거신(巨神)
상대방은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를 아는지 공포에 질린 표정이다.
놀라 엉덩방아를 찍고 넘어져 엉거주춤하는 마지막 한명이 옆에 떨어트린 로드(Rod)를 쥐더니 무언가를 중얼거린다.
"그 녀석의 입을 틀어막아!!"
묵호는 손을 뻗어보지만 이미 영창은 끝났는지 수상쩍은 사내는 킬킬거리며 웃는다.
왜 웃는건지 영문을 모르는 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찰나의 순간 쓰러진 사내들은 두 명과 함께 로브 사이로 빛이 세어나기 시작하더니...
"묵호!!!"
터졌다!!
자기 희생 주문의 일종이었는지 꽤나 큰 규모의 폭발로 직격으로 꽤나 떨어진 거리에 있는 그녀에게도 열기가 후끈 느껴진다.
직격했으면 마법이나 넨으로 보호했을지라도 십중팔구 죽었을게 분명한 강한 공격이다.
"묵호!!!"
다시 한번 불러보지만 불길속에서 답이 없다.
설마 이렇게 허무하게 죽은건가?
그 묵호가?
"묵...!"
"그렇게 걱정하는걸 보니 박애주의자는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불길속으로 뛰쳐나가려다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묵호가 멀쩡한 모습으로 팔짱을 낀 체로 불구경을 하며 서있다.
"누군지 밝혀내지 못한건 아쉽구만. 흠...모습을 보아하니 술은 다 깬 모양이군."
"너...너..."
피어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위 아래로 시선을 때지 못한체 더듬자 '이상한 녀석' 하며 중얼거린다.
"술도 깨고 이제 거추장스러운 꼬리도 때어냈으니 제대로 조사하기로 하지."
그리곤 살짝 인상을 쓰더니 한마디 덧붙인다.
"그리고 죽은 이들에 대한 표현방식은 좀 고쳤으면 좋겠군. 오해의 여지가 있어."
묵호는 주변을 살피며 앞서가기 시작했고 피어스는 '너...너...'를 반복하며 한동안 뭔가 말하려다가 '아니...됬다...'며 한숨을 내어쉬곤 따라 걸어간다.